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합죽선, 그 선자장을 찾아서

2008.10.03 08:51

이종택 조회 수:138 추천:13

합죽선 예찬, 그 선자장(扇子匠)을 찾아서                                                 행촌수필문학회 이 종 택 판소리의 명창 김연수(金演洙)선생을 처음 만난 지 한참 오래 되었다. 젊은 시절 초임지인 고창군청으로 발령 받은 지 2년째 되는 해던가. 그때 고창에서는 모양성제(牟陽城祭)를 화려하게 치르고자 명창 김연수 선생을 초청하게 되었고 나는 그분을 영접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김연수 선생은 선비 같은 인상으로 온화한 분이었다. 이튿날 행사장의 무대에 올라서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사철가를 부르기 시작했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산림 풍경 두른 곳, 만자천홍(萬紫千紅) 그린 병풍 앵가접무(鸚歌蝶舞) 좋은 풍류, 철 가는 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슬하고나.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쿠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고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勝花時)라.(중략) 그 사설이 어찌나 시적 표현이던지 여기에 전문을 소개 못한 것이 아쉽다. 고수와 창자(唱者)와 청중이 3위일체가 된 판소리 축제마당은 점차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의 소리는 과연 명창다웠다. 힘들여 꺾는 대목마다 합죽선(合竹扇)을 높이 치켜들어 촥 펴는 찰나, 그 추임새 모습은 창의 격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 올렸다. 하기야 이 사철가는 창작능력이 뛰어난 김연수 선생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했으니 오죽이나 잘 불렀겠는가.   여기에 부채문화의 으뜸인 명기 황진이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인 임제의 이야기다. 임제가 평안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개성에 들렀으나 황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들고 있던 부채에 시를 써 내려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텔레비전 드라마 '왕의 남자'에 나오는 외줄타기에서도 합죽선은 필수품이었다. 줄꾼 장생은 두 나무 기둥을 잇는 외줄 끝에 간신이 서서 “올라오기는 올라왔으나 저기까지 건너가기가 천리가 지척이요, 지척이 천리로다.” 라는 사설을 늘어놓는다. 장생이 그 위험한 줄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놀 수 있는 비결은 오로지 오른 손에서 폈다 접었다를 반복하는 합죽선과 호흡을 맞춘 주술이 아니었을까. 새가 꽁지로 균형을 잡아 흔들리는 전기 줄에서도 안정감 있게 쉴 수 있듯이 줄타기는 부채가 있어 온갖 재주를 부리면서 건너 편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부채춤은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이 아니던가. 외국의 국빈이나 관광객이 왔을 때 가장 자주 보여주는 춤이 부채춤이다. 창부타령의 연주가 흐드러질 듯 나긋나긋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고운 한복과 화관 차림의 무용수들은 깃털로 장식된 부채를 들고 무리지어 원을 그리기도 하고 물결처럼 군무를 추는 모습은 천사들의 춤이었다. 옛 어른들은 부채 하나만으로도 한껏 멋을 내는 지혜를 가졌었다. 할아버지가 모시두루마기에 합죽선을 들고 거기에다 하얀 중절모자를 쓰고 외출하는 모습은 멋스러워 보였다. 그 부채에는 산수화 한 폭이 그려져 있었는데 심심산골 운무(雲霧)속,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사공 하나만이 외로이 노를 젓고 있었다. 한쪽 여백에는 지여죽이상혼(紙與竹而相婚)하여 생기자일청풍(生基子日靑風)이라 씌어져 있었다. 대나무와 종이가 서로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으니 바로 바람이더라라는 뜻이니 부채를 가장 명확히 설명한 시구절이 아닌가. 이처럼 부채는 단순한 피서도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기품과 멋과 사랑과 서정이 담긴 훌륭한 공예품이었다. 