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소록도로 가는 길

2012.01.17 13:31

연규호 조회 수:717 추천:33

단편소설 소록도로 가는 길 단편소설 : 2007년 9월 5일 시작. 제목: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저자: 연규호 (Kyuho,Yun M.D) a member of PEN USA & KOREA, 문인협회 회원. 1. 전라남도 고흥 반도 끝에 있는, '눈망울이 큰, 작은 사슴처럼 생긴 섬‘, 소록도- “아! 문둥병(나병, 천형병, 한센씨 병) 환자들이 사는 곳?” "그렇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버림받고 외롭고 슬프게 외딴 섬에 갇혀 한을 품고 평생을 그곳에서 살다가 죽어 그곳에 묻힌다는 섬, 소록도,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 지난 10년 동안, 정확하게 말하면 1996년 7월 이후, 나는 피 눈물을 흘리며 42여회나 소록도를 찾아 갔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경기도 안성을 떠나 충청남도 천안에서 호남선 기차를 타고 전라남도 광주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순천에 도착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완행버스를 타고 고흥군 녹동 항구로 가, 작은 여객선을 타고 소록도에 도착하는 이 먼 길이 바로 소록도로 가는 길입니다.” 소록도로 가는 길은 멀고도 외로웠기에 길가에 뿌린 나의 눈물만도 태평양을 가득히 채울 것만 같았다. 문둥병에 걸린 시인 한하운의 애절한 시 “전라도 길”을 오십 번쯤 외우다 보면 나는 어느새 멀리 전라남도 고흥반도의 끝에 있는 녹동 항구에 도착하곤 하였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 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가는 길....//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그리고 10년 후(2006년), 7월 15일, 아침 7시.... -미국에서 돌아 온 다음 날부터 일주일이나 계속해서 내리던 여름 장마 비가 마침내 멈추고 나니 무더위가 엄습하였지만 눈물과 한이 맺힌 소록도로 찾아 가는 데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43번째 찾아 가는 소록도 길이었다. -소록도로 갈 때마다 나는 울며 갔었는데, 오늘은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낳고 자란 안성에서 급행 버스를 타고 평택을 지나 천안에 도착하였다. 42 차례나 이용하였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전라남도 광주에 도착 하니 12시가 조금 안된 대낮이었다. 오랜만에 얼큼한 순대 국에 고춧가루를 더 뿌려 넣고 훌쩍 먹은 후 순천, 벌교, 고흥을 지나 도양읍 녹동항구로 가는 직행 버스에 앉아 잠시 눈을 붙친듯 한데 어느새 소록도가 빤히 보이는 녹동 항구에 도착 하였다. 바다 바람이 시원한 오후 2시45분이었다. 녹동-소록도를 연결하는 ‘거금 연륙교’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도달하여 아름답고 웅장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었으며, 소록도와 거금도를 연결하는 ‘거금 연도교’도 그 윤곽을 들어내 보이고 있어, 세월이 빠르게 흘러감을 실감 할 수가 있었다.- * 소록도! 내가 처음 소록도를 찾아 간 것은 무려 37년 전인 1969년 초여름,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던 때였었다. 안성군청 축산계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 하던 때, 소록도에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다. 계장님이 내게 출장을 명령하였을 때 솔직히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손과 발이 뭉클어지고 눈이 찌글어진 문둥병 환자들이 생각났으며, “문둥병 환자들은 사람을 잡아 그 간을 날것으로 꺼내 먹으면 완치된다고 하여 힘없는 어린 아이들을 유괴하여 죽였다고 하더라.”라는 말이 나를 더 더욱 두렵게 하였다. 천형의 문둥병 환자들이 세상을 등지고 격리되어 한 세상을 눈물로 보낸다는, 소록도에 무려 14시간이나 걸려 첫발을 디뎠을 때 예상외로 아름다운 섬과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니? 소록도는 지상의 낙원이구먼...”이라고 감탄하였었다. 녹동 항에서 불과 600미터 떨어진 이 섬에는 향나무, 황금 편백, 노송, 삼나무, 히말리야시다, 동백, 팔손이나무, 치자나무, 피라칸타, 금목나무등 백여 종이 넘는 관상수가 빽빽이 들어 서있었으며, 말고 깨끗한 청정 해역에는 도미, 도다리, 농어, 새우, 문어, 피조개 등이 대량으로 서식하며 남쪽 해안에는 150여 미터의 해수욕장이 있어 나는 순간적으로 그 흉측한 문둥병을 잊고 있었다. 섬 입구에 서있는 순라탑(殉癩塔 6.25 전쟁중에 죽은 문둥병 환자들을 기념하여 세운 탑), 애환의 추모비(해방의 소용돌이 중에 죽은 문둥병 환자를 추모함),그리고 소록도 개원 40주년 기념비를 보면서 “아- 내가 정말로 그 말로만 듣던 소록도에 와 있구나.”라고 번뜩 놀라고 말았었다. 국립 소록도 병원을 지나 뒤편 언덕에 조성된 중앙공원으로 오르면서 백의 천사가 창으로 나병균을 무찌르는 모습을 한 구라탑(救癩塔)을 보았던 기억이 새로웠었다. 소록도 국립병원에는 약 6천명의 문둥병 환자들과 2백 여 명의 어린 아이들이 희망도 없이 세상을 원망하며 살고 있었으며, 이 작은 섬 속에서 말도 못할 슬픈 사연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비록 아름다운 섬이라고는 하나 나는 어서 속히 이곳을 빠져 나오고 싶었기에 부여된 일이 끝나자마자 뒤도 안돌아 보고 “날 살려라” 소리를 치며 소록도를 떠났던 기억이 있었다. 소록도를 빠져 나오면서 나는 “휴”하고 한숨을 쉬었었다. 솔직히 나는 문둥병 환자들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전염이 된다면? 아니 나를 잡아먹겠다고 덤빈다면 어쩌나...” 그 후 나는 소록도를 말끔히 내 기억에서 잊고 있었다. * 그렇던 이 소록도를 지난 10년 동안 찾아가야 하는 피치 못할 운명의 사나이가 되었다. 소록도로 오고 가는 나의 길은 한하운이 흘린 눈물보도 더 처참하였으며 살을 깍아내는 문둥병 환자의 그 길이 되었다. 2 “아참! 나의 이름은 강석호라고 합니다. 해방둥이로 태어났으니 금년(2006년)에 61세가 넘었군요. 안성군에서 태어나 안성 농고를 졸업한 후 남들 다 가는 대학에는 못가고 안성 군청의 축산계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한 것이 어느듯 40여 년 전이었습니다. 한하운 시인이 찾아 갔던 전라도 소록도 길은 가도 가도 황톳길이었기에 몇 주 며칠이나 걸렸다고 하였는데, 출장 갔을 때를 생각해 보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약 14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중간에 점심도 사 먹는 시간도 잠시 있었는데 약 7시간이 소요되었으며 폭신한 고속버스와 기차 덕분에 간간히 잠도 잘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강석호씨? 