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의사 42년

2012.01.21 06:56

연규호 조회 수:685 추천:20

의사 42년 제일 편 산문집(散文集) 제목: 의사 42년 그리고 나. 저자의 말: "존경하는 타구치(田口, James T. Taguchi, MD) 선생님! 성경을 상고해 보니 ,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라고 지혜와 부귀를 흠뻑 소유한 솔로몬왕은 고백했습니다. 1969년 2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날, 부모 형제 그리고 은사들이 보는 앞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힘차게 외친 후 시작한 햇병아리 의사의 길도 세월이 �� 어느 듯 42년이 됐습니다. 타구치 선생님, 저 역시 나이 들어 육체가 쇠약해지면서 이젠 아무런 미련 없이 의사의 길을 정리하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인 나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고백한 바울사도의 말씀이 귀에 쟁쟁한 것은 오로지 예수를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지요. 존경하는 타구치 선생님, 비록 선생님은 이 세상을 떠나 멀리 가 계시지만 내 마음 속에 살아있기에 또 한 차례 은퇴를 앞두고 선생님으로부터 귀한 가르치심을 듣고 싶습니다. 인생을 마감하는 후배 의사인 나를 위해 위로와 사랑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주: 타구치 선생님--- 슬픔과 외로움에서 허우적거리며 절망에 빠졌던 나를 위로해 주며 사랑으로 도닥거려 주신 오하이오 데이톤에 있는 라이츠(Wrights)의대 부속 원호병원 내과 과장. 일본계 미국이민 3세로 한국민요 아리랑을 좋아해서 아리 선생이라고도 부른다. 1. 어느 시골 소년의 꿈, "의사(醫師) 그리고 소설가(小說家)" The Dreams of a country boy, a doctor and an author 1960년 4월 19일---- 4.19 민주혁명이 나던 날, 나는 꿈 많은 고등학교 일학년(10th Grade)소년이었다. 수 천 년을 이어갈 것 같았던 독재정권이 학생-시민혁명에 의해 허망하게 붕괴되고 희망찬 민주 정부가 따스한 4월의 봄날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듯이 수립되었을 즈음, 시골 소년의 작은 가슴속에도 소용돌이치는 인생의 꿈들이 추운 겨울을 이기고 언 땅위로 고개를 삐쭉 내밀고 있었다. 소년 연규호에게도 작고 숭고한 꿈들이 푸른 새싹이 되어 기지개를 펴고 솟아나고 있었다. - 첫째: 의사가 되자. 둘째: 소설가가 되자. 셋째: 사람들을 돕는 기독교 신자가 되자.- 나는 주저함 없이 세례를 받았으며 성공(成功)이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 붓치고 이를 악물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시(詩)와 수필(隨筆)을 써 학원과 학생문예지에 투고를 해 운 좋게 입선도 됐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나는 단편소설을 써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쉽사리 되질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문학은 완전히 접어두고 오로지 대학입시에 전념하여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을 하였으며 6년 후 의사가 되었을 때 이젠 고등학교 시절에 못했던 문학을 다시 계속해 볼 수가 있으리라고 기대를 해 보았으나 천만의 말씀, 전문의사가 되는 과정은 의과대학보다 더 힘들었기에 아예 문학자체를 접어두고 말았다. '전문의가 되면 문학을 다시 하리라....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 서리라.' 인턴 그리고 공군 군의관을 마치고 미국으로 온 나는 뉴저지, 뉴욕 그리고 오하이오를 전전하며 힘들게 내과 전문의사의 과정을 이수하다보니 한국에서 생각했던 문학과는 더 멀어지고 있었다. '문학은 저 하늘의 별... 도저히 가까이 하기 힘든 저 별...'이었다. 가까스레, 여러 차례 도전하여 내과 전문의사 과정을 마치고 보니 이젠 먹고 살기위해, 그리고 집 월부금을 벌기위해 노동자처럼 밤낮없이 병원과 진료실을 뛰어 다니게 되었으며, 시간의 노예가 되다보니 '문학이란 것이 내게도 있었던가' 라고 반문하는 천치 바보가 되고 말았다. '문학이란? 내게는 없다. 없어!' 그뿐인가, 남을 돕는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던 나의 꿈도 성령님을 외면하다보니 실천 불가능한 말 뿐인 한줌의 더러운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결국 나에게 있어 의사란 직업은 남을 돕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잘살기 위해 뛰어 다니는 돈 버는 노동자에 불과 했으며 고등학교 때 품었든 문학 소년의 꿈이란 허드슨 강 건너편 뉴욕시내, 마천루에 걸려 있는 오색의 네온사인에 불과했다. 