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세월은 저 홀로 가지만

2007.03.30 10:49

조내화 조회 수:117 추천:11

세월은 저 홀로 가지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야) 조내화                                                                        세월은 저 홀로 간다. 흔적도 없이 갔나보다 했더니, 세상은 온통 세월이 지나간 흔적들뿐이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나보다 했더니 어느새 훌쩍 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머리의 새치는 어제는 없었던 것이요, 눈가에 자리 잡은 잔주름 역시 세월의 흔적이다.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나도 분명 새로운 나일 것이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 오늘은 어제와는 또 다른 새로운 시간이다.   봄비가 멈춘 출근 길. 어제는 보이지 않던 꽃들이 오늘은 세상을 다 차지하고 있다. 진달래는 부끄러운 봄 처녀의 불그스레한 볼처럼 수줍게 숲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길섶의 개나리는 도로를 향해 무리지어 씩씩하게 버티고 서있다. 하얀 면사포를 뒤집어쓴 신부 같은 목련이 봄 햇살에 흠뻑 취할 때,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산수유는 가벼워진 봄바람과 춤을 추고 있다. 듬성듬성 피어있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할 때, 발밑에 있는 제비꽃들은 이제 막 솟아오르는 새싹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는데, 아니 보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엔 세상이 모두 꽃으로 채워진 느낌이다. 간밤에 새로 핀 것인지, 아니면 어제도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한 것인지…….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달은 해탈의 경지에 오른 듯 기쁨이 넘친다. 세상은 언제나 내 자리만큼 비워두고 지나간다고 생각했는데, 며칠동안 집안에 머물다 찾아 나선 공원이 온통 꽃 잔치라며 호들갑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짧은 순간도, 세상은 자신들의 법칙대로 세상을 꾸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았다고 세상이 멈추어 나를 기다려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은 이팔청춘이라 하던가! 마음이 머문 자리에 내 몸도 머물기를 바라지만, 내 몸은 이미 그때의 그 몸은 분명 아니다.     서울에서 작은아버지가 내려 오셔서 모시고 구례 산동 산수유마을을 찾았다. 작은아버지가 내려오시면 온 집안이 항상 비상사태였다. 조금만 지체하거나, 정리되어 있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자세는 바르고 목소리는 힘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오신 작은아버지는 걸음걸이부터 종종걸음이셨다. 평생 그대로일 듯했는데, 시간은 작은아버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아버지와 둘이서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간의 흔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담을 붙들고 있는 이끼들도, 돌 틈을 비집고 자란 산수유 꽃도, 정녕 작년에 본 모습은 아니다. 새롭게 세상에 나왔건만 보는 내가 작년과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산수유 꽃이 작년에 핀 그 꽃이 아니듯이, 작은아버지도 분명히 작년의 작은아버지는 아니다. 저 홀로 흐르는 시간의 흔적들로 몸과 마음이 많이 변했을 것이다.   세월은 저 혼자 가지만 세상만물은 저 혼자 가지 않는다. 나 때문에 네가 달라졌고, 너 때문에 내가 달라졌다. 오늘의 나는 나 혼자만의 변화가 아니고 나를 둘러싼 세상 모두가 나를 변하게 만든 것이다. 돌 틈을 비집고 나온 산수유는 그 돌 때문에 구부러져 살았고, 바위에 가려진 산수유 꽃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햇볕을 받기위해 기를 쓰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혼자 저절로 살았을 듯하지만 그 속에는 삶에 대한 처절한 노력들이 들어 있다. 세상에는 저절로 된 것이 없다. 관심 있게 살펴보고, 관심 있게 돌보아주고, 관심 있게 보듬어 줄 때 의미 있게 변화하는 것이다. 과수원의 사과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단맛을 더해 갈 것이고, 화단의 향나무는 정원사의 가위질에 값어치를 더해 갈 것이다. 내가 맡고 있는 어린이들도 내 관심 속에 더 멋있는 사람들로 커 갈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즐겁고 편안하기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럽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가 많다. 향과 멋을 나누어주기보다는 어려움과 고통을 줄 때가 많다. 잠시 스쳐지나갈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짓누르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들추어 보았다. 내 얼굴에 그려진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행복함이 많이 숨어 있는 듯하다. 나의 세월은 내 얼굴에 행복한 모습을 그려 놓고 간 것이다. 아니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나에게 행복이라는 세월을 선물하고 저만큼 물러 간 것이다.        세월은 잠시도 머물지 않으며 세상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사람들은 추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 자리에 머물려한다. 화려한 그 순간에, 행복했던 그 순간에 세상이 멈추어주기를 고대한다. 순간을 영원으로 길게 끌어내기도 하며, 현재에 끌어다 끼워 넣기도 한다. 마음만은 이미 그때로 되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그때로 되돌린 듯 착각한다. 한참 동안의 행복한 터널을 빠져 나오면 현실속의 나는 이미 다른 내가 되어 버린다. 행복을 찾아 헤매는 나그네…….   지금까지 나는 행복을 더 많이 세월에 실어 보냈을까, 아니면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을 더 많이 세월에 실어 보냈을까? 앞으로 나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214,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