운명이라니요? 무슨 운명? 당신이 문둥병에 거렸단 말이요?” "예, 운명입니다. 천형의 운명...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문둥병 보다 더 심한 병을 얻었답니다.“ “죄를 지은 대가로? 문둥병에 걸렸다고요?” “예. 죄를 지은 대가로...” * -잠시 나의 가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의 아버지는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안성군청에서 축산계 공무원이 되었으나 1942년 일본군에 의해 남양군도로 차출되어 부역을 하던 중 사고로 인해 다리가 절단 된 채로 귀국하여 안성군청에 특별 채용되어 다시 근무를 하였는데 1950년 6.25전쟁 중에 친일파라는 지목을 받고 공산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고학을 하여 1963년 안성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2년간 최전방과 월남을 거쳐 제대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안성군청의 축산계에 취직을 하였다. 어머니의 원에 의해 23세가 되면서 안성 시골 처녀와 결혼을 하여 가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였으며 훌륭한 아들 셋을 두었기에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비록 대학 공부는 못하였지만 나의 두 아들들 만큼은 서울로 보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상과 대학을 졸업시켰으니 안성에서는 누구나 다 나를 부러워하였다. 큰 아들은 1969년에 둘째 아들은 1972년에 태어났으며 셋째 아들은 조금 늦은 1978년에 태어났다. 호사다마라고 하였듯이 셋째 아들을 낳은 나의 아내는 시름시름 앓더니 다음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 살도 안 된 막내는 나의 어머니(할머니)가 길렀기에 나는 막내아들을 특별히 사랑하였음은 젖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것이 애처러워서였다. 서울공과대학을 졸업한 큰 아들은 군대를 마치면서 큰 회사(L)에 취직을 하였으며 행인지 불행인지 사장에게 잘 보여서 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뉴욕 지사로 파견되었다. 큰 손자의 결혼과 미국 이주를 본 나의 어머니는 아주 만족하였는지 3개월 후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묘소에 합장을 하였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서울 상대를 다니면서 미국으로 갈 준비를 착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은 달랐다. “아버지? 두 형님이 모두 공부를 잘하여 미국으로 가고 나면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농사 일을 하겠습니다.” “농사를 하겠다고? 나와 같이?” “예. 아버지와 같이...그리고 할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되겠습니다.” 나는 안성군청에서 퇴직을 한 후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야채와 과일을 재배하며 농사도 하고 있었다. “막내야(강 홍조)? 너도 형들처럼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거라. 의사공부를 하거라...”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되렵니다. 아버지 곁에서.... 우리 가문의 전통이 농업이니까요.” 기특하였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농사꾼이 되겠다니... “아버지? 저는 아버지 곁에 있으렵니다. 그러니 언제고 아버지, 힘드시고 외로우시면 저를 찾아 주세요. 힘드시고 외로우시면....” “힘들고 외로우면 너를 찾으라고?” 나는 되물었다. “예. 아버지, 힘들고 외로우시면 언제라도 저를 찾으세요.” 3. 둘째 아들은 큰 아들처럼 역시 똑똑하였다. 상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역시 S 기업에 취직이 되었다. 회사 기획실에서 특별한 일을 하게 되었기에 안성 집으로 찾아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갑자기 집안이 텅 빈 기분이었으며 자연스레 나는 고등하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셋째 아들에게 더 애착이 가고 있었다. 아내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보니 밥하고 빨래하는 일은 내가 하든지 아니면 셋째 아들이 하였다. 그래도 셋째 아들은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한참 공부를 하여야 할 아들이 가사 일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더 더욱 애처러웠다. 고등학교 이학년이면 대학 입시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마련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되었다. 웬일일까? 아들의 손등과 눈 가장자리의 피부가 물러지며 움퍽 파지고 있었으며 발가락도 뭉퉁해 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썹이 빠지고 있었다. 보다 못해 동네 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그냥 피부병이라고 하며 연고를 주었다. 피부가 점점 더 흐믈흐믈 해지고 있었으며 감각이 무뎌 지고 있었다. 안성 보건소를 찾아 갔다. 보건소 의사가 유심히 보더니 한번 서울로 가서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으라고 권하였다. 며칠 후 나는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혹시? 한센씨 병이라고 아시나요?” “예? 한센씨 병?” “예. 문둥병, 나병이라고도 하지요. 나병....” “예? 나병?”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으나 의사는 병리 검사 결과를 알려 주면서 보건법에 의해 보건국에 보고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병이라니? 결코 아니라고 부인하고 또 부인하면서 아들을 데리고 안성으로 내려왔다. 나는 한숨을 쉬며 울고 또 울었다. “아니? 문둥병이라니? 문둥병...그렇다면 소록도에서 보았던 그 문둥병 환자?” 나는 “아니라고 소리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꿈속에서 나는 사람을 잡아 간을 빼 내어 먹는 문둥병 환자를 보았다. 가만히 보니 아! 나의 셋째 아들, 강홍조였다. “홍조야! 아냐!” 나는 소스라치며 눈을 떳다. 