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사돈여학생

2007.03.27 20:29

김세웅 조회 수:107 추천:10

사돈여학생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고급) 김세웅 내가 진학한 중학교는 전주에 있었다. 일본의 강점 하에서 국권을 되찾은 해방 다음해 일이다. 내 집은 학교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전주시내에 하숙을 하거나 기차로 통학을 해야 만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하숙을 하자니 경제적 부담은 물론 아직 어린애 티도 못 벗은 터라 미덥지 않고, 또한 기차운행사정은 상상 이상으로 엉망인 처지였다. 그래 어쩔 수 없이 전주에 사시는 외삼촌 집에서 통학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외삼촌 집을 찾아가 보니 내 또래의 예쁘장한 단발머리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사돈벌이 되는 외숙모님의 친정 여동생이라 했다. 그도 시골 K읍에서  전주의 J여중에 갓 진학하게 된 처지여서 전 후 사정이 나와 꼭 닮은 형편이었다. 이날부터 사돈학생과 나는 같은 집에서 함께 지내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외삼촌 집은 전주예수병원 경내에 위치해 있는, 양지 바르고 앞이 툭 트여 전망이 좋은 언덕바지의 아담한 집이었다. 예수병원은 제2차 세계대전 전, 의료선교 차원에서 기독교 선교기관에서 운영하던 곳이었다. 비록 광복이 되긴 했지만 그때까지 아직 개원 전이어서 빈 건물만이 을씨년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붉은 색의 벽돌로 지어진 꽤나 큰 양옥 건물이었다. 뜰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둘레에 몇 그루의 우람한 팽나무가 건물 지킴이 마냥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까치나 참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귈 뿐 정말로 한적하기만한 지대이기도 했다. 외삼촌 집은 전에 병원에서 기숙사로 사용되던 집이었다. 방이 세 칸으로 된 구조였는데 한쪽 갓 방은 도청에 근무하시는 과장님이 살고 있었고, 외삼촌 집은 중간치 방이었다. 기숙사로 쓰였던 방인지라 공간이 널직했다. 그 한 칸 방에서 모든 식구가 식사는 물론 잠자리까지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되돌아 보면 얼마나 재미나고 배꼽을 틀어쥐며 웃을 노릇인가? 그러나 재미로웠다는 기억도 없거니와 그다지 부자유함도 느끼지 못하였다. 밤에 잠을 잘 때는 이러했다. 내가 창문 쪽에 드러누우면 옆에 외삼촌께서 누우시고, 다음은 외숙모님 그리고는 맨 끝에 사돈여학생, 이런 순서였다. 그렇게 상당기간을 사돈여학생과 나는 한 식구로 생활했었다. 우리는 쪼그만 애들이면서도 사돈으로서 예의를 지킨답시고 서로 마주쳐도 한결같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처지였다. 한마디 말도 건넨 적이 없고 아마 똑바로 쳐다 본 적도 없었을 성싶다. 하물며 무슨 낭만적인 기억이랴. 그 사돈여학생은 단지 외숙모님을 쏙 빼닮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여학생으로 보이기보다 그저 어려운 사돈여학생으로만 의식되었다. 결국, 처음 만났을 때, 인사 한마디 없이 만난 우리는 한 동안 같은 식구로 지냈지만 작별인사 한마디도 없이 그 생활을 마감하고 말았다. 외삼촌 집을 언제 나오게 되었던가는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는 야무지게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외삼촌은 그때 신혼시절이었다. 겉으로 말은 없었지마는 그 생활이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런데도 외삼촌 내외분께서는 싫은 내색 전혀 없이 우리를 따뜻이 보살펴 주셨다. 생각할수록 무척 염치없고 고마운 일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야박하기만 한 세태에서는 그런 경우란 어림없는 일이리라, 아니 어느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런 인정이 못내 그립다. 어언 반세기도 훨씬 지나버린 옛날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때의 회상은 저 하늘가의 아름다운 뭉게구름처럼 채색되어 추억의 주머니 속에 간직되어 있다. 그 때의 추억을 끄집어내게 될 때면 빙그레 웃음이 절로 나오곤 한다. 어쩌다 외숙모님 자매들을 만나게 되는 날이면 그 이야기 메뉴는 빠뜨리지 않고 등장하고, 모두들 폭소를 터뜨리면서 재미있어 한다. 거듭 되풀이 해도 지루하기는커녕 즐겁기 만한 이야기 거리인 셈이다. 그때의 사돈여학생이 엊그제 우리 내외를 점심에 초대해서 한 때를 보냈다. 나도 늙었지만 그 분도 여전히 곱기는 하나 칠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였다. 외삼촌께서는 여러 해 전에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외숙모님과 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의 추억담이 빠질 리 없었다.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어른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교회의 권사합창단을 구성하여 그 단장으로 6년째 국내외 공연을 다니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수줍기만하고 말이 없던 여학생이 담소도 잘 하시고 큰 활약을 할 줄이야…. 앞으로 더욱 건강하시고 선한 사업을 많이 펼치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세월은 무척 많이 흘렀지만 웃음을 자아내는 그 당시의 추억은 도무지 늙을 줄을 모른다.                                                           (200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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