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그녀와 한 시절

2009.01.15 04:36

정원정 조회 수:140 추천:8

그녀와 한 시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공포가 하늘밑 가득히 맴돌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고샅을 지나 찾아간 곳은 오종종한 신접살이 곁방이었다. 가년스럽게 소복한 여인은 다소곳이 아랫목에 앉아 우리를 맞았다. 갓 서른이 안 되어 보였다. 건밤을 새운 듯 푸석한 민낯에 핏기라고는 없었다. 그의 남편이 분주소에 불려간 때가 해질녘이었다고 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신발 끈을 매만지고서 한참 하늘을 쳐다보다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은 채 가뭇없이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때 봤던 그의 옆얼굴이 마지막이었다며 비길 데 없는 막막한 눈빛을 방바닥에 가라뜨고 목이 메어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다시 간신히 기신을 챙기며 말을 이었다. 남편이 집을 나가기 전날 밤 꿈에 칠을 하지 않은 장롱 두 짝이 방으로 들어왔다는 대목에서는 마른 얼굴에 해가 검기울듯 어둠이 스쳤다. 나는 그 불길한 꿈땜이 너무도 자닝스러워 가슴놀이가 올서리를 맞은 호박잎처럼 오그라드는 듯했다. 우리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그녀 눈에는 안개 같은 것이 뽀얗게 서려 있었다.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며 아득히 먼 데를 바라보는 눈빛이 슬퍼 보였다. 고샅길로 접어들며 뒤돌아보니 그녀는 문밖에서 더 이상은 갈 곳이 없는 사람마냥 거기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흰옷이 더 애잔해 보여 막막궁산에 그녀 혼자만 떼어놓고 돌아 서는 듯했다.   전란은 시골까지 스멀스멀 자리 잡아 한갓진 촌락이 하루아침에 인민공화국 치하로 뒤바뀌었다. 너와 내가 다르다며 흉흉하고 음습한 바람이 휩쓸어 인심이 살벌했다. 어제까지 어우르며 살았던 건넛집 이웃이 갑자기 어색하게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골스럽던 이웃의 소소한 정은 슬슬 어디론가 날아가는 사이 우익진영 사람들이 분주소로 불려갔다. 더러 죽어가는 궂긴 소식이 부리나케 퍼졌다. 그 와중에 그의 남편도 분주소로 불려간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 면소재지 중학교 교사였다. 단지 이북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가 죄목이 되었다니, 한국전쟁은 역사의 뒤꼍에 사는 보통사람까지 제물로 흔적 없이 앗아갔다. 그는 일찍이 평양 고향집을 나오며 마당에 서서 부모님께, “서울에 가서 꼭 성공하여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인사한 게 부모와의 긴 이별이었다고 했다. 거창한 이념도 사상도 모르고 음전하게 시골에서 살다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 비둘기처럼 가시버시로 살다 아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꽃 같은 부인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얼마 뒤 전세는 뒤바뀌어 기운차게 휘날리던 붉은 깃발을 내려야하는 판세가 되었다. 무슨 일을 걷몰듯 사람들을 분주소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길갓집 아들 복동이도 윗동네 김 서방도 총살되었다. 그 무렵 나도 분주소에 붙들려가 신산한 몽둥잇바람을 당한 뒤였다. 풀려나긴 했지만 그들의 감시가 무서워 더는 고향에 있을 수 없어 가까스로 빠져나와 멀리서 소식을 들었다. 그녀마저 분주소로 붙들려가 곧 시신으로 변했다고 했다. 혈육 하나 없는 타관에서 그렇게 갔다. 들음들음대로라면 총살이 아니어서 그녀가 형장에서 내지른 비명소리가 윗동네까지 들렀다 한다. 아무에게도 척진 것 없이 조용히 지내던 숫스럽던 여인을 왜 서둘러 잔혹하게 참륙했을까. 이북출신의 아내라는 것 때문이었을까. 정말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까마득한 저 편의 이야기다. 길 위 하찮은 돌덩이 하나도 지구 역사를 가늠하는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데……. 우리 부모세대만 해도 수챗구멍에 뜨거운 물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했다. 보잘것없는 미물 하나도 살생을 못하게 한 일이다. 큰 나무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은 것은 나무에도 신령한 정기가 스며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인간과 우주만물 모두를 존엄한 존재로 아우르며 주위 환경을 멋대로 주무르려 하지 않았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하늘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라고 읊었다. 비록 모래 한 알, 작은 들꽃 한 송이라도 온 우주를 담고 있다. 유정 무정의 모든 생명이 서로 의지해 하나의 큰 생명으로 존재하니 내가 귀한 만큼 남도 귀하지 않겠는가. 가난살이였지만 가탈 없이 이웃끼리 오가며 정을 나누던 고향을 문득 그려볼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차마 지워지지 않는 한 시절의 처절했던 기억들이 아스라이 굴뚝의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여든 살이 넘은 지금, 지난 일은 어령칙한 게 태반인데 그리움도 아니게 가끔 소복한 그녀의 영상이 아픔으로 암암히 가슴을 후빈다. 이 산하를 핏빛으로 물들였던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죽음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어제 오늘 눈이 사정없이 내렸다. 지구 저편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참상이 머리에 떠오른다. 풀풀 내리던 눈은 마치 죽은 자를 조의하듯 나뭇가지마다 슬프게 흰 꽃으로 단장하고 있다. 지금도 이 지구 위에서 전쟁은 끝이 나지 않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평화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존귀한 생명이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제발 가슴을 여미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서로 귀히 여기는 세상을 이룰 수 없는 걸까. 전쟁 없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2009.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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