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딸에게 온 편지

2008.09.16 05:22

하미옥 조회 수:86 추천:9

딸에게 온 편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하미옥                                                      갈색 서류봉투가 딸애의 책가방 속에 끼어 있었다. 나이 든 점잖은 사람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서류봉투라 눈에 쉽게 들어왔다. 무심코 꺼내 들었다. 봉투 안에는 예닐곱 장 정도의 복사물이 들어 있었다. 딸애 논술 반 친구가 자료를 모아서 건네준 모양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4쪽 끝에 ‘뒷면을 봐 주세요.’ 라 적혀 있었다. 또박또박 쓴 글자에서 힘이 느껴졌다. 뒷면을 봐달라고 했으니 나 역시 봐 주는 수밖에. 그래서 본의 아니게 딸에게로 온 연애편지를 읽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이면 이성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는 때이긴 하지. 그네들은 이성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고백편지라 말한다. 나는 고백편지를 받고도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딸에게 서운한 맘이 들었다. 4쪽 뒷면에는 같은 크기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검은 글자를 숨기며 엎드려있는 종이를 보는 순간,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간절함을 엿볼 수 있었다. 종이를 넘겨보았다. 복사물 전체를 돌리지 않아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지를 붙여 놓았다. 그 아이의 작은 배려는 딸에 대한 서운함마저 사라지게 했다.   내용으로 보아선 첫 편지는 아닌 듯했다. 그 아이는 서너 번 정도 편지를 보낸 모양이다. 짐작하건데 우리 아이는 그 아이의 마음을 거절한 것 같았다. 편지는 대부분 그 아이의 일상을 적고 있었고, 학교에서 딸애와 마주쳤을 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는 말이 연서라는 느낌을 줄 뿐 싱거운 편지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딸에게 서운해 하면서 잔뜩 기대했던 게 우습기까지 했다. 한데 마지막 부분이 내 시선을  머무르게 했다. ‘많은 바람 중에 너는 내게 봄바람 같은 존재야’ 라는 말이었다. 내 딸을 바람으로 표현하다니. 기분이 상했다. 바람이라 표현되는 저속함을 먼저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봄바람’ 이라는 단어에는 따사로움과 신비로움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 찬바람이 대지를 할퀴어 메마를 대로 메말라 푸른 대지의 영광이 끝난 듯해도 봄바람만 불어 봐라, 어떻던가? 연두색 그 연한 잎들이 온천지에 나부끼고 색색의 꽃들이 피어오르고 나비가 날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그 아이에게 감사하는 마음까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아이에게 우리 아이는 처음으로 이성을 느낀 존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듯했다. 나는 딸에게 ‘애고 예쁜 것, 애고 예쁜 것’ 이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지만 남들 눈, 특히 그 또래의 이성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비쳐질지 의문일 때가 간혹 있었다. 딸에게 온 편지는 나를 그 의문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누르는 솜씨는 가히 경탄할 만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두드리는 것 대신 가지런하게 정성을 다해 검은색 볼펜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여러 장 구겨져서 휴지통으로 날아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특했다. 요란한 소문을 피하고자 번번이 편지를 논술자료로 위장해 건네 준 그 아이의 깊은 배려가 고맙고 또 사랑스러웠다.   (20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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