다행히도 꿈이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걱정 마세요.” 오히려 아들이 나를 위로 하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문둥병에 걸렸단 말이냐? 어떻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무엇을..왜 우리에게 형벌을 준단 말이냐!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의 아들에게 문둥병이라는 형벌을 준단 말인가?” 의사들은 “문둥병은 단지 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입니다.”라고 설명을 하여 주었으나, 나는 “하늘이 내려준 형벌이요, 전생에 지은 죄의 대가”라고 생각을 하였다. 겨울방학동안에 몇 군데 병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았더니 역시 나병(문둥병)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안성 보건소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개학을 하였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같은 반 친구들도 쉬쉬 하였으며 가까이 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가 아들의 귀에도 들려왔다. 담임 선생이 정식으로 나의 집으로 찾아와 아들을 멀리 소록도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하였을 때 나의 가슴은 미여지고 피눈물이 쏫아지고 있었다. 서울에 가 있는 작은 아들이 찾아와 말하였다. “아버지, 나병은 못 고칩니다. 어짜피 소록도로 보내든지 여수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내세요.” 둘째 아들도 덧붗여 말하였다. “아버지, 저, 미국에 갑니다. 칼리포니아 있는 S 기업의 지사에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약 5년은 있어야 합니다. 생활비는 꼬박 고박 보내 드리겠으니 일하지 마시고 집에서 쉬세요.” “......................” 나는 대답을 못하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뭉게구름이 나를 비웃고 있는 듯이 모가 난 원과 각을 만들며 흘러가고 있었다. “집에서 쉬라니.... 내 나이 고작 51세인데...” 1996년 봄... 셋째 아들의 피부는 점점 더 뭉클어지고 있었으며 눈가의 눈썹도 모두 없어 지고 말았으며 얼굴도 일글어 지고 있었다. 마침내 보건소에서 직원이 찾아 왔다. “4월 말까지 소록도로 가도록 하시오. 국가에서 먹여주고 치료해 줍니다. 아시겠죠.” 나는 밤새 울었다. 그런데 정작 아들은 담담하게 말하였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소록도에 가서 살겠습니다.” “안 된다. 안 돼! 어머니도 없이 자란 불쌍한 너를, 안 된다. 안 돼. 못 보내! 너는 지은 죄가 없어. 아버지가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내가...” “아버지, 아무도 지은 죄가 없어요. 단지 전염병에 걸린 것 일 뿐...치료를 하면 된답니다.”아들은 담담하게 말을 하였다. 밤새 나는 눈이 이글어 지고 얼굴에 더덕더덕 살덩이가 떨어져 흉악스러운 소록도에서 본 문둥병 환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밥을 타 먹고 있던 모습이 떠 올랐다. “아-셋째야! 나는 너를 그곳에 못 보내. 차라리 내가 가마!” 4 내가 사는 안성 땅에도 봄이 찾아오니 개나리도 피고 뒷산에 철쭉꽃이 피었다. 둘째 아들은 예정대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스로 가버렸다. 허전하였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아들과 같이 전라남도 고흥반도 끝에 있는 소록도로 가는 길을 찾아 가게 되었다. 처음 출장으로 간 소록도에서 문둥병 환자가 무서워서 뒤도 안돌아 보고 되 돌아 보며 ‘다시는 못 올 곳’이라고 하였던 그 소록도..... 가도 가도 황톳길이라고 울면서 찾아 갔던 한하운의 전라도 길을 나는 수도 없이 찾아 가야하는 운명의 기차를 타게 되었다. 1996년, 4월 15일.... -큰 가방 두 개를 들은 아들과 나는 안성에서 급행 버스를 타고 천안으로 갔다. 그리고 천안에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광주로 가게 되었다. 차창으로 보이는 논과 밭, 그리고 건물들이 나의 눈을 두드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 뿌엿게 보이는 것이 마치 지옥으로 찾아 가는 듯 하였다. 모자를 눌러 쓴 나의 아들을 기차에 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다 보곤 하였다. 아들은 울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이판국에 책을 본들 눈에 들어 올까?’ 나는 셋째 아들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보였다. 광주역에서 내려 점심을 사먹고 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순천에서 다시 고흥을 거쳐 녹동 항구로 가는 버스를 탓다. 녹동항구에는 꽤 나 많은 여관들과 생선 횟집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하루라도 아들과 같이 더 있고 싶었다. 아니 아들을 소록도에 보내고 싶지가 않아 일단 여관에 머물렀다. “소록도 국립병원에 입원하러 오셨군요?” 여관집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걸었으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곳 한국의 최남단 바닷가에서 인간의 정을 느끼면서 아들을 끌어 안고 잠을 청하였으나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내일, 소록도에 입원하게 되면 이젠 아들을 만져 보지도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아들을 쓸어 보았다. 울퉁불퉁 돋아난 아들의 피부에서 나는 따슷한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아-홍조야- 아들아- 비록 네가 문둥병 환자라고는 하나 나의 아들이다. 전생에 지은 죄를 사죄하마. 네가 내 대신 천벌을 받고 있구나.” 나는 잠든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내 나이 51세요 아들의 나이는 18세였다. 5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들은 곁에 없었다.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보니 아들은 불과 600미터 밖에 아련히 보이는 ‘슬픈 눈망울이 있는 작은 사슴 섬, 소록도’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작은 파도들이 녹동 항구를 향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여객선을 타고 소록도로 들어갔다. 