남을 돕는 기독교인이란 허울 좋은 가식일 뿐이요 허드슨 강을 오가는 유람선에 불과했다. - 그.러.나.......... 1994년 5월7일, 의과대학 졸업 25주년 재상봉의 날..... - 한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졸업동기들이 25년만에 가슴설례며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만나던 그날이었다.(연세대학교 졸업 25주년 재상봉, 의과대학 졸업 재 상봉의 날) 졸업당시 24-25살이었든 청년의사들도 25년이 지나고보니 49-50세의 중년이 되었으며 교수,부자, 성공한 사람이 되어 당당하게 나타났는가 하면 성공하지 못해 뒷전에서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하라는대로 하는 동창도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쓰리고 아프게 한 것은 이미 죽어 이세상을 하직한 친구들이었다.그중의 하나가 나와 짝을 했던 유상진이었다. 친구. 유상진... 그는 졸업 후 멀리 미쉬간에서 신경내과 개업을 하던중 간경화증으로 피를 통하면서 병원 앞에서 죽어 고국에 가지 못하고 추운 미쉬간 호숫가에 장사되었�. 미국에 와서 그를 본 것이 딱 한번이었는데, 40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다니...... 졸업25년 후에 만난 동창들은 성공과 실패라는 명암이 선명했으며 행동 거취도 완연히 달랐다. 성공한 동창은 어디에서 보나 우뚝 솟은 탑처럼 내 눈에도 어딘가는 달라보였다.- * 그렇다면 꿈 많았던 문학소년 연규호의 위상은 어찌 되었는가? 성공한 의사? 아니면 그저 그런 성공하지 못한 평범한 의사? 나의 모습은 쌓다가 우루루 무너져 버린 시골 언덕의 성황당 돌더미만도 못해보였다.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으니까..... -솔직히 평가해보면, 의사 연규호는 학문적으로는 논문 한편도 못 쓴 밑바닥 인생이요, 돈도 제대로 못 벌은 평범한 개업의사로 집 월부금내고 애들 학비를 불편 없이 내주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무명의 의사였다. 조국을 버리고 미국의 변방 가든그로브에서 밥 먹고 살기위해 뛰어 다니는 '볼 품 없는 쓰레기 같은 의사 연규호'가 졸업 25년 후의 솔직한 성적표였다. 어찌 보면 잘 먹고 잘 살기위해 당시 가난했던 조국을 버리고 미국에 간 매국노, 배신자에 불과했기에 얼굴이 화끈해 지면서 부끄럽기만 해 어서 행사가 끝나고 미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와서 졸업생이라고 서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토록 곤혹스럽고 힘들었던 25주년 재상봉 모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전환점이 될 줄 누가 알았든가........ (주: 생각지도 못한 동기 동창, 강군순의 죽음과 정병찬군의 심장마비 사망을 내 눈으로 보는 사건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형외과 교수로 존경을 받던 친구, 강군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상하고 다정한 친구, 정병찬의 아련한 49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아- 친구도 가는구나...속절없이...그러면 죽은 후에 그들이 간곳은 어디인가?" 나는 죽음 뒤에 찾아가는 새로운 영적 세계를 그들의 죽음을 통해 체험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큰 축복이요, 긍휼이었음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기 ㏏?潔駭�. "죽음이 있다. 나에게도 죽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을 준비해야지......" * 한편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나는 개천에서 용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충청북도 도안이라는 시골에서 농부의 손자로 태어나 청주와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공부를 하여 의사가 된 것만 해도 마치 3.8 광땡을 잡은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나는 내가 의사가 된 것이 나에게는 과분함을 피부로 느끼며 겸손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2. 친구들의 죽음을 보면서(A.B.C.D).... A: 친구 강군순 교수의 죽음: 1963년 3월, 의예과에 입학하면서 만나게 되었던 강군순은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듯이 모든 면에서 의연했으며 강직하게 그리고 신앙을 갖고 살아온 친구이다. 