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천의 얼굴

2008.03.21 11:39

형효순 조회 수:89 추천:8

천의 얼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봄바람에 온 천지가 파란 싹을 내밀며 분주하다. 민들레는 벌써부터 담 밑에서 노랗게 웃고 있다. 봄은 늘 천진한 어린애 웃음소리처럼 가득 넘친다. 어린이는 언제나 봄이다. 봄은 희망차다. 오늘도 나는 천의 얼굴을 마주하려 아침부터 부산하다. 맑고 고운 눈동자와 천진한 얼굴들이 오늘도 나를 얼마만큼이나 기쁘게 하고 힘들게 할지 모르겠다. 벌써 6년째이니 익숙할 만도 한데 아침마다 새롭기만 하다. 우리는 흔히 영화배우나 연극배우들 또는 변화가 많은 사람을 가리켜 천의 얼굴이란 말을 쓰곤 한다. 한 사람이 천의 얼굴을 가진다면 혼란스럽다. 어느 모습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면 무섭기까지 할 것이다. 진실은 없고 가식만 가득하리라. 그러나 내가 만나는 이들은 귀엽고 천진한 악동들이다. 도통초등학교 학생들은 모두 1,400명이 넘는다. 날마다 아이들 급식준비를 위해 한 명의 영양사와 11명의 조리원들이 손발과 호흡까지 척척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최고의 재료와 최선의 위생 그리고 정성을 쏟아 맛있는 점심을 마련해놓고 천의 얼굴을 마주할 준비를 끝낸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병아리 1학년부터 선생님과 구분도 되지 않을 고학년 아이들까지 단 한 명도 똑같은 아이는 없다. 저마다 다른 얼굴에 다른 옷차림이며 다른 말씨를 쓰는 아이들이 왁자하니 우리 앞에 식판을 들이민다. 날마다 입는 옷차림이 같은 아이도 없고 같은 머리핀을 꽂는 아이조차도 없다. 신이 만든 작품 중 인간의 얼굴보다 더 신기한 것이 또 있을까!  둥근 얼굴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이건만 어쩌면 이리도 모두 다 다를 수 있는지 경이롭다. 다른 얼굴들만큼이나 아이들 성격도 다르다.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오면 급식실은 수많은 언어천국으로 변한다. 아이들이 쏟아놓은 자기들만의 대화로 귀가 멍멍해질 정도다. 그 중에 누가 울건 한두 명은 눈물로 얼룩진 시무룩한 얼굴로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각양각색의 얼굴 표정들과 사랑스럽고, 귀엽고 때로는 심통스런 귀여운 악동들까지 바람 잘날 없는 곳이 바로 급식실이다. 파란 채소는 절대 먹지 않겠다고 돌이질 치는 아이. 고기는 많이 줄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 콩은 싫어요, 파는 빼 주세요. 이것 말고 저 것만 주세요. 아이들 요구는 만만치 않다. 편식을 못하게 하려는 영양사 선생님과 아이들의 실랑이가 크게 사회 문제로 번지는 사례도 있었다한다. 담임선생님과 학생들의 눈치작전도 재미있다. 영악한 아이들은 파란 나물을 받아가지고 식탁 아래에 쏟아놓고 선생님께 빈 식판만 보인다. 오전 내내 열심히 마련한 음식이 잔반에 버려지면 열한 명의 조리원들은 속이 상한다. 때로는 너무 많은 음식이 버려져 배고프게 살다 가신 옛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죄를 받을 것 같다. 이 아이들이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배고파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좋으련만, 지금의 아이들은 음식의 소중함을 너무 모른다. 식 습관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중요한지 가정에서 엄마들의 책임이 크다. 우리나라가 급식을 하는 이유는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향을 골고루 주어 체력이 길러지고 이 체력이 곧 국력이 된다는 이유에서 시작된 것으로 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먹고 공부하며 싸우고 어깨를 겨루며 날마다 자라난다. 배식을 하면서 가끔 아이들을 바라본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가. 모두가 다른 성격을 타고 태어나서 희망적이다. 모두가 다르지만 딱 하나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 눈동자다. 하나 같이 순수함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저절로 마음이 환해진다. 사랑스럽다. 오늘도 아이들은 우리 앞에 서서 "고맙습니다!"란 인사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이다. 장차 미래의 꿈나무인 그 어린이들에게. 사회 곳곳에 기둥이 될 소중한 인적자원이다. 저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고향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존경 받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다. 식판을 엎지르고 울상인 저 아이가. 앞자리에 앉은 친구 머리를 잡아당기는 저 아이가. 서 있기가 지루해서 말썽을 피워 선생님께 꾸중을 듣는 저 아이들이 있기에 우리나라의 미래는 희망차고 행복한 것이다. 조리사들끼리 지어놓은 별명이 검정고무신으로 불리는 사내아이가 있다. 고기를 더 타기위해 씩씩한 걸음걸이로 배식대 앞에 와서 씨익 웃는 검정고무신에게 우리도 웃으며 그를 반긴다. 장차 훌륭한 씨름꾼이 될 성싶다. 창밖에 봄 햇살이 가득하다. 곧 있으면 꽃들이 활짝 필 것이다. 몇 십 년 뒤엔 저 아이들도 활짝 인생의 꽃을 피우리라. 정거장 이야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기차를 타려고 늦은 밤 전주역으로 가는 중이다. 미국에 계신 선생님이 전북음악회를 지휘하려고 우리나라에 오셔서 만나 뵙고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평정으로 만든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격정도,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일들도, 세월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흘러간다. 선생님이 미국으로 가셔서 결혼하셨다는 소식에 참나무정 냇가에 앉아 물달개비 꽃잎을 하염없이 물에 띄워 보냈던 여린 소녀가 있었다. 