불과 10분도 안 되는 항해 길이었으나 한번 들어 가면 평생을 보내야 하는 긴 인생의 항로였다. 소록도 입구에 도착하니 국립 소록도 병원이라고 쓴 현판이 눈에 띄였으며 몇몇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 이곳으로 들어 가면 나와 아들은 영영 못 만나는 구나....” 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작 문둥병 아들은 나의 손을 잡고 나를 위로 하고 있었다. “아버지..울지 마세요. 한 10년이면...10년이면.. 저도 완치 될 거예요.” “뭐라고? 10년이면 완치 된다고?”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아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이것 저것 쓰고 묻고, 왔다갔다 하다보니 아들은 정식으로 국립 소록도 병원 환자가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나를 아들이 살 병원 숙소로 안내하여 주었다. 놀랍게도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에 수세식 변소와 샤워 시설도 있으며 환자들 식당은 아주 깨끗하였다. 그리고 침대도 산뜻하였으며 같이 기거 할 문둥병 환자는 아들보다 5-6세가 더 많은 나이의 청년이었기에 안심이 되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이제부터 한 식구입니다. 걱정마시고 가십시오 아버님...” 청년은 나를 보고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앞으로 면회는 한 달에 한번만 허락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면 규정상 1.5미터 밖에서 서로 얘기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치료하면 음성 나환자가 되어 사회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병원 직원은 모든 수속이 끝난 후 내게 친절하게 병원 규칙을 말해 주었다. “아버지? 자주 오지 마세요. 치료하면 낫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너무나 외롭고 힘드시면 저를 찾아 주세요. 제가 밖으로 못나가니까요.” 마침내 아들은 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독한 놈, 지금까지 한번도 울지도 않던 놈이 그래도 눈물은 있구나...” 나는 아들놈의 손을 잡았다. 울퉁불퉁한 손등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그의 맥박을 느끼고 있었다. 소록도 중앙에 있는 중앙공원과 그 옆에 우아하게 서 있는 교회당에서 울려오는 둔탁한 종소리를 들으며 나의 아들을 그곳에 두고 녹동으로 가는 여객선을 탓을 때 나의 눈 가장자리는 퉁퉁 부어 있어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차라리 내 간을 먹고 문둥병에서 회복 되거라...” 나는 소록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으나 바다 소리에 묻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고흥, 순천, 광주, 천안을 거쳐 안성으로 돌아 온 후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6. “아버지, 외로울 때면 나를 찾아 오세요.” 나는 안성을 떠나 천안, 광주 그리고 순천, 고흥, 녹동을 거쳐 소록도로 눈물을 흘리며 가곤 하였다. “한번, 두 번 세 번...그리고, 그리고.......” 그러나 소록도를 찾아 갈 때마다 나는 더더욱 울고 말았다. “양성 나환자와는 직접 대화를 못합니다. 1.5미터 밖에서 말하시고 손을 잡지도 못합니다.” 그뿐인가, 나의 아들은 더 더욱 악화되고 있었기에 눈썹도 떨어지고 발가락과 손가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찾아갈 적마다 나의 마음은 더 더욱 찢기고 있었다. *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었다. 뉴욕으로 간 큰 아들은 승진을 하였음은 물론 롱 아이랜드에 큰 저택을 구입하였는데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하며 부자 장인 덕분에 많은 돈도 은행에 예치하였다고 한다. 그뿐인가 아버지에게 용돈으로 쓰라고 이만 딸라를 회사 직원을 통해 보내왔다. 또 좋은 소식이 있었다. 로스앤젤스로 간 둘째 아들은 현지 부지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스페인계통의 백인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지속에 역시 이만 딸라를 보내왔다. “아버지 더 보내 드리겠으니 일 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사세요.”라는 편지가 곁들여 있었다. 소록도로 가는 길은 계속되었다. 안성-천안-광주-순천-고흥-녹동-그리고 소록도....... 소록도에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동백꽃이 피었다. 붉은 동백, 흰 동백....... 7. 나 혼자 사는 안성집은 외로움과 서글픔, 그리고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를 미국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수속을 마치는 대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미국으로?”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 하였다. “아, 강석호씨, 아들 잘 두어서 돈도 받아 편안하게 살더니 이젠 미국으로 가서 잘 사시겠구려. 부럽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정말로 부러워 하였다. 두 아들을 만난다는 기쁨에서 인지 소록도로 가는 빈도도 점점 줄어 들고 있었으며 소록도로 가는 길에 뿌리는 나의 눈물도 접점 줄어 들고 있었다. 2003년 봄이 되었다. 아들이 소록도로 간지도 어느듯 7년이 되었다. 지난달에 면회를 갔을 때 보았던 막내 아들은 어느새 25세가 되었으며 문둥병은 많이 진전 되어 손가락이 한 개 발가락이 두 개가 절단 되었으며 눈 가장자리가 찌글어져 볼쌍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성격도 우울하고 가끔 거친 말을 꺼내었기에 나는 흠칮 놀라기도 하였다. 집에 돌아 와 보니 큰 아들이 보낸 미국 초청장과 비행기표가 와 있었다. “아버지 금년중에 미국(뉴욕)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이곳에서 같이 살면서 손자의 재롱도 즐기십시오. 큰 아들...” “와! 드디어 미국에 가는구나. 아들을 보러..아니 손자를 보러....” 나는 감격하여 그날 밤을 꼬빡 새웠는지 모른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내 몸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변을 보려고 일어 났으나 일어 날 수가 없었다. 왼쪽 손과 발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말도 더듬 거렸다. 