청량리 굴다리 넘어 전농동에 살았기에 나와 6년간 통학을 같이 했으며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할 때 같은 방에서 지냈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이였다. 1970년 내가 공군에 입대하고 1973년, 미국으로 오면서 서로 소식은 알고 있었으나 어쩌다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마는 그와 나는 늘 교류하고 있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정형외과 전문의과정을 마치고 군복무후 세브란스로 돌아와 교수가 되어 후진을 가르치는 성공한 친구였다. 기독교 신자로 늘 남을 돕는 좋은 사마리아사람이었기에 다른 친구들도 그를 존경하였다. 1994년 5월 7일... 동기동창34명과 영부인들은 제주도 서귀포, 중문단지내에 있는 하야트호텔에 투숙하며 3박 4일의 제주도 관광을 시작했다. 제주도의 명소를 찾아 구경함은 물론 싱싱한 회와 얼큼한 찌개에 소주를 곁들여 하루를 즐긴 후 각자 정해진 방으로 가 밤을 지내게 되었다. "군순아! 잘자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 만나자!" 다음날 아침 나는 다소 일찍 기상하여 따끈한 커피를 마시려고 호텔 라운지로 내려왔는데 웬일일까? 앰뷸란스가 호텔입구에 정차하고 있었으며 눈군가가 실려가고 있었다. 앰뷸란스가 떠난후 "강군순이 밤새 사망했다!"라는 소식을 듣고 나의 눈을 의심했다. 사실이었다. 나의 친구 군순이, 밤새 심장의 이상을 느끼더니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음을 뒤늦게 같이 자고 있던 아내에 의해 발견됐으나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동창들의 모임은 삽시간에 바닷물 빠져 나가듯이 흥이 깨졌으며 나는 제주시로 나가 싸늘한 군순이의 시신을 관에 넣어 서울로 오는 대열에 합류했다. 나의 친구 강군순은 마치 조용필의 노래, "친구여"처럼 저 먼 세상으로 가버렸다. "꿈은 하늘에서 빛나고.....친구여 그대는 어디 갔나. 그리운 친구여....그는 멀리 천국으로 가버렸다." B.친구, 정병찬을 보내면서.... 친구 정병찬은 역시 의과대학에서 만나 군대를 필하고 미국으로 와 그를 뉴욕에서 만났다. 그는 뉴욕 부르클린에서 인턴을 한 후 멀리 뉴 올리안스로 가 그곳에서 마취과 전문의사가 되어 로스앤젤스에서 다시 만났으니 나와는 끈끈한 친구였다. 세상에 이 친구와는 마음을 활짝 열고 교류 할 수 있는 친구였다. "마음을 열고...." 사실, 의사들 세계에서 마음을 연다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하면서 가능한 이익 되는 것은 먼저 취하라고 했다. 로스앤젤스에 있는 의과대학 친구들보다 단 한명의 정병찬으로 나는 만족했다. 심장수술을 받기 얼마 전, 그는 나의 진료실로 와서 너무나 외로워 무작정 차를 몰고 알라스카주 쥬노까지 갔다 왔다고 하며 그는 내게 말했�. "마음이, 마음이 너무나, 외로워...가슴이 아파...." "무슨 말여! 마음이 아프다니.....협심증이 있나?" "나, 마음이 괴로워서 자동차를 타고 대평양 해안으로 달려 시아틀, 밴쿠버 그리고 알라스카의 쥬노까지 갔다 왔어...." "쥬노까지?" "그래, 쥬노..." "혼자서?" "그래." "네 아내는 뭘 하고?" "말하지 않고 갔다 왔어......" "혼자?" 나는 그가 우울한 것은 알지만 이토록 우울한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가 우울증 말고 협심증이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됐다. 1994년 2월 초, 그는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가지고 응급실로 달려간 후 심장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바짝 말라있었다. 1994년 4월말... "규호야? 나도 한국에 가 친구들을 만나련다. 나도...." 그는 심장 수술 후 무리해서라도 한국에 가 동창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 같이 가자..." "이번에 재상봉에 갔다 오면 아마 마지막일지도 몰라...."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건강해..." 나는 병찬이와 같이 졸업 25주년 재상봉으로 한국에 가 제주도에서 같이 지냈는데 뜻밖에도 강군순은 그 밤에 죽고 말았으나 정병찬은 무사히 행사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죽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병찬이는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7월, 그는 건강을 위해 조깅으로 밖에 나와 달리다가 풀쩍 쓸어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이미 그는 혼수에 빠진 후였다. 7일 후, 그는 강군순의 뒤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재상봉에 다녀 온지 2개월 만에 그는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나 죽으면 로즈힐에 묻어 달라...." 