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내 고향 사망암

2008.12.20 04:38

김병규 조회 수:83 추천:8

내 고향 사망암(士望岩)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김병규                                                                      들에서 참깨를 떨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마루에 놓인 소포를 살펴보다 소스라치게 놀라셨단다. 소포에는 ‘사망 김병규’라 씌어있기 때문이었다. 겨우 한글만 깨우친 어머니는 일주일 전에 군대에 간 막내아들의 사망소식으로 알았던 것이다. 땅이 꺼진 듯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셨다고 했다.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형님도 달려왔다는 것이다. 논산신병훈련소에 입소한 나는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입고 갔던 옷과 소지품을 정성껏 포장하여 집으로 보냈었다. 우체국에서 분리하는 과정에 부락명과 발송자 이름을 큰 글씨로 겉봉에 기록하면서 ‘사망 김병규’라 써서 배달하여 일어난 소동이었다. 벌써 52년 전의 일이다. 건강한 모습으로 첫 휴가를 나온 나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던 어머니의 체온이, 반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짜릿짜릿한 전류처럼 내 가슴에 전해온다. 내가 기른 자식이 군대에 갈 때 내 가슴에 일었던 찬바람이 어머니의 마음이었을 테고, 출가하던 딸을 보낼 때의 허전했던 마음이 부모의 정이었음을 느낀다. “너도 자식 낳아 길러봐야 부모의 마음을 알 것이다.” 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왔다. 고향나들이 때마다 차창으로 보이는 어머니의 무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내 가슴에 머무는 애틋한 나의 사모곡 때문이다. 내 고향마을 이름이 사망암(士望岩)이다. 선비를 바라는 바위마을이라는 뜻이다. 부안 변산해수욕장의 남쪽 끝으로 바다에 돌출하여 덩그렇게 솟아있는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20여 호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산줄기가 병풍처럼 울타리를 세우고, 앞에는 널따란 들과 함께 동녘 하늘이 열려있다. 들 건너 맞은  편에는 변산 준령이 기운차게 뻗어 황해바다를 굽어보다가 성숙한 여인의 가슴처럼 봉긋하게 쌍선봉(雙仙峰)으로 머물러 섰다. 아침이면 솟아오르는 태양과 함께 그 절묘한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로 눈 안에 들어온다. 뒷동산 고개에 오르면 황해의 넓고 푸른 바다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수평선 위로 지척의 거리에 기러기가 날개를 펴고 수면 위에 앉아있는 것 같은 모양의 비안도(飛雁島)가 고군산열도를 거느리고 질서 있게 도열해 있으니 해상의 방파제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뒷동산 끝자락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검푸른 바닷물의 거대한 몸놀림에 억만 년을 씻기고 닳아 기묘한 바위 톱을 만들고, 여세를 몰아 바다 속에 암초로 뻗어있다. 바다 깊숙이 깔려있는 암초에는 굴, 바다조개, 바지락. 꽃게, 청각, 해삼, 붕어지 등 어패류가 무진장 서식하고 있어, 썰물 때 바구니를 채울 수 있는 수산물의 보물창고다.   새만금 방조제가 설치되면서 암초에 불순물이 끼어 어패류가 사라지더니, 물막이 공사를 한 뒤로 다시 옛날처럼 바지락이 무진장 서식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 푸른 꿈을 활짝 펴던 고향마을 사망암, 지금은 마을 입구까지 널따란 관광도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국립공원 변산반도, 천혜의 관광자원을 차원 높게 운용하려는 뜻일 것이다. 내 고향을 개발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선비를 바라는 사망암정신이 사라질까 두렵다. 아무리 개발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티 없이 맑고 순박한 마음, 넉넉한 인심과 따뜻한 인정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 쌍선봉 머리에 새벽이 밝아오면, 찬란한 아침햇살이 선비를 바라는 마을에 아침인사를 건넨다. 그 정기를 받아 넓고 푸른 바다처럼 넓은 도량과 풍성한 지혜와 덕망을 갖춘 고결한 선비가 태어날 거라고 믿고 순박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게 사망암 사람들이다. 아무리 변화가 유혹해도 굴을 따고 조개를 캐며 해초를 건져 올리는 고향사람들의 따뜻한 인심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3형제에게 많은 칭찬과 찬사를 해 주었다. 큰형님은 어려운 환경에서 오랫동안 면장으로 봉직하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작은 형님은 교장선생님으로서 45년 동안 교직에 몸담아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나 역시 영세한 농민의 조합을 맡아 어려운 농민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도록 농협을 성장시키는 일을 했었다.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3형제가 모두 기관장을 했으니 앞으로는 더욱 큰 선비가 나올 거라는 꿈이 사망암 사람들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서로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으로 안아 주며 따뜻한 정을 주고  받을 때 행복이 샘물처럼 솟아오르리라. 타향살이가 외로워 고향을 찾는 나에게 너나없이 달려와 반겨주는 고향사람들! 새벽에 나가 따온 굴이며 조개를 함박웃음으로 싸주는 정겨운 사람들! 무엇이나 아낌없이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인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사망암. 나는 고향마을 사람들의 외형적인 선물보다, 마음의 선물이 더 값진 것임을 안다. 나도 선비를 바라는 고향사람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빈다. 나는 지금부터라도 내 고향을 위하고, 고향의 따뜻한 정에 보탬이 되도록 내가 할 일을 찾아봐야겠다. 나이를 탓하여 무엇 하리. 더 늙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분명히 있으려니 싶다.                         (2008. 12. 20.)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21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