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고흐미술전시회에 다녀와서

2007.12.22 07:50

정원정 조회 수:248 추천:8

고흐미술전시회에 다녀와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정원정 “몸은 좀 어떠세요? 이번 고흐 전시가 이모한테는 마지막일 텐데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이질녀의 말이다. ‘고흐 미술전’에 간다간다 하면서 건강 때문에 그와의 약속을 미루는 내게 이질녀의 재촉이 성화같았다. 그래, 내 생전에 ‘빈센트 반 고흐 미술전’이 언제 또 오겠냐 싶어 서둘러 12월 13일 KTX를 타고 서울로 갔다. 정동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에 도착하니 이질녀와 그의 아들이 나와 있었다. 평소에 책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꽤 많이 눈에 들어 왔다.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해바라기> <추수> <별이 빛나는 밤> <씨 뿌리는 사람> <고흐의 자화상> 등 화집에서 보았던 낯익은 그림들이다. 유화 그림마다 강력한 인상이 풍겼다. 유화작품 45점, 드로잉 및 판화 22점 총 67점의 그림에서 고흐의 삶의 일면을 상상하면서 감상하게 되었다. 한 눈에 얼핏얼핏 보아도 생동감 있는 붓놀림이 여느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는 달랐다. 두터운 물감이 유독 눈에 띄었다. 별과 해 형상의 둘레 빛을 어지러울 정도로 휘둘러 그린 것도 특이 했다. <노란 집(거리)>은 짙은 코발트색 하늘을 배경으로, 광장 앞마당에 노란 집이 서 있는 그림인데 참 탐이 났다. 하늘과 노란집의 조화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화집에서는 이런 선명한 색채를 보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언덕이 어색하다 싶어 나중에 도록의 해설을 보니 언덕이 아니라 모래더미를 그린 것이었다. 노란색과 푸른색을 많이 써서 그린 농촌 풍경은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실제로 고흐는 농민의 삶을 고귀하게 묘사한 밀레의 그림에서 감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네덜란드 태생인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27세부터 10년 후인 1890년까지 900여 점의 회화를 남겼다. 문학과 예술사에 조예가 깊었지만 그림은 거의 독학한 화가였다고 한다.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자신을 호소력 있게 글로 표현하는 사색적이고 지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700여 통이나 되는 편지를 남길 만큼 글재주도 대단했다. 그러나 살아서는 물질적인 안정도 화가로서의 자부심도 사회적인 인정도 못 얻었다니 홀로 좌절과 상처로 얼룩진 고통의 삶이었으리라. 그래서일까, 환각증상, 우울증 등을 겪었다고 한다. 어떤 화가보다도 처절했던 삶을 살았던 화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흐는 광기 들린 천재라고들 하지만 그의 ‘내 영혼의 자서전’에서나 남겨진 편지글에서 보면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들어나 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그림들은 인간의 슬픔과 혹독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쏟아낸 결과물들이었다. 무엇이 그를 37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을 하게 했을까, 만나는 여자마다 헤어지게 되고 경제적으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동생 테오에게서 도움 받는 형의 입장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두 형제의 우애를 보면 깊고 아름다웠다. 애정이 깊을수록 마음은 애잔했으리라. 화집에서 더러 보았던 것과는 달리 실제의 작품을 보면서 그의 짧은 생이 먼 사람의 일이 아닌 듯 느껴졌다. 전시회를 둘러 본 다음 푸라자호텔 식당에서 이질녀의 아들이 베풀어 준 융숭한 점심대접을 받았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당일치기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내내 전시장의 그림들이 눈에 어렸다. 자연과 풍광에 매료되는 감수성이 남다르게 예민했던 한 작가의 삶이 왜 그토록 고독하기만 했을까. 그의 어느 자화상에서나 눈빛은 불안해 보였다. 여러 자화상이 있지만 그 중의 <자화상> 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었던 자화상에서 문득 내 어렸을 때의 한 담임선생님의 영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은 일본인이었고 총각이었다. 끄떡하면 내게 앞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하라고 했었다. 일본어로 짧은 이야기를 한 번 한 것이 마음에 들었었나보다. 좀 장난스러운 데가 있는 분이었다. 하루는 미술시간에 단위 의자에 앉은 자신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까만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 하얀 이를 함박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열심히 그렸다. 그려 놓고 보니 나도 놀라웠다. 실물과 사생이 똑 같은 게 아닌가, 신기했다. 내 짝 친구는 실제 대상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 그림만 보고 그리는 것이었다. 그 뒤 내가 그린 선생의 초상화는 교실 뒷벽에 붙여졌다. 내 그림이 늘 뒷벽에 붙여졌지만 그 뒤로는 다시 내 그림이 잘 그려졌다는 느낌을 가진 기억은 없었다. 고흐의 수염은 붉은 색이지만 그 때의 담임선생의 검은 수염이 다를 뿐 앉은 자세와 구도가 흡사했다. 집에 돌아와서 며칠 뒤 고흐의 서간집을 읽어 보았다. 불멸의 화가, 그의 경험과 삶의 고통에서 나왔음직한 그림, 편지가 곁들인 꽤 큰 책이다. 자연과 풍경에서 위로와 감흥을 찾아내는 감성을 지닌 대목이 마음을 끌었다. 화가의 서정적인 편지글들이 그림 못지않게 감동을 자아냈다. 불꽃같이 살다간 화가, 미치지 않고 어찌 불후의 명작이 나왔겠는가 싶다. (2007.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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