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이 집에서 오늘이 있기까지

2007.05.15 08:11

정원정 조회 수:97 추천:8

이 집에서 오늘이 있기까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기) 정원정                                                                                           정읍시 신정동 부귀부락, 이곳에 집을 짓기 시작하며 오간 세월이 12년이고 아주 상주한지도 어느덧 12년째다. 그동안 나는 몸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서울에 있었다. 여러 여건이 안주할 수가 없어서였다. 여름이면 뱀이나 지네가 나온다. 제초제와 농약을 쓰지 않으니 더 그렇다. 그리고 이 터를 휘어잡는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서였다.    애당초 여기에 터를 잡은 것은 노후에 살려고 집을 먼저 지은 뒤 사람이 살만할 즈음, 남편은 허허롭게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혼자가 된 나는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르내리며 관리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살림을 간수하랴, 이곳까지 관리하랴 혼자 힘으로는 버거웠다. 오죽하면 서울과 정읍을 오가는 열차 속에서 책을 읽는 그 때가 내겐 즐거운 휴식시간이었다.    큰아들이 장가를 들자 살림을 맡기고 나는 12년 전 아주 이곳 정읍으로 내려왔다. 재산을 지킨다는 것도 한 몫 했지만 내 생에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기쁨도 있었다. 조촐한 설계도 세웠다. 조용히 기도생활을 하며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글도 쓰려니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꿈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소망을 뒤로 미루고 일 속에 나를 묻었다. 일을 보고 그냥 버려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보면 끝장을 내야 했다. 감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나무를 심고, 물과 거름을 주며, 풀을 베고, 돌멩이를 골라내는 등 상머슴처럼 일을 했다. 어느 정도는 그이가 살았을 적에 해 놓았지만 놉을 얻어 한 일도 많았다. 나무 전지부터 작은 나무 옮겨 심는 일, 풀 뽑는 일은 내 몫이었다. 톱질, 낫질, 호미질, 곡괭이질 안 해본 일이 없다. 어느 정도 하면 정리가 될 줄 알았다. 허나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봄, 여름 내내 풀과 전쟁을 하고 나면,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도 있었다 하지만, 그 넓은 터에서 낙엽을 쓸고, 겨울엔 눈을 치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겨울이면 천지가 하얗게 눈이 쌓이는 날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나면 여간 포근한 게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더 바빠야 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일본 책을 읽고 바느질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뿐 아니었다. 9년 전 어느 기회에 한지공예품을 보게 되었다. 그게 무척 탐이 났다. 이전에 혼자 만들어 본 경험이 있기에 정식으로 배우기로 했다. 서울 상명여대 평생교육원에 등록하고 상기호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한지공예는 조선시대에 궁중이나 서민층에까지 다채롭게 보급되던 게 구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걸 다시 찾아 맥을 이어 재현시킨 독보적인 일인자가 상기호 선생이다.    상기호 선생님은 70이 넘은 내가  지방에서 다니는 것을 격려하며 개인전을 열어 보라고 몇 차례 권유했었다. 그땐 별 뜻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홉 번 입선, 특선을 하는 동안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기력은 쇠해지고 눈도 어두워졌다. 땀 흘리는 일은 이제 손을 떼야 했다. 비로소 한지공예개인전을 나이 80에 열고 싶었다. 그래서 2006년 가을에 서울에 장소, 대여료, 도록, 인쇄 등을 알아봤다. 인사동에 장소를 알아보던 중 생각이 바뀌었다. 2006년 초겨울, 느닷없이 든든하게 벗이 되어주던 건강한 한 친구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석에 눕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가깝게 지내던 형님 같은 분이 발병한 뒤 두어 달 만에 저 세상으로 훌훌히 떠나버렸다. 허퉁하고 가슴 아팠다. 한 동안 허방에 빠진 듯 허둥댔다. 그러자 내 삶의 미래도 불확실하고 불안했다. 이제 내게도 정리할 시기가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초조로웠다. 그때까지 계획했던 다른 일은 뒤로 미뤘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20대부터 어찌어찌 적어두었던 잡문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늘 숙제처럼 버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궁굴리며 지니고 있던 것들이다. 가난하고 끔찍하고 황폐하고, 그리고 슬펐던 시공간을 건너온 글들이다. 깊은 사유도 갖추지 못한 한낱 개인의 주변 얘기일 뿐, 역사성도 사회의식도 결여된 싱겁기 그지없는 글이지만 덮어두기에는 왠지 서운하고 내놓자니 엉성하고 서툰 글발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생의 일부분이나마 이것을 한 권의 문집으로 묶고 싶었다.    항용 무언가에 목말라 갈급하고 서 있는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고 부정을 해도 그 자리는 다시 제자리로 부동했다.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 갈 총명도 없으면서 그것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은 오롯이 나를 고뇌에서 헤매게 했다. 그런 세월이 흘러 80나이를 바라보게 되어 먼 길을 걸어온 한 생의 흔적을 눈 위의 발자국인 양 뒤를 바라보며 이 글을 다듬었다. 그 동안 사무치게 서러웠던 것, 섭섭했던 일, 가슴의 응어리들을 녹이고 화해하려는 작업이기도 했다. 살아낸 존재에 대한 은총을 감사할 뿐 이제 무엇을 후회하고 또 바라겠는가!                                                                             (2006.12.23.) 이렇게 두 달 동안 머리글까지 준비한 글을(시, 편지, 산문) 막상 문집을 만들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아무리 비매품으로 친지나 자식들만 보인다 해도 원고지 470매나 되는 글을 함부로 내 놓을 수가 없었다. 설령 문집을 못 엮더라도 글 쓰는 습작공부를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이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덮어놓고 찾아간 곳이 행운을 만난 것이다. 훌륭한 교수님이 지도하시고 이미 문집을 내고, 수필계간지에 글을 발표한 쟁쟁한 분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낯설고 어색하며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도랑물에 놀던 물고기가 큰 가람을 만난 듯 모두가 새로웠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그 과정이 즐겁고 소중했다.    문학기행으로 이곳저곳 다니면서 문우들과 차츰 가까워졌다. 지난번 선운사 기행에서는 형제자매의 정감이 감돌았다. 그때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사는 곳도 찾아볼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숲 해설도 곁들이고 식사할 곳도 있으며, 동이학교(東夷學校)도 둘러보고 끝에는 우리 집 마당에서 담소하는 시간을 가져도 하루 기행은 잘 되겠다 싶어’ 내가 회장께 제안을 했었다. 그렇게 말이 나와서 이번에 교수님을 모시고 열 세분이 내가 사는 고장을 찾았다. 이곳에 집을 지은 지 근 20여년 만에 축제가 펼쳐진 셈이다. 창과 북으로 흥을 돋웠지만 시간이 짧아 아쉬웠다. 먼 길을 가리지 않고 여기까지 와 주신 것도 고맙고 기뻤다. 이 집에 따뜻한 정을 흠뻑 뿌리고 빗속으로 떠나는 뒷모습들이 참으로 귀해 보였                                                (2007.5.13.)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214,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