엉거주춤 힘을 내어 전화통으로 기어가 친구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강석호야, 석호....” 그리고 나는 전화통을 방바닥에 떨어 뜨리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 났을 때, 나는 안성 도립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으며 친구와 그 아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호야! 중풍을 맞았다는 구나. 겨우 목숨을 건졌어. 너의 아들들에게 알려 주마.” 그러나 미국에 있는 아들들이 속히 올수가 없었다. 기껒해야 안성에 사는 친척들이 찾아 와 마음에 없는 간호 수발을 하다가는 집으로 가면서 내 밷는 말이 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였다. “허-아들들, 미국에 있어봐야, 다 헛거여. 돈 가지고 다 되나...부모 효도는 안되는 거여...츳츷...” 입원 사흘동안 나는 바삐 지냈다. 머리 사진도 찍고 주사도 맞으면서...그리고 물리 치료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문제는 내게는 보호자가 하나도 없으니...물리 치료도 효과 적이지 못하였다. 입원 닷새가 되던 날이었다. 마침 혼자 있는 나의 방으로 들어 온 방문객이 있었다. 모자를 깊이 눌러 썻으며 잠바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는데 "아-셋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저요. 홍조입니다.” “아들아! 네가 왔구나!” 나는 손가락이 잘라지고 뭉퉁해진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컴컴한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배가 먼곳에서 반짝이는 등대를 발견한듯 하였으며 찌그러진 아들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그러나 아들은 간호원에 의해 발각이 되었으며 병원 수위로부터 욕설을 들으면서 밖으로 쫒겨 나갔다. “문둥이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 왔나! 어서 나가거라, 아니면 너는 죽는다. ” 쫒겨 나가는 나의 아들을 바라다 보면서 나는 순간 생의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살아야 해! 걸어야 해! 아들을 만나려면...걸어야 해. 그러나 나는 왜 이렇게 천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아들이 문둥병에 걸린 것만 해도 천벌인데...어쩌자구 나까지도...” 나는 이를 악물고 물리 치료를 받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마비된 팔과 다리를 주물렀으며 지팡이를 놓고 쩔룩이곤 하였다. 며칠 후 나는 집으로 퇴원을 하였으나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큰 아들은 뉴욕에, 작은 아들은 로스앤젤스에서 잘 살고 있다고는 하나 중풍으로 누은 나에게 하등의 도움도 안 되었다. 차라리 10시간 남짖 떨어진 소록도에 있는 셋째 아들이 더 그리웠다. 안성 동네 사람들은 친절하였으나 나를 조롱하는 말도 하였다. “아들 셋이나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구먼...차라리 공부를 못해 곁에서 농사 짖는 아들이 낫지...” * 캄캄한 밤이었다.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모자를 깊이 쓴 청년이었는데 바로 셋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낮에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밖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찾아 온, 문둥병 아들이었다. “아들아! 네가 이밤에 여기를 오다니...고맙다.” 나는 마침내 외로움 속에서 만난 아들을 보고 울고 말았다. 아들의 손가락이 두 개는 없어 졌으며 눈썹은 하나도 없었다. “아-”나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회복이 되시는대로 미국에 있는 형님들 곁으로 가십시오. 미국에 가셔서 물리치료도 하셔서 완전히 회복이 되세요.” “미국에 가서? 너를 여기 두고?” * 중풍으로 쓸어진지 어느듯 8개월 만에 나는 지팽이를 집고 걸을 수가 있었으며 마침내 미국에 있는 아들들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나 혼자서 밥을 하기도 힘들며 세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기 전에 나는 절룩이면서 소록도를 찾아 갔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소록도와 아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기약 없는 이별...” 나는 안성, 천안, 호남선, 광주, 순천 그리고 녹동항구까지 눈물을 흘리며 찾아 갔다. 녹동 항구에서 바라다 본 소록도가 꽤나 멀게 느껴졌으며 다시는 찾아 올 수가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그곳에서 평생을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아들의 얼굴이 눈 앞에서 어른 거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녹동으로 가는 그 여객선을 탓다. 42번 째 찾아가는 그 소록도 였는데 전혀 새로운 소록도였다. “아버지? 미국에 가시게 되어 이 아들은 기쁨니다. 형님들이 잘 해주실겝니다.” 나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거칠었다마는 따슷하였다. “잠시 다녀오마!” 나는 잠시 다녀온다고 말은 하였으나 기약없는 약속이었다. “아뇨. 그곳에서 평안한 인생을 지내세요.” “평안한 인생?” “예. 그러고, 아버지? 아버지를 기다릴게요.” 아들과 이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은 마치 수만리의 길처럼 멀었다. 몇차례 넘어지기도 하였다마는 다시 돌아 온 안성집에는 아무도 나를 반겨 주는 가족은 없었다. 8. 2003년 11월, 나는 대한 항공을 이용하여 로스앤젤스로 갔다. 둘째 아들이 공항에 나와 주었는데 사진으로만 보았던 며느리도 곁에 같이 있었다. “아버지, 비아트리그 구티에레스(Beatrice Gutierrez)라고 합니다. 멕시코 태생이기는 하나 이곳 로스앤젤스에 있는 UCLA대학을 졸업하였구요. 직업 회계사인데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지요.” 물리치료를 하고 있을 때 내게 보내준 편지와 전화를 통해 나는 나의 둘째 며느리가 스페인의 피를 받은 외국 여자인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한국 여자가 아닌 것이 무척 마음 아팠었다. 중풍으로 인해 지팡이를 집고 아들에게 신세를 지려고 찾아온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며느리는 근자에 임신까지 하였기에 구토증세를 가끔 보여 주고 있었으나 성격이 유쾌하였으며 처음보는 시아버지인 나에게 친절하였다. 