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비단 꽃 넘세

2007.12.17 21:22

정원정 조회 수:202 추천:7

비단 꽃 넘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정원정                                                              ‘비단 꽃 넘세’는 나라만신 김금화(金錦花) 씨의 자서전 제목이다. 도올 김용옥의 서시가 곁든 이 책은 금화의 이름에서 딴 ‘비단 꽃’과 아명이었던 ‘넘세’를 합친 말이다. 김금화는 1931년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했으며 나라 굿으로 유명한 큰 무당이다. 작년이던가, 이경자의 소설 ‘계화’를 읽은 적이 있다. 김금화를 모델로 쓴 작품이었다. 오래 전에는 TV에서 김금화 씨가 작두 위에 섰던 화면을 보았었다. 또 언젠가는 김금화의 신명나는 굿판이 벌어진 그 자리에 고 강원용 목사가 앉아있던 장면도, 스치는 화면에서 보았다. 내가 평소 존경하던 목사님의 생전 모습이었다. 역시 생각이 열려 있는 분은 달랐다. 무속신앙이라 해서 배척하지 않고 무속종교까지라도 아우르는 유연성을 보인 분이라고 생각 했었다.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신에 대한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무속인은 어떤 사람이며 그가 만난 신은 어떤 분인가 궁금했다.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김금화가 살아온 길은 참으로 험난했었다. 12세 때 병을 앓은 뒤 17세에 내림굿을 받았었다. 그로부터 철물이굿, 만수대탁굿, 배연신굿, 진오귀굿 등 모든 굿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책 내용에서 보면 그간의 배고프고 외롭고 아프게 살아온 자취가 적혀있다. 옛날에는 무당이라면 먼저 말부터 놓았었다. 하시를 해서다. 지금은 많은 학자들이 무속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며, 기독교신학 분야에서도 일부 자료를 찾아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는 연구팀도 있다. 김금화는 1982년 한미수교 백주년을 기념한 미국공연 이후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윤이상 진혼굿 공연도 했었다. 지금까지는 나라굿을 줄곧 도맡아 왔으며 외국에서는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1985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강화도에 ‘금화당’이란 전수관을 지어놓고 무속문화의 전수에 힘쓰며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과 서해안 풍어굿의 명맥을 이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민간신앙과 불교, 유교가 어우러져 폭넓은 복합체를 이루었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현대 상황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문화유산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 중 민간신앙인 무속신앙은 전통문화에 끼친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도올 김용옥은 이 자서전의 들머리에서 “무속의 세계야말로 우리 민족의 예술과 종교의 원형이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전래의 풍습에는 가정에서 모시는 가택신이 있었다. 부엌의 조앙신, 대문의 문신, 광의 칠성신, 안방의 조상신, 삼신, 마루의 성주신. 뒷간의 측신, 뒤꼍 장독대 옆의 지신 등 한 가정을 지키는 여러 수호신들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부엌의  부뚜막 위 선반에 정성스럽게 물을 떠 올리며 조앙신을 섬기는 것을 보았었다. 장독대 옆이라든가 큰 나무 밑에 정화수를 떠 놓고 어머니들이 두 손을 비비며 신에게 비손하는 모습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초하루던가,  방 윗목에 시루떡 상을 차려 놓고 참기름이 담겨진 접시에다 심지를 만들어 불을 붙여 저녁 내내 밝혔었다. 시루 둘레가 불의 갓을 만들어서 불빛은 은은했었다. 그럴 적엔 경건한 분위기가 그윽이 방안을  감돌았다. 그렇게 우리 어머니들은 일구월심 식구들의 건강과 집안의 운수대통을 축수했었다. 그러한 풍습이 남아있던 부락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무당이었다. 7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무당은 부락 근동을 다니며 집집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안녕을 빌어주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축원을 했고, 병이 나면 치유해 주기도 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시난고난 앓으면 어머니는 으레 기름때가 찌든 서책을 들고 주문 외우듯 읽으셨다. 그래도 차도가 없을 땐 건너부락에 사는 단골어미를 불렀다. 그는 아무 천이나 쌀을 붓고 오물여서 둥글둥글하게 만들어 내 머리에 지압을 하듯 누르면서 무슨 말을 한참 하고나면 시원하기도 했었다. 며칠 뒤면 나는 병석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무당은 병을 치유하는 의사역할까지도 톡톡히 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동네에서 좀 떨어진 논배미 한 가운데에 둠벙이 있었다. 거기에 누가 빠져 죽었는지 하루는 무당이 알록달록한 장옷을 입고 무엇을 쫓는 시늉 같기도 하고 누구를 부르며 물속에 무엇을 넣었다 꺼내는 행동을 거듭했었다. 동네 사람들이 쭉 둠벙 가에 둘러서서 구경을 했었다.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건져 올려야 한다고 했다. 김금화 씨의 자서전을 보니 넋거리굿이란 굿이 있었다고 한다. 물에 빠져 죽은 이의 혼을 건져오는 굿이라고 했다. 내가 커가면서 차츰 무당이나 굿도 볼 수가 없었다. 일제 때는 일본이 나서서 굿과 무당을 배척했고, 한국전쟁 때는 무당은 인민을 좀 먹는 반동분자라고 했었다. 또 새마을운동 시절에는 경찰이 무당의 활동을 막았었다. 무당은 신과 사람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굿은 조상을 숭배하며, 복을 나누고, 한을 풀어주며, 굿은 복수를 가르치지 않고 용서하며 위로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혼자서 해결하지 못할 때가 있다. 너무 엄청난 일을 겪었거나 너무 상처가 깊어 가슴속에 피고름이 맺혔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을 때, 우리는 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김금화 씨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이다. .그가 가장 기쁠 때는 죽어가는 사람이 소생할 때라고 했다. 병원에서도 효험을 못보고 병명이나 원인도 모르는 사람이 죽음의 고비를 헤매다가 자기한테 찾아와 신과의 교류에서 건강을 되찾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들의 배경에 유능한 신이 있다고 믿어서일까, 매우 자율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속신앙에는 사람들의 한과 눈물을 보듬고 고달픈 상처를 치유하는 포용력이 있었다. 남의 눈물을 씻어줄 때는 자신이 숱한 아픔을 겪은 자만이 가능했으리라. 그만큼 무당수업은 엄격했다고 한다. 근대화의 폭력 앞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열등한 종교로 취급받으면서도 긴 역사 속에서 맥을 이어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경지는 다 미신이라고 치부하고, 내가 믿는 종교만 우월하다는 타 종교와의 단절보다, 서로 존중하는 풍토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덮었다.   *만신ㅡ 여자 무당을 높여서 일컫는 말                (2007.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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