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곷상여

2008.03.12 06:50

이종택 조회 수:96 추천:6

할머니의 꽃상여

                              행촌수필문학회 이  종  택




할머니가 삼베 수의(壽衣)를 곱게 차려입고 저승길로 떠나가신 지는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승과의 하직을 고하듯 관(棺)에 대못을 박는 소리가 온 세상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때 나는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한쪽 구석에서 얼마나 울었던가.
할머니의 한 평생은 너무도 애처로운 삶이었다. 할머니는 스물넷 고운 나이에 남편을 잃고 가슴이 까맣게 타버린 채 독신인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셨다. 아버지도 할머니의 그런 심정을 헤아려 효성이 지극하셨다. 할머니가 운명하시자 아버지는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어머니어머니를 연거푸 부르면서 흔들어 깨우시다가, 얼굴을 맞대고 비비시기도 했지만 할머니가 미동도 하지 않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승의 끈을 끝내 놓아버린 할머니의 차디찬 시신이 점차 돌덩이처럼 굳어져 버리자 어쩔 도리 없이 홑이불을 덮은 할머니 시신을 윗목 병풍 뒤로 옮겼다. 그 모습을 보니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는 지붕으로 올라가 할머니의 하얀 저고리를 흔들며,
“정읍군 북면 화해리 유인 청주 한씨 복(複)이요!”
라고 외치며 하늘에다 대고 죽음을 고(告)했다. 동네사람들은 느닷없는 곡소리와 지붕 위의 흰옷을 보는 순간, 초상난 것을 직감하고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초상이 나면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온 동네가 사흘 동안은 일손을 놓고 상갓집을 찾아가 일손을 도왔다. 맨 먼저 해야할 일은 사잣밥을 지어 대문밖에 차려놓는 일이다. 사잣밥 상에는 밥 세 그릇, 술 석 잔, 명태 세 마리, 집신 세 켤레를 차려놓고 저승사자(使者)에게 망인(亡人)을 평안히 모시고 가라고 빌었다.

사랑방에서는 부고장(訃告狀)을 쓰느라 바빴고 안방에서는 수의를 지었다. 마당에는 차일(천막)을 치고 텃밭에서는 탕탕탕 관을 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백(魂帛)을 만들어 교의(交椅)에 모셔놓고 명정(銘旌)을 만들었다. 명정은 붉은색 비단을 관의 길이만큼 잘라 흰색 글씨로 유인청주한씨지구(孺人淸州韓氏之柩)라 써서 대나무 끝에 높이 메 달아 놓았다. 마당 가운데에 피워놓은 생솔나무 모닥불에서는 불꽃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각자가 일을 챙겨 척척 해 나갔다. 마당가 가마솥에서는 고기국물이 부글부글 끓어 초상마당은 할머니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잔칫집처럼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멀리 사는 친척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이어지는 곡소리는 한층 슬픔을 더했다.

이튿날에는 젊은 장정들이 상여를 짊어지고 왔다. 순서대로 맞춰 조립한 꽃상여는 화려했다. 그 화려함이 오히려 슬픔을 더 짙게 만드는 꽃상여. 고인의 인생이 화려하지 못했기에 죽어서 마지막 가는 길에라도 생전에 못 했던 화려한 차장을 하고 꽃 속에 묻혀 떠나보내려는 것일까. 붉은 꽃과 노랑꽃 등 오색찬란한 꽃들로 둘러싸인 꽃상여, 알록달록 색칠한 절간의 천장에서나 본 듯한 용(龍)들이 네 귀퉁이에 툭 튀어나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달려들까 무서웠다. 상여는 동네마다 추렴해서 공동상여를 만들어 상여집에 보관해 놓고 반 영구적으로 사용했다. 상여집은 뒷산 모퉁이에 나지막한 토담집으로 지어져 항상 무섭게 웅크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나 어둑해질 때면 귀신이 나올까봐 그 앞을 지나지 못하고 먼 길로 돌아오곤 했었다.

상여가 나가기 전날 밤에는 으레 빈 상여를 메고 만가(만가(輓歌)=상엿소리)를 부르면서 상여의 상태를 점검하고 상두꾼들의 발을 맞춰보는 예행연습을 했다.
“관음보-살--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네. 불쌍허네 불쌍허네 귀영실땍이 불쌍허네.(……)”
꽃상여가 서서히 옆으로 앞뒤로 흔들면서 상엿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자 마당 가운데서 모닥불을 쬐던 사람들과 허허로운 인생담을 나누던 문상객들은 토방으로 올라서고 윷을 놀던 사람들과 화투짝을 죄던 사람들도 잠시 패를 놓고 마당가로 비켜섰다. 어머니와 고모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둘씩 나와 상여 뒤로 가서,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독신 아들 못잊어서 어떻게 저승길로 가신다요? 아이고 성님, 아이고 이모님, 참말로 가신다요?9……)"
모두 다 서럽게들 울었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저승길로 나는 간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가겠네.(……)”
선소리꾼의 애잔한 사설은 떠나기 싫어서 서러워하는 망자(亡者)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한참을 지나 상인(喪人)들의 울음이 지칠 무렵이 되자 생 울음꾼인 옆 동네 김시상 씨가 나타나더니 청성을 떨며 가짜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울음코미디라고나 할까. 그 사설이 어찌나 서럽고도 우습던지 동네사람들은 물론이요 상인들의 웃음까지도 자아내고 말았다. 그것은 서러운 분위기를 웃음으로 바꾸고자하는 한 재주꾼의 원맨쇼였다.

“관음보-살--,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네. 봄은 가면 또 오는데 나는 가면 왜 못 오나.(……)”
출상할 때 상두꾼들은 상여 앞머리를 집을 향하여 올렸다 내렸다 세 번 반복하며 이제껏 살아왔던 정든 집과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뒤  대문 밖을 나섰다. 한 발짝씩 앞으로 내 디디며 부르는 애달픈 상엿소리에 상주들은 통곡을 하며 따라가고 동네 아낙네들은 담장 너머에서 눈물을 흘렸다. 꽃상여는 할머니가 평소에 잘 다니시던 마을 안길을 한 바퀴 돌아 젊은 시절 피땀으로 장만하여 발이 닳도록 다녔던 전답도 둘러보았다.

때는 여름의 한 복판인 오월 열엿샛날, 온 들판은 푸르름으로 가득 차고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꽃상여의 하얀 천포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걸 보니 할머니는 금세 또 다른 낙원으로 가는 것처럼 호화스럽기까지 했다. 평생 흙을 만지며 살아오셨던 할머니는 양지바른 선산에 작은 흙집을 지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셨다. 상인들은 꽃상여가 왔던 길을 되짚어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갔다. 묵정밭, 가시덤불의 길도 아닌 길과 논두렁을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샛노란 굴건제복이 푸른 들판 속에서 유난히 슬퍼보였다.      
                          (2008.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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