작은아들 덕분에 디즈니랜드, 헐리우드등을 구경하면서 과연 미국이 꽤 큰 나라임을 느끼고 있었다. 약 한달 후 뉴욕에 있는 큰 아들이 직접 나를 데리러 왔으며 다음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 뉴욕은 또 다른 도시였다. 더욱이 롱 아일랜드의 저택은 그림과도 같았다. 언덕에 있는 아들의 이층집, 발코니에서 바라다 본 대서양은 마치 비단 같았으며 문득 녹동 항구에서 바라다 본 소록도와 같았다. 그리고 그 소록도 섬에 있는 셋째 아들이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르는 듯 하였다. -전생에 지은 되로 인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형의 병, 문둥병환자인 셋째아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 나간 손가락과 발가락에서 누런 진물이 흐르고 있는듯 하였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하나님이 내 아들에게 벌을 내렸단 말인가?”- 큰 아들의 집에서의 생활은 나에게는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대기업의 딸인 나의 며느리는 농사 짖는 시아버지가 뉴욕에 온 것이 처음부터 부담이 되었으며 지팡이를 집고 절룩이는 나의 모습이 못 마땅하였다. 가끔씩 주는 용돈으로 시아버지를 무마하려는 듯하였다. 뿐만 아니라 손자도 영어를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관심 밖이었다. 그래도 나의 아들은 나에게 진정으로 대하고 있었으나 영향력이 큰 아내(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듯 하여 안타까웠다. 아니 역겨웠으며 바보스러웠다. 잦은 저녁 파티로 인해 나는 홀로 집에 있는 날이 꽤나 많았다. 나는 뉴욕에서 송출되는 한국 방송과 텔레비존을 통해 한국을 알게 되었으며 안성에서 가끔 지나쳐 보았던 성당과 교회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무슨 하나님? 아니 그렇다면 왜 마음이 깨끗한 내 아들에게 문둥병을 내렸단 말인가? 말도 안 되지!” 나는 기독교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뉴욕에서의 일 년은 불안함과 불편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2005년 2월, 나는 뉴욕을 떠나 둘째 아들이 사는 칼리포니아, 로스앤젤스로 되 돌아 왔다. 뜻밖이었다. 히스페닉의 며느리는 그동안 예쁜 딸을 나았으며 튀기로 태어난 손녀 딸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그뿐인가 기대 하지 않았던 며느리가 너무나 편안하게 나를 섬겨 주었다. 사람의 관계는 피부, 금전을 떠나 훌쩍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면 한가족이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비록 그것이 말이 안 통하는 다른 인종이더라도 문제가 되질 않는다고 나는 느끼게 되었다. 로스앤젤스에 와서는 나 혼자 버스를 타고 한인타운에 가서 친구도 사귀었으며 교회에도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라는 복음 성가의 한구절이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래! 잠시 머물 세상? 그래, 천형병을 앓고 있는 내 아들이나 중풍으로 찔룩거리는 나 또한 어서 이 세상을 떠나고 싶구나...잠시 머물 세상에서...” 사람들은 날 보고 고향 생각을 하는 우울증 환자라고 말하였다. 그래도 한국 노인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점점 미국 생활이 익숙해 지며 재미있었기에 한국을 잊고 있었다. 비록 지팡이를 짚고 절룩이는 시아버지를 싫어 하기는 하나 그래도 큰 며느리는 시아버지인 내가 둘째 아들의 집에서 오래, 그리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는 것이그녀의 자존심을 더럽힌다고 생각을 하였다. “별것 아닌 히스페닉 여자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다니...아니지....” 회사 비서를 로스앤젤스로 보내 나를 끌다시피 뉴욕으로 데리고 가니 나는 할 수없이 보따리를 들고 다시 롱 아이랜드로 돌아 왔는데, 그게 바로, 2005년 10월 가을이었다. 롱아일랜드의 단풍은 마치 한국의 안성을 다시 보는듯 하였으며 셋째 아들의 얼굴이 다시 떠 오르고 있었다. 첫째 며느리는 작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시아버지인 나에게 친절하였다. 그런데 왜 그럴까? 나는 그녀의 친절에 반비례하여 멀리 안성과 소록도에 있는 셋째 아들이 더 더욱 그리웠다. 역설적인 것은 오히려 다른 인종의 둘째 며느리가 더 포근하며 평안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2006년 3월 나는 추운 롱 아이랜드가 싫었다. 결국 날씨가 따슷한 로스앤젤스로 되 돌아 왔다. 물론 큰 며느리와 아들은 나의 행동을 못 마땅해 했다. 로스앤젤스로 돌아 온 또 다른 이유는 뉴욕보다 로스앤젤스가 나 같은 노인에게는 더 편리하였으며 내 마음대로 버스도 타고 걸어서라도 친구들을 만나거나 교회에 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 못할 어느 목사의 설교가 인상에 깊었다. “태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의 죄로 인함인가? 자신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는 대답하기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고 창조주의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라는 설교였다. -“무엇이라고요? 그렇다면 나이 16세에 문둥병에 걸려 멀리 소록도에 가서 한을 품고 살고 있는 나의 아들은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나요? 아니면 내 아들 자신입니까?” 나는 되 물었는데 그 목사의 대답은 “당신도 아니고, 아들도 아닙니다. 단지 창조주가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무슨 소리요?” 나는 되 물었다.- 그날 밤 나는 셋째 아들을 꿈 속에서 만나고 있었다. 나의 아들은 아주 깨끗한 사람으로 나를 맞아 주고 있었다. “아니? 홍조야? 네가 어찌 그렇게도 깨끗해 졌느냐?” “아버지......” 그리고 그는 대답이 없었다. 꿈이었다.- * 나는 아무래도 한국에 도로 가고 싶다고 둘째 며느리에게 부탁하였다. “영주권을 신청하여 곧 나올 텐데요. 곧 나올텐데, 지금 가시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됩니다. 아버지!” “비아트리즈! 나는 막내 아들이 보고 싶구나. 너도 애가 있으니 이해하겠지?” 결국 나는 2년 8개월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안성으로 돌아 오는 비행기를 탓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코 미국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막내 아들이 보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였다.