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마지막 월급봉투

2008.03.17 17:06

최기춘 조회 수:100 추천:10

마지막 월급봉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기춘 나는 1973년 지방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임실군 덕치면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 내가 공직생활의 마지막 달인 2007년 12월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었다. 마지막 월급명세서를 받고나니 감회가 새롭고 지나온 34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꼼꼼한 아내가 그간 차곡차곡 모아놓은 봉급봉투와 명세서를 들추어 보노라니 적은 봉급으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온 아내가 새삼 고맙게 느껴져 주름진 아내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내는 그런 줄도 모르고 손자 재현이의 재롱에 푹 빠져 있다. 사실 평소에 표현은 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적은 봉급이지만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온 아내가 항상 고맙고 마음 든든했다. 1973년 5급을류 공무원(현재 9급)의 봉급명세서 내용을 살펴보니 봉급 17,300원과 수당 7,000원을 포함해서 총 보수는 24.300원이었다. 그리고 공제내역은 소득세 651원과 기여금 1,000원, 보험 980원, 저금 800원, 신문대 480원, 직장마을금고 출자 1,000원 등 공제액이 4,260원이니 수령액은 20,040원이었다. 그 시절에는 보너스니 상여금이란 단어들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꿈도 꾸어보지 못했다. 여비는 물론 당직수당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34년 전에는 전체 국민들의 삶은 물론 나라형편도 퍽 어려운 시기였다. 따라서 공무원들의 보수도 작을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국영기업이나 일반회사에 비해서도 공직자들의 보수가 너무 작아 자존심이 상할 때 도 많았다. 최근 들어 나라경제가 성장하면서 공직자들의 보수가 다소 현실화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다른 직장에 비해 처우가 열악한데도 우리 국민들의 공직자들을 보는 시각이 곱지 않아 항상 가슴이 아프다. 특히 정권이 바뀌거나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단체장과 의원 당선자들의 행태는 겪어보지 않은 일반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언론에서는 공직자들을 마녀사냥식으로 대안도 없이 비판하고 당선인이나 인수위원회 측에서는 공직자들을 마치 사냥터에서 잡은 노획물쯤으로 여기는 게 다반사다. 이명박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오죽했으면 공직자들은 영혼이 없다고 스스로 자조했겠는가? 공직자들은 언제나 할 말도 못하고 산다. 아니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다. 아예 혀에 대 못질을 하고 살아야 속이 편하다. 나는 이제라도 우리 후배 공직자들을 위해서 작은 목소리로라도 말하고 싶다. 흔히 공직자를 공복이라 한다. 그럼 국민은 곧 공직자의 주인이 아닌가. 옛날에도 머슴한테 잘해야 주인집 살림살이가 늘어났다. 이제 나라경제가 우리나라 정도 성숙해졌으면 우리 국민들의 마음 씀씀이도 좀 넓은 아량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주인은 머슴이 일을 잘하도록 처우도 개선해 주고 사기도 진작시켜 머슴이 긍지와 보람을 갖고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매진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들이 성숙하고 세련된 주인으로서 공직자들을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나는 비록 보수가 작고 국민들이 알아주지 않아 힘들었다 해도 공직자로서의 삶을 결코 후회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일이 힘들고 보수가 작아 살림이 어려웠던 시절이 더욱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새마을 사업으로 꼬불꼬불하던 농로나 마을 진입로를 개설해서 지게 아니면 머리에 이어 나르고 걸어서 출장을 다니다가 리어카나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짐을 운반하고 자전거로 출장을 다녔다. 특히 내가 맡았던 마을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가던 날, 주민들과 함께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줄모도 안 심으려고 하던 어르신들을 설득하여 못줄을 잡아드리면서 줄모를 심게 하고, 새로운 벼 품종인 통일벼의 재배를 위해 비닐 못자리를 설치할 때 재래식 못자리를 고집하던 영감님들과의 의견대립 그리고 논과 밭두렁에 안 심으려는 논두렁콩을 심도록 장려하고 퇴비증산에 힘써 조금이라도 우리 주민들이 잘살았으면 하는 일념에서 동분서주했던 그 시절에 나는 긍지와 보람도 느꼈다. 그런 일들이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2007년 12월 나의 마지막 (서기관) 보수명세서를 펼쳐 본다. 본봉 3,178,400원 정근가산금 100,000원 가족수당 50,000원 관리업무수당 286,050원 가계지원비 530,790원 등 합계 4,175,240원이었다. 공재내역을 보니 건강보험료 147,230원 공제회비 200,000원 퇴직위로금 63,560원 상록회비 3,000원 소득세 267,760원 주민세26,770원으로 공제합계가 708,320원이니 실 수령액은 3,466,920원이었다. 34년 전에 비해 정말 많이 향상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와 현재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우리들의 생활이 많이 향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34년을 회고해보니 정말 긴 긴 세월이었는데도 너무도 짧게 느껴진다. 우리 또래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자수성가한 세대들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작은 봉급이지만 아끼고 절약해서 푼푼히 모아 살림을 한 가지 한 가지씩 장만하면서 살아온 세대들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2년 만에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니면서 자전거를 아끼느라 냇물을 건널 때면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건넜고, 출장지에서 돌아와서는 기름걸레로 깨끗이 닦아 이슬이 맞지 않도록 상전 모시듯 헛간에 보관했었다. 냉장고를 사서는 아내가 전기료를 아끼느라 겨울에는 가동을 중단하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되어서야 냉장고를 가동하던 일들이 기억난다. 이런 일들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 시절 거의 대부분이 다 그리했을 것이다. 처음 살림을 시작하면서부터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남의 집 셋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나 또한 남의 아래채 에서 방 한 칸에서 신접살림을 차려 셋방읕 전전하다가 열한 번의 이사 끝에 내 집을 장만했다. 내 집이라고 해야 지은 지 20년이 지난 30평도 못되는 아파트지만 그래도 옛날 살던 생각을 하면 정말 행복했었다. 나는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다. 박봉이지만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준 덕택에 두 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켜 사회에서 제몫을 다하고 있고 우리부부도 크게 궁색스럽지 않게 살아왔다. 또 앞으로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가난하다는 것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은 항상 가난을 면치 못할 거라 생각한다. 이제 많건 적건 34년간 받아온 봉급봉투는 다시 받을 일이 없을 것 이다. 지금까지 국민의 혈세에서 봉급을 받아 평생 잘 살아온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앞으로 남은 삶은 돈이나 명예가 되는 일보다는 순수하게 가족과 일가친척 그리고 이웃과 지역사회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며 살고 싶다. 이러한 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스스로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
어제:
3
전체:
21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