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밀레'의 유명한 이삭줍기라는 그림을 어쩌다 보게되면
나는...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 큰 마당에는 벼 낟가리 서너개가 지붕보다 더 높게 자리잡고
덜 마른 볏단들이 황금 담처럼 논 두렁에 누워 햇볕에 몸을 말리고 있는데
빈 논에 먹이찾는 황새처럼 논바닥에 엎드려 이삭을 줍는
어떤 아이의 할머니를 그려본다.
한곁 걸음걸이를 해도 겨우 한주먹 될까 말까한 벼 이삭을
가뜩이나 꼬부라진 허리에 커다란 앞치마를 주머니로 만들어 질끈 두르고
논 바닥에 고개를 묻고 찬찬히 그리고 샅샅이 뒤지는 할머니가
아이는 도무지 마땅치가 않다.
끝이 삐죽한 나무꼬챙이 하나 들고 아이는 할머니 뒤를 바짝 쫓아다니며
물 마른 논바닥을 괜시리 이르집어 보기도하고
어쩌다 꼭 제 몸의 뚜껑같은 모양을 그대로 남긴채 흙속에 숨은 우렁이도
파 헤집어 꺼내 보지만 그다지 신명이 나질 않는다.
>할무니~ 그만 집에 들어가자아~!
징징 거리는 소리를 내도 할머니는 그저 허리를 쭈욱 펴고
하늘 한번 올려다 보고 여전히 또 엎드릴 뿐…대꾸가 없다.
>마당에 벼낟가리가 산처럼 있는데 그깐건 뭐하러 줏어!
새나 먹게 그냥 두지~!
두어번 투정을 부리고 나서야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배 고프냐? 새야 이거 말고도 먹을게 지천이지… 이 얼마나 귀하냐?
자 봐라 ! 쌀 한톨이 얼마나 귀헌지를 알아야 하는게야~!
할머니는 아이에게 손을 펴 보이며 그 안에 든 누런 벼이삭을
귀물 보듯이 대견해 하신다.
‘핑~ 지천에 벼이삭이구만…’
아이는 속엣 생각을 이내 잊어버리고 논두렁에 얼른 올라
아직도 미진한 듯 허리를 펴지않는 할머니를 재촉질 한다.
>얼른 집에 가자구~ 배 고픈거 몰라? 할무닌?
>그랴~ 그만 들어가자, 세 말지기는 낼 줘야겠다.
할머니는
그렇게 주워 온 벼 이삭을 벼 낟가리에 끼어 넣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닭장속에 들여뜨리기도 하면서 벼 한톨이라도 헛 버리지 않으려고
추수 끝난 당신의 논배미를 며칠을 두고 돌면서 발자국을 남기셨다.
아이는
앞치마를 단단히 다시 고쳐매고 허리를 한번 추스린 후
논 두렁에 올라 선 할머니의 뒤를 졸래졸래 따르며
한번도 천천히 느리게 걷는 할머니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의 걸음은 언제나 콩콩 소리가 날만큼 바지런 했다.
방안에 앉아서 밖에서 나는 발소리만 듣고도 할머니가 저쪽으로 가는지
이쪽으로 오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할무니! 좀 천천히 가자 응~!
얼른 들어가자고 징징거리며 졸라 대고는 이번에는 좀 천천히 가자고
아이는 투정을 부린다.
핑계낌에 종종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는 허리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 보고
아이도 할머니를 따라 눈길을 하늘에 둬 본다.
저 쪽 염전 끄트머리 하늘은
아직 해가 서녘 하늘에 있는데, 붉으레하니 저녁노을 그릴 준비를 하고 있다.
>어여 들어가자~!
그제서야 저녁 나절에 해야할 일들이 생각나신 모양이다.
할머니의 앞 뒤 발이 서로 다퉈 먼저 가겠노라 다툼질을 한다.
아이는 주먹 안에서 따듯해진 우렁이 몇 마리를 핑하니 도로
논 바닥에 던져버리고 집집마다 저녁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동네를 향해 부지런히 종종 걸음을 치는 할머니의 흉내를 내며
팔을 휘저어 본다.
종종 걸음치는 할머니와 덜렁대며 그 뒤를 쫓는 아이의 그림자가
길다랗게 물 마른 논 바닥에서 움찔거린다.
누구넨가 마른 검불들을 모아 불을 피우나 보다.
마른 짚 타는 냄새에 섞인 생 솔가지 타는 냄새가 향기롭다.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란 그 아이는
수채구멍으로 밥알을 흘려 버리게 되면 왠지 죄스러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되고 혹시라도 떨어진 쌀알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허리를 굽히는 습관을 가졌더랍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이미 그 때 그 할머니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는 그 아이는
사십 오년도 넘은 그 날들을 마치 엇 그제의 일인 양
전혀 흐리지 않은 기억을 떠 올려 그림을 그립니다.
추억속에 애잔하게 남아있는 그리움이란 색깔을
덧칠해 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