- 9. 안성으로 돌아 온 날이 바로 2006년 7월 7일이었다. 주인 없이 비어 있던 안성 집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마중하는 듯하였으나 여기저기에 거미줄이 보였다. 그래도 친척들이 가끔씩 찾아와 청소도 하고 관리를 하였기에 나는 다리를 쭉 뻣고 깊은 잠에 빠질 수가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소록도로 가리라.” 나는 일찍 잠을 청하였다. 그러나 밤 늦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장마비로 변하여 무려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셋째에게 연락을 하지 말고 불쑥 찾아가자. 반가워 하겠지...’ 그리고 일주일 후, 7월 15일 아침, 장마비가 그침과 동시에 나는 소록도로 가게 되었다. 43번째 찾아 가는 소록도 길이었다. * 미국이 아무리 좋은 나라라고는 하나 나에게 있어서는 말이 통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한국이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나의 사랑하는 셋째가 이곳에 살고 있기에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마치 소풍을 가는 마음으로 나는 안성을 떠나 천안 광주 순천 그리고 녹동항구에 도착하였다. 아직도 대낮인 2시 45분이었다. 궂이 연락선을 타고 소록도로 곧장 갈 수가 있건만 나는 처음 아들을 데리고 가서 하루를 묵었던 그 여관에 가서 하룻밤을 자기로 하였다. “아드님을 보러 또 오셨군요? 그런데 웬 지팡이를? ” 여관집 아주머니는 지팡이를 집고 있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다보았다. 소록도와 녹동이라고 하는 작은 세상도 많이 변하였음을 실감하였다. 소록도 주민들과 녹동 주민들은 문둥병이라고 하는 전염병 때문에 서로 처다 보지도 않았었는데 소록도 대교를 연결하면서 서로 만나 화해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록도 대교가 완공되면 녹동과 소록도는 걸어서 왔다 갔다 하게 된다고 하였다. 다음날 일찍 나는 연락선을 타고 소록도에 상륙하였다. 철조망으로 처진 소록도 마을과 소록도 병원이 구별되었다. 면회 허락을 받고 병원 입구에 있는 면회소로 갔다. 2년 8개월 만에 다시 보는 소록도-- 그리고 아들이 면회소에서 나를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강홍조씨는 여기에 없습니다.” 안내원이 내게 말하였다. “예? 여기 없다구요? 그렇다면?” 나는 순간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죽었나? 그렇다면 화장이라도 하여...’ “어디 있소?” “나환자 마을로 갔습니다.” 나환자 마을로 가다니...나는 철조망이 처 있는 나환자 마을로 갔다. 아들은 그곳에도 없었다. 중앙 교회에 갔다고 하였다. “중앙교회에?”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앙교회로 갔다. 교회당 문 앞에서 나는 몇명의 문둥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한결같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하였다. “길이 살리라, 길이 살리라. 저 생명 시냇가에 살리라....” 찬송가 소리가 울려오고 있었으며 때를 맞춰 종소리가 울렸다. 10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뜻밖이었다. -아들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까운을 입은 목사님을 돕고 있었는데 어제 죽은 어느 나환자를 위한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아들을 바라다 보면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보았던 그의 모습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 “아버지! 아버지!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아들아!” 나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크게 허깅을 하였다. 2년8개월 전에, 병원 직원이 보았다면, “안됩니다. 1.5미터 밖에서 말을 하시고.. 손을 잡으면 안됩니다!”라고 주의를 받았을 텐데 오늘은 주의를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기뻐해 주세요. 음성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음성....” “그래! 음성, 나환자? 그러면 나병이 치료되었단 말이냐?” "예. 이제는 약같은 것 안먹습니다. 10년이면 낫는다고 했잖아요.“ 나는 너무나 기뻐 아들을 크게 안았다 그리고 엉엉 울고 말았다. -“아-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아들이 치료가 되었다니. 감사합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이미 잘려 나갔고 코는 뭉글어졌지만 아들 몸속에 이젠 더 이상 나 병균이 존재하지 않는 음성 나환자가 되었다는 그 소식이 나를 마치 어린 아이처럼 기쁘게 만들었다. “아버지? 내게는 할 일이 있답니다. 아니 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답니다.” “하나님이 너를 통해 할 일이 있다구?” 나는 언젠가 로스앤젤스에서 어느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10. 손과 발가락이 잘려 나가고 코가 뭉글어진 나의 아들의 입을 통해 나는 소록도란 섬은 절망과 고통만이 있는 곳이 아니요, 미국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롱아일랜드나 일기 좋은 로스앤젤스처럼 희망과 사랑이 용광로처럼 녹아 있는 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용광로에 들어 간 외로움, 고통 그리고 절망이 하나가 되어 녹아 없어지듯이 소록도에 들어간 문둥병 환자들의 그것들도 모두 하나가 된다고 하였다.- * 어머니 없이 유년 시절을 자란 나의 셋째 아들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응집된 용광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문둥병에 걸렸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절망적이었기에 죽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의연한체 하였지만” 사실 그는 울고 있었다. 소록도 병원으로 아버지와 같이 가던 그날 그는 한잠도 못자고 아버지와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여러차례 소록도를 몰래 나와 안성으로 갔으나 그를 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냉대를 하였다. 