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오늘:
15
어제:
18
전체:
458,282


그리움 < 한국일보 >

2004.08.23 04:12

홍인숙(Grace) 조회 수:445 추천:46


                              그리움  / 홍인숙(Grace)

  

자정이 훨씬 넘었다. 방안을 훤히 비추는 빛을 따라 커튼을 열어보니, 밤하늘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린 듯 반가운 얼굴로 떠있다.
뒤뜰로 나갔다. 아직 잠들지 않은 정원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일어나 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달빛이 아름다운 밤, 그 누구도 쉽게 잠들 수 없으리라.
  
달빛아래 푸르름이 짙은 나무들. 내일의 화려함을 위해 다소곳이 미소짓는 장미.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적막한 가운데, 가슴속에 구슬처럼 쌓여있던 그리움들이 하나 둘 맑은 소리로 굴러 나온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평화 속에 눈을 감으면 어느새 망막위로 번져오는 그리움. 나이가 들수록 잔주름만큼이나 그리움도 늘어가고, 불면의 밤은 쌓여 간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 세월은 결코 크지 않은 소리로, 그러나 쉼 없이 흘렀다. 잃고 싶지 않던 순간들이 하나 둘 흐르는 시냇물에 씻겨 내리듯 그렇게 가고, 이제 내게 남은 건 불쑥불쑥 나타나는 그리움뿐이다.

그리움은 설레임. 그리움은 눈물. 그리움은 기다림. 그리고 그리움은 잔잔한 물결 위에 반짝이는 은빛햇살 같은 것.
그렇게 그리움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남아있어 더욱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정이 남고, 미련도 남고, 살아있는 꿈도 남아있다는 것이리라.
가슴속 깊은 곳에 그 많은 그리움들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승의 욕망으로 달려들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그때, 그 그리움의 끈들을 얼마만큼이나 풀고 가려나.
  
달빛이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밤. 이렇게 평화로운 뜨락에서 임종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리라.
이제 새벽으로 향한 호흡이 시작되고, 몇 시간 후면 떠오를 태양을 위해 겸허히 비껴 설 달과 함께 마음속에 그리움들을 나누어본다.


                (1999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 나목(裸木) <한국일보> 그레이스 2007.02.09 508
47 저녁이 내리는 바다 <한국일보> 홍인숙(그레이스) 2007.03.07 525
46 무료한 날의 오후 <한국일보> 홍인숙(그레이스) 2007.05.11 497
45 불면 <미주문학 38호> 그레이스 2007.10.30 523
44 존재의 숨바꼭질 <미주문학 39호) 홍인숙(그레이스) 2007.10.30 506
43 무료한 날의 오후 (YTN-TV 뉴스 '동포의 창' 동영상 ) 그레이스 2007.11.19 776
42 나무에게 (YTN-TV 뉴스 '동포의 창' 동영상 ) 그레이스 2007.11.19 584
41 저녁이 내리는 바다 <미주문학 41호> 그레이스 2008.05.13 471
40 쓸쓸한 여름 , 나무에게 < 중앙일보> 홍인숙(그레이스) 2008.07.17 658
39 문을 열며, 겨울커튼, 나무에게 <시향만리> 홍인숙(그레이스) 2008.07.17 731
38 잠든 바다 외 1편 <문예운동 통권 79호> 그레이스 2008.08.29 481
37 아버지의 단장 외 1편 <문예운동 통권 85호> 그레이스 2008.08.29 535
36 쓸쓸한 여름 <문학과 창작> 그레이스 2008.08.29 603
35 날개 <문예운동 100호 특집> 그레이스 2009.05.12 519
34 인연 (2) 외 1편 <시세계 2008년 겨울호> 그레이스 2010.09.18 232
33 아버지의 단장 / 삶의 뒷모습 <시와 정신 31호> 그레이스 2010.09.18 727
32 자화상 < PEN 문학 2010년 3,4호> 그레이스 2010.09.18 262
31 풀잎 <문예운동 2010년 가을호 107호> 그레이스 2010.09.28 275
30 비오는 날 <재외동포 신문> 그레이스 2010.10.14 289
29 사랑한다면 <미주 중앙일보> 그레이스 2011.08.31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