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동생이 있어 행복하다

2008.06.26 16:28

김금례 조회 수:91 추천:6

동생이 있어 행복하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김금례   스물세 번째 맞이하는 친정어머니 기일[6월18일]에 참석하고자 집을 나서니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고 비바람이 몹시 불었다. 큰아들이 기차표[새마을 특실]와 용돈까지 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 흐뭇하면서도 내가 벌써 노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기차 내에 들어와 좌석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몸이 아프니 나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건만 기어코 먼저 집을 나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칠십이 넘었는데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따라와 주는 그가 고마웠다. 남편이 살며시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가난한 집에 소중한 딸을 주었으니 장모님께 보답하고 싶다. 형제[처남]가 서울에 살고 있으니 나의 기력이 다할 때까지 다니고 싶다.”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여자들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시댁의 시금치도 안 먹는다고 했을까! 그 고달팠던 삶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내가 걸어왔던 인생길처럼 기차도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며 달렸다.   비바람이 기차 유리창을 세차게 때려 물방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난 물방울을 먹물삼아 손가락 붓으로 차창에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지하에 계신 부모님도 저 검은 비구름을 타고 오시려나?’ 난 창밖의 파란 잎새들을 보면서 46년 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촌 오빠의 초청으로 어머니와 함께 밤차를 타고 서울에 갔던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잠을 자다 깨니 먼동이 트고 서울역 앞에서 오빠가족들이 환한 웃음을 띠며 우리 모녀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큰 오빠는 X레이를 제작하며 청운동에서 대학생인 두 동생과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새언니가 시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오빠가족들과 같이 갔던 남산과 창경원 나들이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창경원 백곰이 울안에서 끄덕끄덕 춤을 출 때 큰 오빠도 따라 하니 꼭 백곰 같았다. 그 모습에 구경 왔던 사람들도 폭소를 했다. 해가 서산에 걸치자 길가에서는 징글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차가 지나 갈 때면 위에서 불통이 튕겨 나올 것만 같았다. 서울 밤거리는 참 황홀했다. 지금 전철은 얼마나 편리한가! 우리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셋째오빠는 파트너도 없었는지 고려대학교축제에 함께 가자고 했다. 오빠를 구제하려고 나갔다가 사람들의 파도에 휩쓸려 중앙우체국 앞에서 오빠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당황했지만 시골처녀답지 않게 집에 들어서니 동생을 잃은 오빠는 축제를 뒤로한 채 넋을 잃었고, 어머니는 딸을 찾지 못할까봐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오빠, 시골 아가씨 똑똑하지?” 오빠들 앞에서 으스대던 모습이 기억의 창고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역시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은 세월을 돌보지 않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무심한 게 세월인가보다.  삶의 끝자락에서 세월은 변하지 않았는데 오빠와 남편은 이마에 할아버지라는 훈장을 달고 있다. 지난날들은 어느덧 퇴색된 빛이 되지 않았는가. 아름다운 추억이 날개를 펄치고 훨훨 날고 있을 때, “여기는 용산역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참 좋은 세상이다. 밤새도록 와야 했던 서울까지 겨우 3시간 만에 왔다. 막내아들이 본사에 출장을 왔다면서 용산역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끌어주고 밀어주는 아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나이가 들면 자식이 있어야한다. 동생네 집에 들어서니 동생 댁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해바라기처럼 웃으면서 반겼다. 참 감사했다. 동생 댁도 우리 집에 들어온 지 28년이 흘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동생 가족은 직장을 따라 남미 멕시코로 떠났었다. 동생을 떠나보내고 부모님 기일에는 전화로 마음을 달랬다. 초·중·고등학교를 파나마·칠레·브라질·아르헨티나에서 보낸 조카들은 한국의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학생들은 영어학원에 다니지만 동현·동훈이는 한국어학원에 다녀야했다. 동생가족들이 한국에 온 기쁨도 잠시,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식구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본국에 돌아온 학생들에게 나라의 정책이 필요함도 알았다. 하지만 한국에 온지 6년이나 흘렀다. 어머니 기일을 맞아 그 식구들이 서울생활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니 참 기뻤다. 동현·동훈이 형제도 카츄사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 지하에 계신 부모님도 기뻐하실 것 같았다. 어렸던 동생이 가장이 된 것을 보니 세월이 많이 지나갔음을 실감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내 동생이 서울에 산다. 든든한 동생이 내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제사를 지내고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꽃은 피웠다. 그래도 피곤한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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