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에세이

새해에

by 홍인숙 posted Jan 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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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에    / 홍인숙(Grace)




새해 첫날



              홍인숙(Grace)



새해 첫날
새 달력을 건다

기다림으로 침묵했던 공간이
기지개 켜고 큰 눈을 뜬다

숫자를 안고 있는 여백의 방마다
의미있는 날을 담으며
올해엔 다정한 사람이고저
마음의 촛불을 하나씩 밝힌다

지난해 나를 지켜온
마지막 한장 묵은 달력이
풋풋한 새 달력보다 더 무거운 건
지나온 날들의 흔적이 너무 깊기 때문일까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버린 날들이
해 바뀌는 틈새로
헛헛한 바람이 되어 돌아온다

혼신을 다해 살아온 날이 아니라고
부끄러워 말자
괴로움으로 방황하던 날이라고
쉽게 버리려 말자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마지막 달력 한 장
마음섶에 고이 접어 간직하며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온
새해 첫날
새 달력을 건다.

* * *

새해가 밝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첫날이라는 것 외엔 어제와 오늘의 이어짐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만은
묵은해의 힘들었던 일들을 다 떠나보내고 새롭게 새해에 거는 희망은 늘 풋풋한 설레임을 안겨준다.

누구나 해가 바뀔 때마다 이루고 싶은 일들을 새해 소망으로 기원하기도 하고
고치지 못한 나쁜 습관을 걸고 새로운 결심을 세우기도 한다.
나역시 해마다 신년이면 한 두 가지 목표를 세워보지만
지난 연말에는 여러가지 분주한 일로 세워볼 계획도 미적거린 채
2003년의 마지막 날 밤에 교회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께서 지난 한 해 동안의 자신들을 돌아보라고 주신 설문지를 읽으며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유쾌한 사람이었나>라는 난에서 유난히 마음에 도전을 받았다.

나는 이 나이에도 한심할 정도로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보다는 혼자 보내는 시간을 편안해 하고 행복해 한다.
가까운 사람과는 우스개 소리도 곧잘해 재미있는 사람 축에 속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분위기가 불편하면 금세 석고상처럼 굳어져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다.

외향적인 남편은 이런 나를 답답해하고 발전성이 없다고 흉을 보지만
천성인 걸 어찌하랴는 생각에 지금껏 방심하고 살아왔는데
지난해 문학회에서 직책을 맡은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람관계에 소극적으로 살아왔나 돌아보게 되었다.
주위의 밝고 명랑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내가 갖지 못한 그 사람들의 친화력이 무척이나 부럽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상대방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반갑게 손 내밀고 다가가는 것이고
만나진 인연은 부끄럼 없이 다정히 감싸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선지 큰 소원을 빌거나 거창한 공약을 내세우게 되지 않는다.
그저 가족과 주위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지난해 많은 삶의 흔적들을 가슴 한켠에 접어두고 힘차게 다가온 갑신년의 새 달력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