비단 고등학교 친구들까지도 그를 보면서 피하거나 심지어는 돌을 던지기도 하였을 때 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소록도 병원에 입원을 하였으나 그의 문둥병은 악화 되었으며 독한 약으로 인해 몸이 더 약해 지기도 하였다. 2003년 초 아버지가 중풍으로 쓸어졌을 때 아들은 몇차례 소록도를 몰래 나와 안성으로 달려 갔지만 그가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아-나는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문둥병 환자로구나....” 그리고 그해 11월, 아버지가 절룩거리면서 미국으로 갔을 때 아들은 죽고 싶었다고 하였다. 소록도 중앙 교회와 천주교회에서 울려 오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위안을 받았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엇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준 아름다운 문둥병 환자들의 얘기가 있었다. *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애향원 문둥병 요양소에 있는 1000여명의 문둥병 환자들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님의 얘기였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이 터지면서 순천 사범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던 두 아들은 좌익 동기생들에 의해 인민재판 후 총살당하여 죽고 말았다. 그러나 손 목사는 오히려 두 아들을 죽인 좌익 학생, 안재선을 양 아들로 삼았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나면서 그는 피신하지 않고 나 환자들을 끝까지 돌보다가 9월 13일 48세의 일기로 총살당하여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신부님을 통해 들은 다미엔 신부의 얘기도 있었다. -벨지움 사람, 다미엔 신부는 1873년, 몰로카이 섬으로 문둥병 환자를 돌보기 위해 찾아 갔었다. 매일 12명씩 죽어 가는 그곳에서 10년간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신자가 되지 않았다. “당신은 문둥이가 아니니 우리같은 문둥이를 알 수가 없소.” 문둥이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저를 문둥이로 만들어 주세요. 죄인을 구하기 위해 죽기까지 한 예수님처럼 나를 문둥이가 되게 해 주세요.” 마침내 다미엔 신부는 문둥이가 되었다. 그 후 단 3년만에 몰로카이 섬에 있는 800명이 신자가 되었다. 다미엔 신부가 죽은 후 몸은 벨지움으로 가 묻혔으나 병자들을 어루 만져 주었던 오른 쪽 손은 몰로카이 섬으로 되 돌아와 문둥병 환자들의 손이 되었다고 한다.- * 나의 아들, 홍조는 소록도 중앙교회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인간은 왜 태어 낫으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코가 뭉글어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그의 영혼은 건강하였으며 남은 육체의 부분이 더 많음을 알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 다미엔 신부처럼 문둥이를 위해 헌신은 못하나 그래도 본인보다 더 부족한 노인들의 손과 발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였다. 소록도 병원과 교회, 천주교 그리고 다른 공공의 일에 자원봉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5년 11월이 되었다. -늘 존경하던 백인 수녀 간호원 두분이 편지 한통을 써 놓은 채 소록도를 떠나 멀리 그들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 간 것을 알게 되었다. 1960년초에 오스트리아의 두 수녀, 간호사들이 소록도로 찾아와 봉사를 시작하였는데 6000여명의 문둥병자들을 돌보기에 너무나 벅찼으며 손이 부족하다보니 40여년을 맨손으로 문둥병 화자들의 피부를 만지면서 치료를 하였다. 그리고 40여년 후 문둥병 환자들의 수는 600여명 그리고 많은 봉사자들이 소록도를 찾으니 이 둘 수녀 간호사들은 70이 넘은 나이로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마리아와 마가레트 수녀(간호사)들의 얘기였다.- * 나의 아들, 강홍조는 이 두 수녀로부터 헌신적인 치료를 받았으며 어머니처럼 늘 존경하였다. 두 분이 떠나고 난 소록도 병원- 나의 아들은 “내가 이 두분이 했던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의 아들은 뜻밖의 대답을 얻었다. “ 강홍조씨! 당신의 몸에는 더 이상의 나병균이 존재하지 않네. 음성 나환자가 되었어. 축하해. 축하해.” 담당 의사가 강홍조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말해 주었으며 크게 허깅을 하였다. “예? 음성이라고요? 치료가 되었다구요?” 강홍조는 너무나 감격하여 울고 말았다. 아주 미천한 그리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문둥병자에서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였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뻐해주세요.” 그는 중앙교회에 가 무릂을 끓고 기도를 하였다. 비록 손가락과 발가락이 몇 개 떨어져 나갔으며 코는 뭉글어 졌어도 이젠 인간이 되었다. 친구를 만날 수 있으며 아버지와 손을 잡아도 되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지난 10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지난 것 같았다. “손양원 목사, 다미엔 신부, 마리아, 마가레트 수녀들을 돕자. 아- 이것이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강홍조는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11. 43번째 찾아 온 소록도의 길.... 잘려나간 아들의 손과 발가락을 만져 보면서 나는 한하운의 시가 또 생각났다. 또 잘려 나갈 손과 발가락이 있다 해도 문둥병은 하늘이 내린 벌도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병도 아님을 나는 아들의 목소리를 통해 마음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 아들아! 네게 주어진 너의 길을 나도 같이 가자꾸나. 여기 소록도에서... 잠시 머물 이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너의 친구가 되련다. 함께 가자. 소록도로 찾아오는 길은 오늘로 마지막이 되었구나. 이젠 문둥이, 너의 손을 꼭 잡고 같이 달려가는 영원한 길만 있을 뿐이다.“ 단편 소설 끝 (9월 24일 200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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