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실수가 오히려

2008.06.22 17:39

김길남 조회 수:96 추천:6

실수가 오히려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김길남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 교사로 부임하였다. 한 학년이 두 학급씩인 농촌초등학교였다. 4학년을 맡아 교직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남자만 60명이 넘었고 나이차가 많은 학급이었다. 개중에는 중학생이 되었어야 할 아이들도 있었다. 교내 축구대회에서 6학년도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는 학급이었다. 첫날 수업을 하였다. 교실수업은 어려움 없이 무사히 마쳤다. 아이들이 활동적이고 놀기를 좋아하므로 체육을 하자고 하여 운동장으로 나갔다. 준비운동을 마치고 늑목을 이용한 수업을 했다. 늑목을 뒤로 잡고 거꾸로 서기를 했다. 시범을 보이고 차례로 나와 하도록 하니 모두 잘 따라 하였다. 채군의 차례가 되었다. 거꾸로 서다가 떨어져 머리를 다쳐 피가 조금 났다. 깜짝 놀라 일으켜 세우고 보니 손가락이 정상이 아니었다. 왼손 손가락이 2개밖에 없었다. 잘 잡을 수 없어 한 손으로 버티다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거꾸로 서라 했으니 떨어질 수밖에……. 얼마나 무안하고 당황했는지 모른다. 학생의 실태를 모르고 하는 수업이 위험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첫 수업이었다. 학생의 실태 파악은 그만큼 중요하였다. 아이들의 여러 가지 사정을 알아보려니 가정방문이 필요하였다. 경제적 형편, 문화적 실태, 가족관계, 부모의 교육의지, 아팠거나 다친 일 등을 알아보고자 해서다. 한 때는 가정방문이 부정부패의 원인이 된다고 금지하기도 했다. 일부 부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교육에 꼭 필요한 것이 가정방문이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내 아들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오셨으니 차라도 한 잔 대접하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집에서 나는 생산품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사람의 정이고 예의가 아닐까. 사는 모습이 부끄러워 일부러 피하는 집도 있고, 대접할 것이 없어 기피하는 가정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새 학급을 맡으면 가정방문을 꼭 하였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가정방문을 하였다. 교단에 서면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후회되는 일이 많다. 전학을 간다하여 부모의 말도 들어 보지 않고 서류를 떼어 주었다가 항의를 받은 일도 있고, 가정이 곤란하여 그림 그릴 준비를 못해온 어린이를 꾸짖은 일도 있었다. 제사에 찾아 온 손님 때문에 숙제를 안 한 아이에게 벌을 준 일도 있었다. 처음으로 6학년을 담임했을 때의 일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고자 경쟁하는 때라 판매하는 시험지를 사서 공부하였다. 별수없이 학생들로부터 시험지 값을 걷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에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벌이를 위해 먼 곳에 나가 있는 최라는 학생이 있었다. 할머니가 여동생과 최군을 돌보는 형편이었다. 살기 어려우니 시험지 값을 내지 못했다. 돈을 받아야 월말계산을 하니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에게 독촉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에 던지는 말이지만 그 학생은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몇 달치가 밀리니 결석을 했다. 알고 보니 시험지 값을 내지 못해 결석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결국 받지 않기로 하고 학교에 다녔지만 왜 미리 그 사정을 몰라주었을까 후회하였다. 소풍 때 술에 취해 아이들을 방치한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5km쯤 떨어진 삼례 한내로 소풍을 갔었다. 나는 6학년 담임이었고 5학년과 같이 4개 반이 갔었다. 젊은 담임들만 인솔하고 갔으니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 되었다. 갈 때는 줄을 맞추어 잘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물찾기도 하고 학급별로 노래도 부르고 여러 가지 교육적인 활동을 하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 때는 잘 사는 집 아이나 반장이 담임의 점심을 가져왔었다. 술도 보내와 여러 잔을 마셨다. 나중에 여러 아이들이 가져온 술을 내 놓아 이것저것 겁없이 마셨다. 마신 것이 지나쳤던지 4명이 모두 취해버렸다. 취하면 용감해진다고 그 뒤에 아이들은 자유로이 하라고 방치한 꼴이 되었다. 중견 교사가 한 명만 끼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들이 아무 사고 없이 귀가했으니 다행이지 큰일 날 뻔하였다. 누구나 하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모든 일이 다 성공한다면 세상 사는 맛이 없을 것이다. 실패의 괴로움을 맛보아야 그 뒤에 오는 성취의 달콤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힘들게 산을 올라야 정상의 짜릿한 맛을 볼 수 있고 내려오는 편안함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겪고 일어선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던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다짐했지만 이어지는 실패는 어찌할 수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44년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에게 벌을 많이 받은 제자들이 지금은 나에게 더 다정하다. 내가 잘 못했다고 생각한 일의 당사자가 더 웃으며 반긴다. 부끄러운 일들을 되뇌며 그때의 제자들을 만나 사연을 이야기 하고 후회하며 살고 있다. 뒤늦게야 깨달은 3걸은 '용서할 걸……. 베풀 걸……. 참을 걸…….'이다.                    ( 2008. 6.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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