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그해 여름에 나는

2008.05.17 14:07

홍기양 조회 수:90 추천:4

그해 여름에 나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홍기양 재작년 여름 어느날.  때 이르게 찾아온 더위와 씨름하고 있던 오후였다.출근한 남편의 전화 한 통을 받은 나는 그 뒤 두어 달 동안 커다란 마음의 짐을 안고 지내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한 번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전화였는데 어르신들을 만나서 옛날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옮겨 쓰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했다. 급하니까 빨리 결정을 내려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 말 그대로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 같지 않기에 해 보겠노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잠시 뒤 전화벨이 울렸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만날 시간을 알려 주는 전주문화재단 담당자의 전화였다. 두렵다고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자신있게 나설 수도 없는 미묘한 마음으로 약속에 응하고 말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어떤 일인지 자세히 듣지도 않고 남편 말만 듣고 하겠다고 했는데 괜한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하면 남편과 일을 소개해 준 은선생에게까지 실없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날 담당자를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앞이 캄캄할 정도로 더 막막해졌다. 전주문화재단 사업 중 '구술로 듣는 전주 역사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전주에 거주하셨던 토박이 어르신들이 몸소 겪으신 모든 이야기들을 직접 만나 뵙고 여쭈면서 녹취를 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녹취내용을 글로 다시 풀어 쓴 뒤에 시대별로, 내용별로 묶어 편집하여 문화재단으로 보내야 한 건의 일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일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데까지 진행되었고, 첫 번째 어르신을 만날 장소와 약속 시간을 정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내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냥 부딪쳐 보는거지. 뭐,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해 보는 거야. 그래야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당당할 수 있겠지.' 스스로를 달래며 초조한 마음으로 그날이 좀 더디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던 7월. 옛날 도청 옆 어느 다방에서 처음 만나뵌 어르신은 연세가 92세 되시는 분이셨다. 그 연세에도 깔끔한 정장에 걸맞은 은은한 향수 냄새로 고고함마저 느껴졌다. 전주문화재단의 이사장님이 사업 내용을 설명한 뒤 담당자와의 십 여 분에 걸친 면담에선 차분히 기억을 떠올리시며 담담하게 말씀을 잘 해주셨다. 어르신은 이사장님과 담당자가 나와의 면담을 부탁한 뒤 자리를 떠나자 갑자기 입을 꾹 다무시는 게 아닌가? "이제부턴 저와 면담을 하실거예요.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손녀딸처럼 생각하시고 기억 나시는 대로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기억이 안나!" 하시며 다시 말씀하시길 거부하시던 어르신은 급기야는 볼 일이 있으시다면서 자리를 일어서시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어르신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이 일을 할 수가 없을거란 생각에 탁자 위에 널려있던 녹음기와 필기도구를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었다.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내려 가시는 어르신의 다른 쪽 팔을 잡고 부축을 하며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제가 가시는데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됐어,  더운데  따라 오지마!" "어차피 저도 이 길로 가야 하거든요, 점심 때가 다 되었는데 추어탕 좋아하시면 대접하고 싶은데." "아침을 늦게 먹어서 생각 없어!" 외모처럼 어르신은 차갑게 말씀을 하시며  한 치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묵묵히 양산으로  내리쬐는 햇볓을 막아 드리며 외환은행으로 가시는 길로 동행했다. 은행 안으로 들어 가시며 하시는 말씀, "됐어. 이제 그만 가봐." 라고 하셨지만 약 30분을 밖에서 기다린 뒤 볼 일을 마치고 나오시는 어르신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여태 안 갔어? 참, 사람 끈질기네." "다음에 제가 어르신을 또 만나야 하는데 약속을 아직 안 했잖아요? 오늘은 바쁘시다고 하니 제가 이만 돌아가고 다시 전화를 드릴 테니 꼭 만나주셔야 해요!" 라는 일방적인 약속을 드리며 그날 그 어르신과의 만남은 끝났다. 시작부터 까다로운 어르신을 만난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마음은 뒤죽박죽으로 엉키면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란하였다. 집에 와서도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밥맛도 없고 그저 생각없이 하겠다고 나선 나의 경솔함에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만 싶었다. 다음 날 오전에 안부인사 겸 만날 약속을 할 요량으로 전화를 드렸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는 중이니까 끊어!" 하시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말 포기하고 싶었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날 또 전화를 드렸다. "허허, 사람 참, 그럼 오늘 효자동ㅇㅇ병원으로 11시쯤 와. 그때 쯤 물리치료 끝나니까."   드디어 어르신이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일찍 집에서 출발하여 병원에 도착했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으셨는지 어르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자 그 단아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어르신! 양쪽 입가에 살짝 들어올리시어 작은 미소를 보여 주셨다. "그래,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아서 이리도 날 만나려고 하는게야?" 하시는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첫 날의 만남에 어르신은 나의 끈기에 놀라셨다면서 면담에도 잘 응해주셨다. 음료수 값도 굳이 당신이 지불하시며  다음 만남까지도 미리 약속해  주시고는 자리를 떠나셨다. 이렇게 시작된 그 어르신과의 면담은 그 뒤로도 세 번을 더 가지게 되었다. 일 이외의 집안 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말씀해 주셨다. 나 역시 우리 가족 이야기도 해 드릴 수 있는 친한 사이가 되고 있었다. 어르신을 더 많이 알게 되니 구십 평생을 꼿꼿하게 살아 오신 덕망 높고 존경할 만한 분이셨다. 이 뒤로도 여러 어르신을 만나뵈었으나 이 어르신처럼 힘들게 하시는 분은 만나뵙지 못했다. 제일 처음 만난 분이 까다로웠으므로 어쩌면 그 다음부터는 어렵고 힘들어도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해 우여곡절 끝에  녹취한 이야기들을 모은 역사책이 완성되었다. 출판기념회 겸 동참해 주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조촐한 식사대접이 있었다. 어르신을 모시려고 전화를 드렸으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며 같이 참석하지 못하신 것을 매우 아쉬워하셨다. 나는 책과 함께 전주문화재단에서 마련한 작은 선물을 들고 어르신 댁을 방문하였다. 휠췌어에 앉아 계신 어르신은 작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홍양!  잘 지냈어. 별일없고?"   50이 다 된 나에게 어르신은 항상 홍양,홍양 하시며 손녀딸처럼  대하셨던 터였다.  어르신의 구십평생 지나온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있는 앨범을 모두 꺼내 보여주셨다. "내가 요즘 그거 보는 낙으로 살아." 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엔 편안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올들어 94세가 되신 어르신은 요즘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이시다.  안부차 찾아 갔던 병원에서 만난 어르신은 사람만 겨우 알아 볼 정도로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다. 손을 꼬옥 잡아드리고 빠른 쾌유를 빌며 병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더 없이 무거웠다.   그해 여름 7,8월.  비록 두 달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여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던 나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아울러 절제된 생활과 곧은 성품으로 8~90이 넘게 장수하신 어르신들을 만나뵈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더불어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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