그런 소녀가 50이 훨씬 넘어서  마주 앉으니 선생님이 옆집 아저씨처럼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아직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의 아름다운 선율이 내 안에 남아 감미로운 것은 역 안이 너무 조용해서다. 어느 지인님이 오래 전에 어떤 여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정거장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보내고 맞이하면서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별에 마음 아파하는 그런 장소이기도 했고, 그것도 아니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젊은 날의 방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은 밤 30 리나 떨어진 참나무정 집에서 듣던 기적소리는 늘 내게 동경과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역이라면 북적대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야 제 맛일 텐데 차를 타려는 사람 서너 명과 졸음에 겨운 차표 파는 아가씨 한명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승용차가 적고 기차가 모든 생활의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지난 시절에는 정거장은 늘 질펀했었다. 역전 막걸리 집, 역전 짐꾼, 역전다방, 역전식당, 역전거지, 역전소매치기까지 역을 두고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과 기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었다. 어디 사람들뿐이랴. 짐 보따리가 사람보다 많았었다. 쌀자루, 고추보따리. 옷 보따리, 미역자반 보따리들은 개찰구 양쪽입구에 즐비하니 놓여져 있었다. 게다가 정거장 마당은 늘 비나 눈으로 질척거렸었다. 거지들이 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끌고 다니며 손을 내밀었고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거나 졸고 앉아 있었다. 떠나가는 자식을 보내며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 정든 사람을 보내며 섭섭해 하는 사람과 부모님을 보내고 망연히 서있던 자식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만나서 웃고 보내며 울던 시끌벅적하던 장소가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며 울며불며 헤어지는 애틋함도 볼 수 없다. 만남도 헤어짐도 고속열차만큼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지금은 텅 빈 대합실이 쓸쓸하기만 하고, 역 광장은 시멘트로 깨끗이 포장되어 있었다. 목이 말라 24시간 편의점에 들어가니 깔끔하게 포장된 과자류와 빵, 음료수가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썰렁하던 대합실에 서너 명이 들어오니 그나마 온기가 조금 돌았다. 그중에 할머니 한 분이 고요하던 대합실 공기를 바꿔 놓았다. 노랫말처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며 차비를 깎아 달라는 노래가 있었다. 지금은 65세 이상 노인은 절반으로 깎아 주는데도 시비다. 아가씨가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자 그 할머니가 내 얼굴이 신분증인데 무슨 신분증이 또 필요하냐며 언성을 높였다. 척 보면 알아야지 그래서 어찌 차표를 팔고 살겠느냐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나이를 많이 먹으면 속이 넓어지고 세상의 화(火)도 식힐 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아집만 더 늘어가니 탈이다.  봄이지만 할머니의 언성은 더욱 대합실을 춥게 만들었다. 지금은 기차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연착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연착된 기차를 20~30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것을 탓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사람들도 약속시간에 연착하기는 매일반이었다. 시간개념이 철저하지 못해 코리안 타임이라는 불명예가 따라붙던 시절이었지만 그 때가 그리운 것은 무섭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점점 느긋하게 기다릴 줄 모른다. 빈틈없이 더 빨리 달리기를 원한다. 정확하게 도착할 기차를 혼자 기다리기에는 참 지루하다. 무엇이든 정확해야 되고 확실해야 되는 사회에서 조금은 진득하게 기다릴 줄 아는 참을성이 없어진 탓이다. 그래서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있다. 제시간에 만나야 하고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며, 일분을 더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한다. 컴퓨터를 켜 놓고 몇 초를 참지 못해 다른 사이트를 찾는 사람들, 엘리베이터를 눌러 놓고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 여기저기 눌러놓는 사람들이 많다. 하긴 그런 성급함이 오늘의 우리나라를 이루게 된 힘이라고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우리는 그 변화 속에 익숙해지면서 살아간다. 할머니는 아직도 투덜거리는 중이다. 늙음을 지팡이 삼아 세상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움을 두고 떠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멀어져 가는 정거장을 바라보니 아직 때 묻지 않는 참나무정 열여덟 순진한 소녀가 50을 훌쩍 넘긴 여자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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