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어느 선각자의 발자취

2008.03.04 06:27

윤석조 조회 수:89 추천:7

어느 선각자의 발자취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윤석조                                                          늦가을 아침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며, 남쪽으로 가보자고 야단이다. 어젯밤 책장에 혹시 김영랑 시집이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로 책장을 뒤졌으나 역시로 끝나버렸다. 김영랑 시가 많이 수록된 「명시의 감상」(도서출판 사계)과, 필기도구를 넣은 서류봉투와 메모수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이미 승차하고 계신 이기반 교수님과 정군수 교수님을 비롯하여, 우리 기린문학회원님들과 월천문학회원님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차안에서 인사를 나누고 하나가 된 문인들이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 속담을 잘 지키고 있었다. 호수의 물과 어우러진 운치(韻致) 있는 산의 아름다움을 보며, 맛있는 생김치와 찰밥으로 늦은 아침밥을 먹었다.   문학 강의실을 찾아다니기 6년 동안 문학기행을 많이 다녔다. 타계한 문인들의 문학관을 여러 군데서 찾아보았으나,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는 남쪽으로 달리고, 이 교수님이 김영랑 시인의 시세계와 작품 해설을 하시는 동안 광주에 도착하였다. 차가 가다서다하고 있는데 한 아파트 외벽에, 드문드문 시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광주시민의 높은 문학사랑정신을 짐작할 수 있었고, 내려가서 읽어보고 싶었다. 정군수 교수님이 김영랑의 시「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를 낭송(朗誦)하면서 강진에 이르렀다.   김영랑 생가의 주차장에 곧게 솟은 십여 그루의 종려나무는, 겨울도 무섭지 않은 듯 월동준비를 하지 않았다. 줄기 끝에서 길고 넓은 잎사귀를 쭉쭉 옆으로 펴고 있어 남녘다웠다. 크고 작은 현대식 건물들이 김영랑 생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생가로 들어가는 오른 쪽에 구부러진 돌담이 있고, 입구 잔디밭에는「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왼쪽엔 20여 종이 넘는 야생초를 종류 별로 가꾼 두렁만 덮여 있었다. 한 쪽에 서너 그루의 단풍나무가 붉은 잎을 흔들며, 오는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옛날 부잣집답게 너른 터에 아담한 초가의 행랑채와 그 뒤에 안채가 있었다. 안채에 우물(새암), 장독대(장광)와 감나무, 모란꽃 밭, 대나무 숲, 동백나무들이 있어, 영랑의 시어들이 이 집에 있음을 보았다. 북을 두드리며 시를 쓰고 읊었던 사랑채 앞에, 영랑이 열아홉 살에 심었다는 크고 보기 좋은 은행나무 가지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벌리고 있었다. 내가 스물한 살(1956년)때 심은 우리 집 은행나무도 35년이 지나면 저렇게 크고 곱게 자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영랑이 이 집에서 태어나서(1903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1948년)살았으며 시의 대부분(60여 편)이 이곳에서 씌어져 시의 산실(産室)이었다고 하였다.   ‘북에는 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영랑이 있다’는 표현으로 두 시인을 찬양하고 있다. 영랑의 시  는 섬세하면서도, 서정시로서의 독특한 개성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어디 그 뿐인가! 열일곱 살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휘문의숙)을 중단하고,「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하다 감옥살이를 하였다. 일본에 유학을 갔다 와서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한 훌륭한 독립 운동가였다.   나는 다산 유배지를 두 번째 찾는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조선후기 실학자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을 설계하였고, 짓는데 필요한 거중기를 만든 뛰어난 과학자였다. 경세가(經世家)로 활동하다 천주교를 믿은 죄로, 강진에서 18년 동안이나 기나긴 유배생활을 하였다. 귀양지에서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목민심서 등 많은 저술활동을 통하여, 정치 경제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훌륭한 선구자(先驅者)였다.   먼저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진 다산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18년의 강진 유배생활 중 10여 년 동안의 안식처였던 다산초당을 찾아 나섰다. 소나무와 대나무로 어우러진 오솔길 왼쪽 큰 소나무 밑에 선생이 즐겨 마셨던 작은 녹차 밭이 있고, 주변에 단풍나무 십여 그루가 붉게 타고 있는 듯하여 보기 좋았다. 마을을 지나 숲 속을 한참 오르다 돌계단을 지나면 어두운 숲 속에, 한자(漢字)의「다산초당」이란 현판이 붙은 기와집을 만났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 갈 때 이곳에 들러 써 주었다고 하였다. 주변의 서암, 동암, 천일각과, 다산의 손길을 느끼는 다산4경[다조, 약천, 정석, 연지석가산]을 둘러보았다. 역사의 숨결 속에 흘러간 정치판과, 강진만이 보이는 바위에 앉아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하여 보았다. 우리 선조들이 그 때만 정신 차렸어도 우리민족이 이 꼴은 아닐 텐데 하는 생각과, 현재의 정치와 사회상을 비교하여 보았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하고 활동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개인이나 단체, 정치가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서산마루에 걸친 해가 갈 길을 재촉하는데 불교미술로 유명한 월출산 기슭의 무위사를 찾았다. 이곳은 40여 년 전 군서고등공민학교 전교생 350여 명과 교사 7명이, 8Km나 되는 월출산 기슭을 걸어 봄 소풍을 왔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세월에 내 젊은 날이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산등성이 너머 조금 떨어진 기슭에 최근에 태평양화학회사에서 만든 너른 녹차 밭 사이 도로변에서, 녹차 향을 즐기며 찰밥과 술로 친교를 나누면서 땅거미가 지는 자연을 감상하였다.   시인 김영랑은「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시로 유명하고, 서정시인이라는 것밖에 몰랐었다. 정감어린 남도 사투리로 우리 가슴속에 파문을 일으키며, 겨레의 향수로 남게 한 시인이었고, 독립 운동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았고, 우리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당파싸움으로 우리민족의 암울했던 시기에도 실학을 정리 집대성하였고,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한 과학자였다. 공직자들이 바른길을 가도록 일깨우려고 쓴 ‘목민심서’도 읽어보고 싶었다.   다산 정약용과 시인 김영랑은 민족의 큰 별답게 우리에게 무언가 때달음을 갖도록 해주었다.                                                               92006.  11.  25.)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2
전체:
214,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