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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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둔 스케치북 < 한국일보 >

2004.08.23 03:56

홍인숙(Grace) 조회 수:402 추천:41


                            비워둔 스케치북  / 홍인숙(Grace)


긴 세월을, 아무도 모르게 가슴앓이 한 적이 있었다. 아주 조그만 것이 가슴 깊이 웅크리고 앉아, 잊어버릴 만 하면 한번씩 가슴을 쌉싸름하게 하기고 하고, 눈물을 질금거리게 하기도 했다.
  
미국에 갓 도착해 맞는 첫 크리스마스였다. 누구보다도 시어머님의 선물이 걱정되었다.
궁리 끝에 큰 스케치북과 미술 연필을 사 왔다. 그날부터 아주 조그만, 시어머님의 여권 사진을 보며 본격적인 초상화 그리기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날을 비밀스레 매달려 완성한 후, 액자에 넣어 드렸다.
크리스마스 날, 아무도 예상 못했던 선물로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 초상화가 얼마나 시어머님의 모습을 닮았는지 자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목마르게 그리고 싶어하던 그림을 초상화란 명목으로라도 표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오랜만에 위로가 되었다.
그때, 시어머님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미세한 표정까지 놓치지 않으려던 열정 속에서 싹튼, 그분에 대한 사랑도 잊을 수가 없다.
  
결혼하고 미국에 오니 잘못 탄 버스가 내달리듯, 마구잡이로 세월이 흘러갔다. 많은 날을 병치레를 하였고, 또 그보다 몇 배의 많은 날을 낯 설은 직장생활을 하며 사는 일에 부대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내 꿈과,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는 아주 작은 서러움들이 새롭게 꼼틀거렸다. 그리곤 그 긴 세월동안, 요지부동의 가슴앓이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자라는 아이들 틈에서 슬슬 사는 재미를 붙이며, 거짓말처럼 그때의 가슴앓이를 조금씩 잊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크리스마스에 내 가슴앓이를 알고 있었는지 작은아이로부터 24년 전, 그 옛날과 똑같은 스케치북과 미술 연필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반가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굳어진 감성을 어떻게 되찾아야할지 몰라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직도 그 스케치북은 내 삶의 뒷전에서 굳게 닫혀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스케치북에 첫 장에는 아이의 환한 얼굴이 그려질 것이라는 것을.


               (1999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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