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되찾은 봉급날

2008.02.21 17:35

윤석조 조회 수:114 추천:9

되찾은 봉급날                         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윤석조 직장도 없는 사람이 봉급날을 왜 기다리고 있을까? 세월에 밀리고, 또 한 치 앞도 못 보는 현 정부의 교육정책과 명예퇴직 수당이라는 사탕발림으로,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퇴직하여 허탈한 마음으로 연금을 받아 생활비도 아껴가며 살아간다. 계절 따라 즐기던 관광도, 별 부담 없이 드나들던 다방이나 동네 슈퍼의 휴게실, 목욕탕, 이발소 등등의 출입도 자제하고 시내버스를 이용할 때도 좌석 버스는 피하며, 애경사와 꼭 가야 할 모임 외에는 나들이도 삼간 채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도 예금 잔고는 줄고 쓸 곳은 왜 이렇게 많은지?      화창한 어느 봄 날, 찜찜한 마음으로 바닥이 드러난 예금통장을 들고 몇 만원이라도 찾아 발등의 불부터 끄자는 심정으로, 농협에 가서 예금을 인출한 뒤 통장을 받아 살펴보니 예금 잔고가 더 불어나 확인하여 보았다. 계좌 번호  000000 윤 경희. 맡기신 금액란에 200,000원이 들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통장을 꼭 쥔 채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입금한 날짜를 보니 경희의 봉급날이었다. 연휴나 방학 때 집에 오면 십만 원짜리 수표  한두 장을 용돈이나 하라며 주고 갔는데, 이렇게 내 농협 통장에 이체시켜 주다니……. 나는 부모님께 이렇게까지 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세월 속에 묻혀진 내 봉급날을 생각하여 보았다.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근무하면서 봉급은 얼마나 될까? 또 어떻게 써야할까?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봉급날을 무척 기다렸다. 첫 봉급을 받아서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의 내의 한 벌씩과 형제들에게 줄 간단한 선물 한 가지씩을 사고, 하숙비를 내고 나니  생활비가 조금 남았을 뿐이었다. 저축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사명감과 꿈, 그리고 열과 성만으로 시작한 교직생활을 40년 가까이 하였다.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물가 상승에 따른 본봉인상, 호봉 체계의 변동, 호봉 승급, 자격 변동에 따른 호봉 재 사정, 각종수당의 지급과 인상, 상여금지급 등등으로 봉급은 해마다 올랐고, 봉급이 오른 만큼 내 생활도 복잡해져서 할 일도 많아 봉급날을 더욱 기다렸다. 봉급날이 가까워지면 특별히 볼일도 없으면서, 행정실(서무실)에 들락거리며 봉급 담당 직원이 작성중인 봉급정산서를 슬금슬금 보고 봉급액과, 공제액의 내용과 액수, 그리고 봉급 수령액을 알아보았다. 또 봉급날에는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행정실 직원들의 동정을 살피고 언제쯤 봉급을 타 가라고 알려 줄까하는 마음으로 기다린 때도 있었다. 수업 끝 종이 울려 교무실에 와서 칠판에 “봉급수령” 이라고 씌어져 있거나 누군가가 “선생님들 봉급 수령하시랍니다.”라는 말이 떨어지면 곧 바로 행정실에 가서 봉급을 받아 봉급액을 확인하고 봉급으로 해결하여야 할 일들을 머리 속에 또 한 번 정리하여 본다. 옆에 있는 선생님이 봉투에서 돈을 꺼내어 하나, 둘, 셋 세는 것을 보고서야 오늘이 봉급날인가하고 책상 서랍 속에서 도장을 찾아 들고, 봉급을 수령하러 가는 선생님을 보면 저 선생님은 어떻게 살기에 봉급날을 잊고 살까하고 부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였다. 봉급날에는 서둘러서 학교 일을 정리하고 학급 종례만 끝나면 조금 일찍 퇴근하는 것을 묵인해 주어서, 봉급봉투를 챙겨 들고 서점을 비롯한 거래처의 외상값부터 갚고, 우리 아기들에게 줄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간다. 이날은 아내로부터 푸짐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또는 내가 아내에게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게한 날이 되기도 하였던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봉급날은 기다린 만큼 좋은 것만은 아닌 때도 있었는데, 가끔 우리 부부가 티격태격 하는 날이 되기도 하였다. 봉급수령액은 적고 쓸 곳은 많다 보니 생활 도구며, 귀여운 우리 아기들 옷 한 벌을 사도 전액을 현금으로 못 사고, 다음달 봉급에서 조금씩 갚아 가는 월부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아내의 짜증도  있을 만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저곳으로 전근될 때마다 월세 방, 전세방을 전전하다 내 집도 마련하였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도 조금씩 도와 드리며, 두 동생 교육도 힘껏 보살펴 주었고, 내 자식 6남매의 교육도 내 봉급으로만 해냈으니 봉급을 쪼개어 아껴 쓴 아내가 고맙다. 언제부터인가 봉급을 개인 예금통장으로 이체하여 지급하는 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도장과 예금통장을 맡겨버린 나는 봉급의 전부가 드러나게 되어 아내 몰래 비상금(?)을 만들 수도 없었고 내가 필요한 돈도 타서 쓰게 되니 나는 돈버는 기계로 전락한 것 같아 허전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봉급 수령액으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이 없어지고 봉급을 가지고 집에 갈 때까지, 행여 생길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한 불안감도 없어졌다. 또 그날 쓰고 남은 돈은 은행에 맡겨야 하는데 이런 번잡스러움도 없어져 아주 잘 된 제도라고 생각했다. 한 학교의 책임자가 되어서 선생님들의 봉급지급 결재서류가 돌아오면, 선생님 한 분 한 분의 봉급액과 봉급 수령액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 봉급날에는 봉급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선생님들의 봉급액의 사용 처도 대강은 짐작되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취미생활이나 가정생활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관심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봉급을 아껴 쓰고 저축을 많이 하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 초임교사의 봉급과 나의 첫 봉급과 비교도 하여보았다. 여러 가지 경제사항의 변동으로 직접적인 비교는 할 수 없었으나, 여러 가지 씀씀이를 통하여 비교하여 보니, 지금 선생님들의 보수가 아주 좋아져서 젊은 선생님들이 더더욱 부러웠다. 그리고 내 딸이 선생님이 된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다시 예금통장을 꺼내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단숨에 집으로 와서 경희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하였다. 딸아이의 말이. “방학 때 집에 가서 아버지의 생활을 보고 매월 돈을 보내기로 하였으며, 서로 편하게 행정실의 도움을 받아서, 아예 내 봉급에서 아버지의 예금통장으로 자동적으로 이체가 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딸아이의 봉급 일부가 매달 나에게도 지급되어서 없어진 봉급날이 또 생긴 것이다. 새로 생긴 봉급날은 현직에 있을 때처럼 신경을 쓰지도 않고 특별한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그저 은근히 기다려지며 나 혼자만이 기뻐하는 날이다. 오늘은 봉급날. 호주머니 속의 예금통장을 매만지며 밝은 얼굴로 농협으로 간다. “경희야! 고맙다. 잘 쓰마.”                                    (2001.  5.  20.)                   문예연구 제27회 신인문학작품 수상작(수필부문)                                 문예연구 겨울 제35호에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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