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7일 전쟁

2008.02.29 08:37

최정순 조회 수:65 추천:8

7일 전쟁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정순 달 걸이를 거둬간 지가 벌써 수삼 년이 지났는데 꼭, 달 걸이 치를 때처럼 허리가 빠지게 쑤셨다. 장난꾸러기 누군가가 몰래 넋 놓고 앉아있는 내 등에다 찬물을 바가지로 쫙 부은 것처럼 추웠다. 오싹오싹 한기가 들 때마다 내 몸은 마치 뜨거운 화롯불에 오징어 오그라들듯이, 머리털은 위로 치솟는 것 같았고 몸은 새우처럼 웅크러져 따뜻한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위아래 턱이 마주칠 정도로 떨렸다. 한숨 돌이킬 사이도 없이 자주 이렇더니만 나중엔 이마에서부터 겨드랑이, 등골, 허벅지, 종아리. 손바닥까지 땀이 촉촉이 나기 시작했다. 이내 옷 한 벌을 적시고 말았다. 잠같이 멍청한 것이 없다고 하더니만 그 뜸에도 비몽사몽간에 뒤숭숭한 꿈을 꾸다가 내 앓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때가 1963년 3월 5일 여고입학식을 1주일 남겨두고 이번처럼 아팠던 일이 갑자기 떠올라 마음을 더욱 조이게 했다. 그 시절엔 약이 어디 그렇게 흔했었나.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면 모지랑숟가락으로 무를 긁어 무즙을 먹여 가래를 삭게 했었고, 음식을 잘못 먹어서 체하면 소금을 한 주먹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속이 끌끌하시면 소다도 잡수셨다. 더위에 시달려 배탈이 났을 때는 쑥 즙을 내서 장독 위에 놓았다가 새벽이슬을 맞혀 마시기도 했다. 종기가 났을 때도 약방에서 고약을 사다 붙였었다. 단방약으로 쓰려고 지푸라기로 옭아매 대청 서까래에 매달아 놓았던 지네와 개 쓸개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3월 6일 수필 개강을 1주일 남겨두고 몸살을 앓고 있으니 행여 첫 수업시간에 우리 문우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생강차와 따뜻한 식혜로 목을 달래보지만 어림도 없다. 날이 밝으면 병원에 가봐야겠다.             드디어 내 몸은 전쟁을 선포했다. 약이란 아군과 몸살감기란 적군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서로 맞서고 있다.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왼손엔 방패를 들고 오른손으론 창을 휘두르며 내 몸 곳곳을 휘저으면서 그야말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리 쉽게 판가름이 날 기세 같지 않다. 아군도 적군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어떤 놈은 죽어 나자빠진 놈, 포기하고 도망치는 놈, 부상당해 이리저리 뒹구는 놈도 있다. 지금 내 몸은 전쟁터다. 구석구석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3일째 되는 날 전투는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야할 지휘관은 땡감을 씹은 것처럼 입안이 텁텁해서 명령을 내려야 할 소리는커녕 물맛조차도 잃었고, 천리를 꿰뚫어봐야 할 눈알은 고열과 통증으로 쏟아지는 것 같으니, 원정군의 도움을 청할 수밖엔 도리가 없다. 근육주사란 원정군의 위력은 대단했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폭탄만큼이나 위력이 있었다. 생 땀이 날 정도로 쑤셔대던 근육통을 완화시켜주었다. 이렇게 해서 적군의 기세를 눌러놓기는 했지만, 다시 적군은 게릴라전으로 낮에는 후퇴해 주는 듯하면서 밤을 틈타 내 몸을 강타해 왔다. 불면증과 더불어 가위 누르기를 비롯해서 호랑이에 쫒기는 꿈이며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의 무덤가에서 나 혼자 배회하다 무서워서 깨어보면 목이 바싹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가혹한 노략질과 만행을 내 몸 안에 저질러댔다. 이렇게 시달리기를 사흘째다. 전쟁이 시작된 지 7일째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협상을 하자는 신호가 내 몸에 전류처럼 흘러드는 것 같았다. 적군이라고 해서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악몽 같은 7일간의 전쟁은 결국 휴전협상으로 끝을 맺는 것 같다. 아직도 내 몸 구석구석에서는 타다 남은 연기가 가끔씩 피어나고 있는 기분이다.      아픔은 싫다. 육체적인 아픔이나 정신적인 아픔 모두 싫다.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본디 나는 단순한 존재여서 승부욕도 없는 편이다. 그저 여성으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갈망할 따름이다. 감기는 인류의 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감기처럼 비굴한 자는 없다. 강자 앞에서는 맥도 못쓰면서 약자 앞에선 갖은 포악을 다 부린다. 이런 비굴한 자와는 말도 섞기 싫지만, 십만 대군을 미리 양성해 두었더라면, 숭례문이 불타기 전에 미리미리 점검을 잘 했더라면, 제때에 예방주사를 맞았더라면, 건강에 좀더 유의했더라면, 따위의 뒤늦은 후회와 함께 미리 방위태세를 잘 갖춰가야겠다고 다짐해 보았다.                                           (2008.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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