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아무도 함께 갈 수 없는 길

2008.03.25 07:13

정원정 조회 수:103 추천:8

아무도 함께 갈 수 없는 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30년 전 4월 서울에서의 일이다. 나무들이 푸르게 물이 오르던 아침, 내 병세는 퍽이나 우중충했었다. 여느 때처럼 한의사인 남편은 달포 정도 시름시름 앓던 내 맥을 짚어보더니, 흔연스럽게 전화통을 들고 다른 방으로 가는 게 아닌가. 겉으로야 들어내지 않았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식구들의 거동도 수상하여 모두가 마루를 통통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발자국 소리가 다른 때와는 달랐다. 내 정신도 자꾸만 암암해져 가는 것이었다. 눈치를 챈 나는 간신히, “나  괜찮아?” 그렇게라도 말을 해 주어야 식구들이 겁을 안 먹을 것 같았다. 사위는 희뿌옇고 안개도 는개도 아닌 습기가 나를 짓누르는데 도무지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화로의 잿불이 점점 사그라지듯 서서히 가슴놀이의 맥박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타들어 가던 불꽃 한 점이 가슴을 쳤다. 저 아이들 넷을 남겨 두고 가다니……. 대학, 고, 중,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저들을 누가 돌보아 준단 말인가. 눈물 같은 내 아이들을……. 그리고 내 나이 쉰 살까지 살면서 지은 산더미 같은 허물은 어디에 부려 놓으랴. 뒤도 앞도 없는 어느 높은 절애(絶崖)의 꼭대기에 서 있는 듯 두렵고, 휘휘하고, 철저하게 혼자인 나를 보게 되었다. 꿈인가 하고 가다듬어  보아도 분명 꿈은 아니었다. ‘아! 이 세상을 이렇게 하직하는구나. 아무 것도 정리된 게 없는데, 잘못 살아온 허물은 어찌하랴.’ 나머지 시간이 두려웠다. ‘벅적거리며 몸을 부비고 살았던 식구들도, 넓은 어깨에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던 남편도 이 길은 한 거름도 함께 해 주지 못하는구나. 마지막 가는 길은 절대 혼자인 것을…….’ 안간힘을 썼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 하는 건 허사였다. 퍼뜩 불꽃 튀기듯 떠오르는 한 마디! “그러기에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다!” 지금 이렇게 아무도 함께할 수 없는 혼자인 내 옆에 주님은 이미 함께 계셨던 것을, 내 무거운 짐을 지신 주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인 채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다. 막다른 길목에서 바라보게 된 십자가였다. 미처 몰랐던 십자가의 의미가 되살아나며 잘못 살아 온 일들이 휙휙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살아난다면 이전처럼 살지 않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솟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실낱같은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걸 아셨으리라. 주님은 나를 거들어 새 생명을 주셨던 것이다. 얼마 뒤 아침나절,  오빠 내외분이 와 계셨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날 내 명(命)은 해를 못 넘길 상태라는 전화를 받고 오신 거였다.   그리고 그해 여름, 약간 시원한 바람이 스치는 거실에서 낮에 살짝 곤한 잠을 잤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그만한 잠을 자지 못하고 땀까지 잡지 못해서 죽어가던 끝이었다. 그때 내 얼굴은 죽음이 덮친 초췌한 몰골이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성했던 지난겨울에야  연탄을 하루에 18개, 21개를 지피며 식구들의 뒷바라지도, 그 타버린 재를 지하실에서 지상의 쓰레기장으로 옮기던 노역도, 견딜만했는데 몸져눕고 보니 그동안 내가 감당했던 일들이 어마어마한 무게로 느껴졌었다. 병이 회복된 다음 난방을 기름보일러로 바꾸고 가사 도우미도 다시는 내보내지 않고 나는 차츰 밖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때 나갔던 교회는 마침 주재용(현직 한신대학 교수였고 뒤에 한신대 총장)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그 분의 설교를 통해 재기의 삶을 찾은 듯 나는 생기를 얻었다. 겨우내 땅 속에 칩거하던 개구리가 봄에 튀어 나오듯이 나도 얼굴을 드러내고 교회에 열심이다 보니 전체회장을 맡겨 주었다. 연이어 여신도회서울연합회 선교부장을 연임했다. 다음에는 전국연합회에서 교육위원장, 선교위원장을 연임하면서 10여 년 실행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위원장들은 총회에서 입안한 사업안을 가지고 지방 연합회와 연계해서 일을 추진해야 했다. 그 중에도 교육위원장직은 꽤 바빴다. 교육원이 따로 있어 유급 상근 실무자가 두 사람이나 있을 정도였으니까. 6만(지금은 12만)회원의 저력은 대단했다. 회장 밑에 유급 총무와 간사 두 사람이 날마다 사무실에서 집무할 만큼 일이 많았다. 기획, 사회, 인권, 선교, 교육, 평화와 통일, 장학, 재정, 회원활동 등 각 위원회의 사업은 회원들의 기도와 열성, 헌금이 밑받침되었었다.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60년대에는 독일 여신도회의 후원금도 받았었다. 어느 곳이나 장기 집권(?)은 허락되지 않을뿐더러 나이제한도 있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까마득히 잊었던 지난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요 며칠 전, 한때  한 교회의 교우였던 권사의 비보를 듣고서다. 언젠가는 가야할 길을 그는 앞서 떠난 것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그분은 젊어서 소설가로 등단도하고 그가 쓴 소설이 각색되어 드라마로 방송된 적도 있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부산 피난시절 한국신학대학에서 만났었다. 그는 이화여자대학 재학 중 신학대학으로 전학을 왔었다. 명망 있는 집(윤보선 전 대통령)안 출신답게 궁끼가 없는 아주 귀티 나는 여성이었다. 한참 세월이 지난 뒤 나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갔다가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뒤늦게 찾아간 교회였다. 여전히 부티 나고 편안해 보였다. 그 남편은 장로로서 터줏대감마냥 말발이 세고, 학벌도 좋으며, 재력도 탄탄해 보였다. 그녀도 사람이 삽삽하고 넉넉한 품성으로 신앙생활도 열심이고 헌금도 잘 냈다. 주택도 일급 지역에 있었다. 모든 면에서 부러울 게 없는 분들이었다. 뒤에 나도 교회를 옮겼고 그녀도 다른 교회로 가게 되어 소식이 끊겼는데 근간에 소식을 들으니 병석에 있다고 했다. 한 5년쯤 투병하더니 며칠 전에 세상을 떴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이 세상에서 유복하게 살았어도 갈 때는 외롭고 힘들게 혼자 간 것이다.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길이기에 그렇다. 아쉽고 허전한 마음이다. 뒤 늦게  멀리서나마 명복을 빌 뿐이다. 누구라도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옆에서 한 사람, 두 사람 가는 걸 보니 나 역시 갈 날이 가까워 오는 것 같다. 아무리 이 세상에 더 남아 있겠다고 응석을 부려도 소용없는 일이다. 홀로 가야하는 길, 그 순리를 누구라서 거역할까.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한 나였지만 그 일은 잊고 여전히 허물투성이로 살고 있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며 이 아침에 멍하니 앞마당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매화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있었다.                                              (2008.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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