부채는 방구부채와 합죽선으로 구분하데 방구부채는 그 모양새에 따라 태극무늬가 있으면 태극선, 파촛잎과 비슷하면 파초선, 오동나무잎과 비슷하면 오엽선, 그밖에 값싼 재료로 만들어 다양하게 쓰이는 팔덕선 등이 있다. 그리고 대나무를 가늘게 깎아 살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발라 만든 접부채는 산수화나 난초, 풍경화 등의 그림과 그 그림에 따라 의미를 담은 글씨로 장식했는데 그중 얇게 깍은 겉대를 맞붙여서 만든 부채를 합죽선이라 하여 으뜸으로 쳤다. 합죽선 만들기 60여 년째 외길인생을 살아 온 죽우(竹雨) 이기동 옹(李基東 翁. 78세)을 찾아갔다. 이 옹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합죽선 선자장(扇子匠)기능보유자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 어느 날,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영진공업사’에서 그를 만났다. 살림집 일부를 개조한 8평 남짓의 단칸방이‘합죽선 대가’의 공방이었다. 부채 20여점이 보관되어 있는 진열장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고, 바닥에는 나무도마와 대나무로 깎은 부챗살이 흩어져 있었다. 흰 러닝샤쓰 차림의 왜소한 70대 노인이 마지막 합죽선 기능 보유자다. 전남 담양이 고향인 이 옹은 열일곱 나이에 전주로 이사를 와서 부채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은 부채제작사회에서 기술이 가장 뛰어났던 배귀남 선생. 이 옹은 엄한 스승 밑에서 기술을 배우는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견디다 못해 다섯 번이나 뛰쳐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천직으로 돌아오고 만 이 옹! 그는 스승이 적어준 십훈을 꼬깃꼬깃 접어서 지금까지도 지갑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다. 색 바랜 종이에 적힌 정직무사(正直無邪), 일심무이(一心無二)를 읽고 또 읽은 것이 몇 번이던가! 그러나 합죽선을 만들어 내다 팔아도 그 돈은 8남매를 키워내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아내는 “부채 내다버리고 리어카라도 끌자.”고 매일 성화를 부렸다. 공방을 키우고 문하생을 데려와도 힘들고 가난한 일이라고 모두 발길을 돌렸다. 전수자라곤 아들과 사위를 포함해서 셋만 남았다는 것이다. 한창 때는 6,800개씩 만들던 것이 이제 기운도 떨어지고 눈도 침침해졌지만 무엇보다도 선풍기와 에어컨에 밀려서 요즘은 1,500개로 줄었단다. 60여 년 동안 부채만 만들어 온 노인의 왼 손 검지는 안쪽으로 휘어진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까지 닳아 없어진 숫돌만도 40여개, 닳아 못쓰게 된 쇠칼이 100여개나 된다고 했다. “지극정성으로 공들인 것 없이 작품이 좋기만을 바라면 그건 이치가 아니제. 나는 이 일을 하나의 놀이처럼 즐겁게 하는 거야. 그러니 한 달이 걸리든 두 달이 걸리든 내 마음에 흡족할 때가지 하는 거지.” 그러면서 이 옹은 “합죽선은 합죽선의 길을 걷는 거니께 나는 잠깐 그 길을 이어주다 돌아갈 뿐인겨.” 라며 자신의 외길 인생을 애써 낮추어 이야기했다. 그가 공력을 들여 만든 합죽선은 참으로 명품이었다. “1억 원을 줘도 안 팔제. 팔려고 만든 부채가 아니여. 내 품을 떠나면 그냥 사라지게 되는겨.” 실제 그가 만든 작품은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이 옹은 자신이 평생 공들여 만든 ‘나전칠선'‘황칠옥조각선’'조각무궁화선' '칠등조각선' '황칠매화선' 등 47점을 재작년에 전주시에 기증했다는데 줄잡아 5억 원어치는 넘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 기술에 감탄하자 "소싯적 먹고 살 요량으로 시작헌 것인디, 평생 죽치고 하다봉깨 손이 익은 것 뿐이제. 허허허허!” 시대가 바뀌면서 부채를 찾는 이가 없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장인정신 하나로 60여 년 동안 외길 인생을 지켜 온 선자장(扇子匠) 이기동 옹의 앞날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하며 부채공방을 나섰다.                          (2008. 6. 25.) 註 만자천홍(萬紫千紅): 울긋불긋한 여러 가지 꽃의 빛깔 앵가접무(鸚歌蝶舞):앵무새가 노래하고 나비가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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