<font color=blue>모후산을 다녀와서

2007.03.22 17:25

임두환 조회 수:76 추천:11

모후산을 다녀와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  임두환 꽃샘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봄기운이 완연하다. 나날이 짙푸르러가는 보성강 줄기를 따라 봄의 전령들은 겨우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주암댐 주변 화사한 매화나무에도, 금빛 산수유나무에도 꽃은 활짝 피었고, 모후산자락 논밭뙈기를 가는 농부들의 손길에도 봄은 이미 찾아와 있었다. 오늘은 전북대학교 지역발전아카데미 산악회에서 3월 산행을 하는 날이다. 지역발전 산악회에서는 오래전부터 매월 셋째 주 일요일이면 산행을 했다.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여러 차례 동참했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처음 산행이다. 목적지는 전남 화순군과 순천시 경계에 있는 모후산(918.8m)이었다. 호남정맥의 중간지점인 무등산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지맥이 흐르다가 솟아오른 산이다. 본디 이름은 나복산이었으나 고려 공민왕이 왕비와 함께 홍건적의 난을 피했다고 해서 모후산이라 부른다고 했다. 전북대학교 지역발전아카데미는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각계각층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직업도 다양해서 회원들 스스로가 지역발전에 디딤돌임을 자처(自處)하고 있고,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한해에 봄, 가을학기 두 차례에 걸쳐 수료하는데, 금년 봄학기가 31기(期)라고 했다. 내가 28기이니 지역발전아카데미에서 나의 활동은 아직은 풋과일에 불과한 셈이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설레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오전 8시까지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으로 도착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섰는데 아침 안개가 자욱했다. 아침에 안개가 많이 끼면 그날은 머리가 벗겨진다고 하였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날씨여서 등산복 차림은 어정쩡했다. 한낮에는 더울 성싶었지만 별도리 없었다. 집결장소인 종합경기장에 도착해보니 많이들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낯익은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제일 반가운 얼굴은 28기 동기생들이었다. 동기생은 여자 4명, 남자 3명 모두 7명이 나왔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정겨워서 경기장 정문 커피자판기 앞으로 모이도록 했다. 커피 한 잔씩을 뽑아들고는 고문님이 사준 거라며 좋아들 했다. 비록 작은 성의였지만 흐뭇해하는 데서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산행버스에 올라 자리를 정돈해보니 참석회원은 모두 46명이었다. 산악회원을 태운 버스가 전주 시내를 벗어나자 산악회장의 인사말씀이 시작되었고, 총무로부터 산행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회원들 중에는 전문직업도 다종다양(多種多樣)해서 유익한 정보를 얻는데 도움도 됐다. 오늘은 건강스포츠메디칼 대표가 자청하여 앞에 나서더니 사상체질(四象體質)건강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평소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의 특징을 오늘에야 깨닫게 됐다. 성격이나 특징으로 볼 때 나는 소양인체질에 가깝다고 생각됐다. 박수를 하루에 천 번 이상을 치면 만병통치라는 것도 알았다. 박수를 칠 때는 손가락과 손가락이 서로 마주쳐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담소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모후산 입구에 다다랐다. 모후산 등산로 첫 마을은 산막촌 왕대부락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사립문이 없는 돌담집으로 흡사, 제주도 농촌풍경을 연상케 했다. 마을 앞뜰에는 붉은 장탉 한 마리가 네 마리의 암탉을 거느리고서 여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일손 바쁜 마을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늙은 토종개 한 마리만 보초를 서고 있는지, 우리를 향하여 바라보고 있을 뿐 으르렁대지는 않았다.   모후산 계곡 따라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와 빽빽이 들어찬 나무숲에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정말 운치있는 풍경이었다. 밑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니 코앞인 듯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등산에서 속단은 금물이라고 했던가, 오르다 보니 순탄했던 길은 짧았고 가파른 길은 계속이었다. 땀이 비오 듯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인생여정도 산에 오르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오늘보다는 내일을 위해서 살아간다하지만, 항상 속아 사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싶었다. 내 자신도 험난한 세파(世波)에 허우적이며 시련을 겪어야 했고, 어려웠던 절박감에 잠 못 이룰 때도 있었다. 이럴수록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차게 일어나야 했다.   “내가 건강하고 잘 살아야 형제도 친구도 있는 것이지, 병들고 돈 없으면 형제도 친구도 멀어진다.” 고 말하고 싶다. 내가 몸소 겪었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구슬땀 흘리며 오르다보니 정상이 눈앞이었다. 정상에 올라왔다는 자부심에 내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기암절벽 바위틈에서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으면서도 자태를 뽐내고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모두들 의아해 했다. 끈질긴 생명력 앞에 두 손 모아 소원을 비는 이도 있었다. 눈 아래 저 멀리 보이는 주암댐 굽이진 자태와 모후산자락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광주에서 왔다며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은 도시락을 풀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우리 일행도 자리를 챙겨야 했는데, 장소가 비좁아 끼리끼리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해발 918.8m 모후산 정상에서 도시락을 풀어 놓고 오붓하게 서로의 정을 나눌 수가 있어서 흐뭇하였다. 내려오는 길은 험난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비탈진 바위틈 사이로 산죽(山竹)을 헤치며 내려오는데 간담이 서늘했다. 앞의 길잡이가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소대장의 판단착오로 소대원을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그런 꼴이 되어버렸다. 앞뒤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겁을 먹는 모습들이 마치 유격훈련을 받는 것 같았다. 앞장과 끄트머리 그룹과는 무려 30여 분이나 차이가 나게 도착했는데도 누구하나 낙오자는 없었다.   오늘도 여느 때나 다름없이 산을 내려와 하산주(下山酒)를 마셨다. 미리 준비해온 음식으로 즉석에서 두부김치국을 끓여 먹었다. 모두가 둘러앉아 뜨겁게 한 그릇씩을 나누며 술잔도 기울였다. 다음 달 셋째 주 일요일에 꽃구경을 겸해서 산행하기로 기약하고, 지역발전아카데미와 산악회원들의 건투를 빌면서 즐거웠던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 2007.  3.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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