유쾌하며 법이 없어도 산다는 그 친구...늘 남을 도와주던 그 친구.... 대한민국 의사, 육군 군의관 대위, 미국 마취과 전문의사 정병찬 그는 나보다 먼저 가버렸다. C. 죽기전에 내 목소리 듣고 싶어 걸려은 친구의 전화...... "규호야? 너, 나 기억하지? 현봉이야, 옥현봉!" "현봉이? 어, 너? 야! 반갑다. 반가워." "그래, 규호야! 잘 있었니?" "어, 잘있어. 야! 너 거제도...어, 거제도, 너 생각하면 늘 거제도에서 갖고 온 김 생각이 나지..." 옥현봉은 거제도 출신으로 어찌된 셈인지 충청북도 청주로 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나와 같이 3년 간 지낸 초등학교 동창이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고 보니 형님밑에서 눈치밥 먹으며 살았기에 옆집에 살던 나의 집에 자주 놀러와 음식도 먹으며 같이 놀았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른 곳에서 보내다 보니 가끔 연락이 되었다가 내가 미국으로 오면서부터는 거의 소식이 없었다. 청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술을 좋아 한다고 하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어느날 내게 걸려온 전화는 분명, 옥현봉이였다. 과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나 근래, 그는 몹시 피곤하여 병원에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뜻밖에도 간암이 꽤 진전된 상태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간암? 간암!' '그러면 나는 죽는다. 아니 곧 죽는다? 얼마나? 3개월? 6개월?' 그에게는 죽음이 저승사자처럼 오랏줄을 들고 닥아 오고 있는 듯했다. 초조했으며 "@�나면서 마침내는 이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문득 생각난 것이 초등학교 동창인 나였다. "규호야!, 나 너하고 얘기하고 싶어...아니 보고 싶어. 미국에 있으니, 못 보겠지?" "현봉아? 간암?" 나는 나 자신도 덜컹 마음이 울렁거렸다. 현봉이가 죽다니....죽다니.... 그런데 얼마나 외로웠으면 미국에 있는 나를 떠 올렸을까? "현봉아? 죽지마라...죽으면 안돼!" 나는 비통한 말을 그에게 할 뿐 내가 그에게 해 줄 일이 없었다. * -문득, 나는 1985년 9월말,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눈에 떠오르고 있었다. 불쌍한 아버지였다. 평생 자식들 학비대느라고 쉬지도 못한다가 간암이 발생해 3년간 항암치료하느라 피골이 상법하도록 말랐던 아버지.... 복수가 찬 배와 항문으로 흐르던 피... 숨이차고 배가 아파 몹시도 괴로워 하셨던 아버지...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찾아가면 '바쁜데 왜 여길오느냐, 어서 가거라!'라고 말하던 아버지.... 3년동안 나는 14-5차례, 한국을 방문했는데 강행군이었다. 목요일날 밥 비행기를 타면 한국에 토요일 아침에 도착하여 토요일 아버지와 같이 보내고 일요일 날 아침 교회에 같이 갔다가 점심 먹고 부리나케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오면 역시 같은 날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몸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니, "하루만 더 있다가 가거라..."라고 말을 하셔서 나는 하루를 일요일을 지내고 월요일말 비행기를 타고 오면 역시 같은 날, 아침 11시 였기에 로스앤젤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든그로브의 진료실로 달려와 기다리는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말이 진료지, 내 눈은 빙빙 돌았으며 정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우울하여 아무것도 못하였다. 3년, 마침내 아버지는 임종을 하셨는데 김포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1시간 전에 潭악上楮�..."라는 간호사의 말속에서 "미국에만 살면 무엇하니? 애비에미도 모르는 놈아!"라고 비웃는 듯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잡았다. '아-차거워'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버지의 손은 어름짱같았으며 아버지가 오히려 무서웠다. 내과 의사인 내가 내 손으로 죽은 환자를 한 두명이나 만졌던가? 아니다 많은 환자를 만졌는데 어찌 내 아버지의 손이 찬 것을 몰랐던가....죽으면 이내, 싸늘해 지는데....