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잃어버린 편지를 찾아서

2008.03.05 13:37

최일걸 조회 수:80 추천:4

잃어버린 편지를 찾아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최일걸 누구나 잃어버린 편지를 품고 산다. 뇌리 깊숙이 넣은 탓에 꺼낼 수도, 읽을 수도, 고쳐 쓸 수도 없는 편지. 그대, 밤하늘에 별을 박듯이 또박또박 편지를 써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있다면 첫눈처럼 펼쳐져 있는 편지지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곳은 한사코 가야만 하는 약속의 땅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가 그대를 향해 열려 있기에 그대는 조용히 숨을 고른 다음 올곧게 펜을 들어야 한다. 편지지 위에 한 자 한 자, 별자리를 그리듯 글자를 늘어놓으며 순례자처럼 길을 열어야 한다. 그대가 지금 쓰고 있는 편지는 차마 사랑이 되지 못하고 휴지처럼 구겨져버릴지도 모른다. 끝내 마무리 짓지 못할지도 모른다. 밤을 하얗게 밝히며 쓴 편지는 아침이 오면 눈부신 햇살에 지워져버린다. 밤을 다해 쓴 편지를 낮에 읽노라면 왜 그렇게 부끄러워지는 것인지. 그대는 부끄러운 나머지 편지를 서랍 깊숙이 숨기거나 오랜 망설임 끝에 편지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닐 것이다. 그대는 또다시 자기 자신을 백지로 돌린 뒤 한 자루 펜으로 휘청휘청 일어서 편지지 위에 속내를 돋을새김 할 것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글자를 오가며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어쩌면 정보화 사회에서 편지는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휴대폰을 갖고 있어 언제 어디서나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상대와 통화가 가능하다. 인터넷으로 화상채팅도 할 수 있다. 상대방의 미니홈피에 안부 글을 남길 수도 있고, 편지를 대신하는 이메일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소통 가능한 많은 수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인간 상호 간 이해와 소통이 단절되고 소외 상황은 더 극심해졌다. 우리는 지나치게 편리만 도모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 때문인지 세상은 참 편해졌다. 죽음도 쉬워져서 터무니없이 간단하게 자살을 시도한다. 사랑도 편리해져서 얼토당토 않는 인스턴트 사랑이 남발된다. 현대인은 편한 것만 찾다보니 조금의 불편함도 견디지 못한다. 쉽게 포기하고, 쉽게 헤어지고 어려운 일은 피하려 한다. 인생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인생이란 고난의 연속이다. 인고의 시간 없는 결실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살아가려고 한다. 탄탄대로만을 고집한다. 삶의 자동화시스템이라도 구축하자는 말인가.   편지는 결코 편리한 소통수단이 아니다. 공백으로 펼쳐져 있는 편지지 앞에서 우리는 막막해진다. 도무지 무엇을 써야할지 곤혹스럽다. 그대는 백지 공포증에 압도당할 것이다. 편리한 소통수단이 많은데 굳이 편지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휴대폰으로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써야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쉽게 살아서도 안 되고, 가볍게 사랑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어려움 속에 진정한 삶의 가치가 있다. 함께 고난을 극복해야 사랑은 고양되고 굳건해진다.   편지쓰기는 자신을 백지로 돌리는 작업인 동시에 상대방을 백지 위로 발현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편지지에 온전히 자신이 깃들기 위해선 도대체 얼마나 많이 사색하고 고뇌해야 하는가.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편지쓰기를 시작할 수 없다. 사무치지 않고는 편지 한 장도 쓸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편지를 품고 산다. 세월에 묻혀버린 편지, 다시 쓸 수 없는 편지. 그렇게 깊은 망각 속에 파묻혀 있다가 잃어버린 편지는 어느 한 순간에 자락을 펼치며 솟구친다. 그대가 땡볕 속에 목말라 할 때, 그늘을 드리우는 게 있다. 그대가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 하나 찾지 못할 때, 꽃방석처럼 펼쳐지는 게 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편지다. 뒤돌아보라. 그대는 단숨에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편지 위에 하염없이 서성이는 자기 자신을……. 며칠을 고민한 끝에 누군가에게 살며시 편지를 내밀어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손에서 떠난 편지가 상대방의 손에 이르기까지 손의 떨림은 얼마나 길고 격렬한 것인지.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우체통 앞에서 서성거려 보았는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우체통 투입구에 편지봉투를 넣을 때의 아찔함이란, 사랑하는 이에게서 온 편지봉투를 뜯을 때의 두근거림이란, 그대는 울먹이며 편지지 위의 글자를 더듬어 본 적이 있는가. 글자의 미로 속을 헤매어 보았는가. 요즘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게 편지다. 이 글 또한 잃어버린 편지나 다를 바 없다. 지금 나는 그대에게 잃어버린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편리한 소통수단을 모두 걸어 잠그고 잃어버린 편지를 찾아서 길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지. 예쁜 편지지나 고급 종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백지 한 장이면 충분하다. 면벽수행을 하듯이 백지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보자. 바로 이 순간에 첫눈을 기다리듯이 그렇게 백지에 다가가 보자. 백지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과 흡사하다. 백지 위로 걸음을 내딛어 보자. 한 걸음 한 걸음……. 백지 위를 하염없이 걷다보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진실에 성큼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대는 사랑하는 이와 손을 맞잡고 백지 속을 거닐면서 하염없이 속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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