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2007.11.12 09:01

연규호 조회 수:650 추천:83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는 세 번 불러 보았다.
1985년 9월 28일 세상을 떠난 나의 아버지는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에 있는  선산의 한 귀퉁이에 묻혀 계시다가 2006년 7월에 태평양을 넘어 미국 칼리포니아, 로스앤젤스 위티어에 있는 로즈.힐 공원묘지로 이장이 되었다. 아름다운 함 속에 들어 있는 얼마 안 되는 뼈 와 가루들이 아버지의 전부였다.
“아니, 한줌의 뼈와 가루가......”
그러나 그 한줌의 뼈 뒤에 보이는 것은 살아 생전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는 세 번 불러 보았다.
“그래! 아들아! 나다, 나. 아버지.....”
“아버지! 그간 홀로 계시느라 외로우셨군요! 이젠 아버지 내 곁에 계시는군요. 아버지..”
                             *
2006년 추석, 10월 6일 오후 나는 동생들과 아내, 그리고 아들, 며느리 손녀를 데리고 위티어에 있는 로즈 힐 공원묘지를 찾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였다. 혼자 와 보기도 하였으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 전 가족을 데리고 오기는 그리 쉽지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저희들이 여기에 왔습니다. 보고 싶어서.....“
그리고 다음날, 오후, 베델 한인교회에서 인도하는 “아버지 학교”에 나는 등록을 하여 학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무엇인가? 무엇을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였던가? ” 나는 나를 한번 점검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등록한 것이 아버지 학교였다. 10월 7일 토요일이다.
                            *
토요일 오후, 마침내 나는 아버지 학교에 참석하여 몇 가지 배운 것이 있었는데 특별히 가정과 아버지의 밀접함을 배우게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라는 표어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재현하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하는 아들도 있다.
아버지가 지은 죄는 삼대까지 내려가며 아버지의 의는 천대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가족을 결속시켜주며 아버지의 신앙, 철학, 가치관, 도덕 기준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게 되어 자녀들은 그대로 배우게 되었다.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행동과 희생을 자식들이 보고 스스로 배우게 할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의 재능과 은사를 파악하고 발견해 주는 기능을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길러 주며 스스로 개척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둥지에서 날아가는 자녀를 신뢰하고 놓아 주어야 한다.
아버지는 신앙적인 리더슆, 위기를 이겨내고 극복하는 리더슆, 그리고 자녀의 기억속에 남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리더슆을 보여 주어야 한다.
                                      *
그러고 보니 나는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나 분명히 사랑으로 자식을 보살펴 주었던 아버지를 갖었던 행운아였다.
                               *
내 아버지의 모습이 떠 오른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갑으로 18세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한 것은 일본 식민지 말기에 학도병과 정신대를 피하려고 서둘러서 결혼을 하였으며 일년 후 내가 태어 낫을 때 아버지는 아직도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한마디로 무능력자였다는 말이다.
“19살의 아버지와 어머니? 와! 고등학생? ”
사실이 그러했다. 직업도 없는 무능력자였다는 말이다.
결국 나는 40대인 할아버지의 집에서 7살 되기까지 살았다.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유교적인 관념이 강하여서인지 떳떳하게 작은 부인을 하나 거느리고 사랑채에서 살았기에 4살 더 많은 할머니는 외롭게 손자인 나를 의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국민학교에 입학 할 때 나의 부모는 나를 강제로 데리고 청주로 갔다. 문제가 또 있었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인 남 동생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머리를 다쳐 간질을 하기도 하며 병원에 다니는 환자였다.  결국 3년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부모님들로부터 관심을 받기가 힘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화가 난 모습이었으며 학교에 가기 전에 언제나 나는 어머니로부터 크고 작은 문제로 늘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뺨도 맞었기에 나는 어머니를 별로 좋아 하지 않았으며 늘 무서워서 피하는 편이었다. 물론 세월이 흘러 어머니와 나는 친근해 졌으며 결국 어머니는 나와 같이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는 하였지만....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혼자 서울로 올라가서 수의사의 일을 하였다. 그리고 일년후 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와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물론 우리는 셋방 살이를 하였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우리는 셋방 살이를 하였다. 대학에 들어 가기 얼마전에서야 작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 하였을 때(18세) 나의 아버지는 겨우 37세로 돈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나는 장학금도 받었으며 아버지는 등록금은 꼬박꼬박 내 주셨을 정도로 착실하였으며 동네 교회에서 모범 집사로 그리고 장로로 헌신하였다.
의과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인턴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시작하였다.
“나는 미국, 안갑니다. 여기 한국에서 착실하게 수련을 받고 세브란스나 아니면 충청북도 도립병원에서 내과 과장이나 하렵니다.” 이것이 나의 포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다르게 만드셨다.
공군 군의관에 입대한 후 나는 미국으로 전문의사 수련을 받기 위해 1973년 6월, 어렵게 뉴욕으로 왔다.
뉴욕으로 오던 날, 나는 마치 넓은 태평양으로 혜엄쳐 나온 작은 연어와 같았다.
자유스러운 듯 하나 쇠고랑에 발이 잡힌 듯하며, 부유한듯하나 너무나 각박한 미국이었다.
전문의사 수련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듯하였다.
6년이면 내과와 특수내과 전문의사 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는데 나는 빙빙 돌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내 뜻과는 반대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아버지를 찾아보지 못하였다. 아니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도 젊다! 그리고 아직도 혼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결코 아들의 성공을 기다려 줄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련의사 과정을 마치던 그해 나는 간염에 걸렸다.
간염---감염--- 나는 절망이었다.
그리고 회복이 되어 개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려고 하였다.
그런데...나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하였다.
“아버지가....간 암이래, 오빠!”
“뭐시! 아버지가? 간 암----간 암----”
“아버지! 아버지! ” 나는 불러보고 또 한국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 3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59세였다. 100파운드도 안되는 아주 바짝 마른 노란 피부색을 하고서....
                         *
이것이 내 아버지와 나의 만남과 이별이었다.
나와 갖은 40년의 삶 중에 미국 생활 12년, 유아시절 할아버지와 살았던 5년, 군대 3년, 인턴 1년을 빼면 고작 19년간 나는 아버지와 같이 산 셈이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나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나와 같이 살았다고 나는 느끼며 살고 있다.    
아버지 학교에서 나는 돌아 가신 나의 아버지를 마음껒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기에 나는 행복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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