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동서

2008.02.05 07:52

배영순 조회 수:98 추천:5

동서 (同壻)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배영순 “우리가 네 할아버지한테 속았다.” 어머니의 음성이 귀에 쟁쟁했다. 온몸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흰머리 사이에 간간히 섞여있는 검정머리를 빼곤 입술까지 하얗게 변한 작은 어머니는 싸늘한 쇠 침대에 반듯이 누워계셨다. 어느 날부턴가 작은 어머니는‘ㄱ’자로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되셨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던‘ㄱ’자 허리를 이제야 반듯하게 펴고 누워계셨다. 얼마나 반듯하게 서서 걷고, 눕고 싶으셨을까? 오랜 세월 병마와 싸우느라 살 한 점 남아있지 않은 몸을 포르말린과 알코올로 정성스레 닦은 작은 어머니는 한 겹 한 겹 베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승에 남은 사람들은 유리벽 너머 저승으로의 여행을 떠나시기 위해 곱게 몸단장을 하시는 작은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손녀딸의 흐느낌 외에 칠흑처럼 고요하기만 한 분위기는 여섯 딸들이 오열하던 어머니의 저승 길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우리 집과 작은 집은 커다란 댓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갑자기 필요한 농기구, 양념거리 등 심지어 일하던 일꾼들이 찾는 막걸리까지 우리 집이 없으면 작은 집으로, 작은 집이 없으면 우리 집으로 달려가고 달려오곤 했었다. 제법 큰 농사를 지었던 양쪽집의 일상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는 한 살 차이로 우리 집의 7남매와 작은 집은 6남매는 거의 같은 또래였다. 50년 이상 같은 마을에서 두 분이 평생을 사셨으니, 같이 살아온 햇수로만 계산해 보면 부모와 자식보다도 더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동서지간은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했던가. 두 분은 가까운 듯 멀고 먼 사이였다. 내성적이셨던 어머니는 푸념을 하시곤 하셨다.“네 할아버지한테 속았다.” 일제시대에 보통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와 함께 드넓은 간척지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셨다.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작은아버지가 집안을 일으켜 세워주기를 기대하면서 서울로 대학에 보내셨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작은 아버지가 집안을 번듯하게 세워 주는 게 아버지의 꿈이셨다. 아버지께서 새벽부터 밤 늦도록 쟁기질을 하시어 받아온 품삯은 할아버지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고,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께“J야, 이 돈은 다 네 것이니라, 내가 저축해 두었다가 이자를 늘려 주마."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우리 부모님의 하늘이고 거역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집안을 번듯하게 일으켜 주리라 기대했던 작은 아버지께서는 졸업한 뒤 농사를 짓겠다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형님, 동생’하면서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가 50년 이상을 한 마을에서 평온한 듯 살아왔지만, 평생 어머니 마음속에 작은 어머니는‘여우’였고 ‘가해자’였다. 남아선호사상이 뿌리박혔던 시절, 내 어머니가 딸만 내리 낳아 푸대접 받을 때, 작은 어머니는 아들 셋을 계속 낳아서 할머니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작은 어머니께서 세 아들을 끌고 할아버지 병상에서 온갖 재롱을 떨게 했으니 아버지 쟁기질 품삯인 할아버지 통장의 돈은 작은 집 손자들 몫으로 건너갔다.“우리가 네 할아버지한테 속았당개.” 7남매 학비로 쩔쩔맬 때,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푸념을 하시면서 한숨을 쉬시곤 했다. 도시로 나와 우리 자매들이 문간방에 세 들어 자취할 때, 작은 집 사촌들은 번듯한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었으니 작은 집과 우리 집의 빈부의 격차는 확연했다. 그러나 두 분에게는 두 집 13명의 자식들은 생일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등 모두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아버지마저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기신 뒤, 고향에 갈 일이 없었던 우리 자매들을 작은 어머니께서는 보고싶어 했다고 한다. 작은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는 여든 셋의 아버지께서 일흔 일곱 되신 작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걱정하셨다. 형에게 아우란 노인이 되어도 어린 동생처럼 생각되는 모양이다. 이제 평생 동고동락했던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 두 동서는 저승으로 가셨다. 먼저 가신 어머니께서 작은 어머니를 만나셨다면 이승에서 풀지 못했던 가슴의 한을 좀 푸셨을까? 유난히 자식 자랑이 심하셨던 작은어머니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다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08.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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