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8.17 06:07
박 목월 선생님
홍인숙(Grace)
[강나루 건너서 밀 밭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선생님의 [나그네]라는 시다. 크신 키에 봄볕 같은 미소와, 경상도 억양이 담긴 친근
한 음성,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약 25년 전 선생님의 멋진 모습이다.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지만, 이 [나그네]와 함께 선생님의 모습은 해가 갈수록 더욱 가슴 깊이
자리 잡는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벼이삭이 끊임없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한 나는
무슨 나무들이 저리도 끝없이 펼쳐있느냐고 물었다.
서울 토박이로 자라, 쵸코렛과 팝송에 길들여진 전형적인 도시의 아이가 그 장엄한 자연의 신
비와 시골의 정서를 알리 없었다.
선생님의 시는 대부분 전원적인 시풍을 갖고 계셨고, 철없던 나는 그런 선생님의 글을 공감할
수 없어 늘 외로웠다. 그 당시 내게 있어 선생님의 시는, 밤새워 읽고 꿈속까지 가져갈 황홀한 것
도, 가슴에 잔잔히 부서지는 밤바다 같은 것도 아니었다.
가고 싶었던 대학에 낙방하고,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들어간 학교에서의 그 좌절과 분노
가 엉뚱하게도 담당 교수이시던 선생님께 분출되었던 것 같다.
자주 강의도 빠졌고, 어쩌다 수업에 들어가도 다른 시인의 감미로운 시집을 몰래 읽곤 하였다.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수록 선생님의 시 한편 한편이 가슴에 그리움으로 닿아 오고, 그와 비례하여
나의 죄스러움은 더욱 커져만 간다.
특히 이 [나그네]에서 반복되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에서는 선생님이 그 훌쩍하신
모습으로 벼이삭을 흩날리며 한 자락 바람이 되어 훠이 훠이 걸어 나오시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프다.
언제일까. 꼭 선생님 묘소에 들르리라. 선생님 닮은 하얀 들국화 한 다발을 놓아 드리고 참회
하리라.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