- * 결국 친구 현봉이는 몇 개월 더 살다가 죽었으나 나는 그를 차장 가지 못했다. 비행기 값이 아까워서...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면 내가 죽기전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을 때 누가 나를 찾아 올까? 나는 미국이란 나라와 의사란 직업속에서 나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되고만 셈이었나? 나도 현봉이처럼 그렇게 죽을 텐데...... D. 친구 황익주의 죽음앞에서.... 내과 의사 42년동안 나는 수많은 죽음을 보았으나 가장 감동이 되는 죽음은 바로 친구 황익주의 죽음이었다. 대광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미국 로스앤젤스에서도 인근에 같이 살았으니 50년의 친구이다. 건축공학을 하여 설계사로 수많은 집과 건물을 아름답고 튼튼하게 지으면서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익주와 나는 시시콜콜한 일과 비밀도 같이 나누었으며 수요일 오후에는 골프로 운동을 하였고 저녁도 같이 하였다. 건겅하여 골프 첫 티 티삿이 무려 250야드를 나가곤 하였다. 아들 하나 두었는데 일찍이 척 스미스 목사님 밑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미주, 유럽 그리고 남미로 선교사로 나가 복음을 전하던중 부라질에서 부라질 교회를 하며 그곳에 사는 독일계 백인 여성과 결혼을 해 손자와 손녀를 보아 즐거운 할아버지가 되었다. 착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언제 죽든 하나님 아버지에게 갈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정작 그의 말을 100% 받아 드리지 못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자. 그리고 오라고 부르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라고 그는 늘 말하였다. 2010년 66세가 돼, 은퇴금을 많이 받으면서 설계사의 직에서 은퇴를 하였다. 행복한 은퇴였으며 풍족한 은퇴였다. 오늘도 나와 익주는 골프를 즐기며 운동을 하였다. "야! 규호야? 나, 요즘 피곤한데...스트레스도 없는데..." "아마, 은퇴를 해서 정신적으로 그런가?" 나는 그렇게 말했으나 별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2개월, 그는 등뒤와 뱃가죽이 아프다고 했으며 살이 빠진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골프 도중 다소 피곤한 듯 했다. "뱃가죽이 아프고 살이 빠진다면, 내과 적으로는 갑상선 항진증이거나 취장암일지도 몰라..." 나는 그를 강제로 진료실로 불러와 위 장 내시경 그리고 복부 단층촬영(CT Abdomen)을 했다. 물론 혈액검사도 같이.... 결과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다니면 심장내과 의사는 엉뚱하게도 근육통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신경내과의사는 그를 물리치료실로 보냈다. "만성 근육 신경염이라는 진단이었다." 많이 좋아 지는듯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살이 빠지고 힘들어 했다. 결국 2개월을 이렇게 보낸후 나는 그를 다시 볼러 복부 단층 촬영을 하고 보니, 앗뿔싸! 취장암(Pancreatic Cancer)이 발견되었으며 그 사이에 이미 간으로 전이(轉移)가 되어 수술이 불가했다. 비록 의사이기는 하나 내 입으로 그에게 취장암을 선고하기가 힘들어 나는 울고 말았다. "취장암이구먼?"오히려 친구 익주가 내게 물었다. 나는 더 흐느껴 울었다. 내 앞이 캄캄했으며 모든 것이 절망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환자인 익주의 입이었다. "야! 규호야? 취장암이라면...그래 아버지가 부르시면 그냥가자. 오라고 하시면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품으로 달려가마..." "............." 나는 더 흐느껴 울고 말았다. 주치의사인내가 환자 앞에서 오히려 울다니...... 나의 친구 익주는 항암치료도 거부했다. "규호야? 항암치료로 3-4개월 더 산다고 무슨 의미가 있니? 일찍,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가려고 한다. 그렇게 해다고...." 그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딱 한번 나의 손을 잡고 울었다. 그는 아내를 가르키며, "규호야? 너 제인(Jane. 그의 아내 이름)을 잘 봐 주거라. 나 간 다음에...부탁한다." 그리고 그는 점점 더 말라지더니 변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더니 얼마후 이세상을 떠나 멀리 그가 바라고 바라던 천국으로 갔다. 나는 그의 장례식날 조사를 했는데, "나의 친구요, 나의 선생이었던 익주를 나도 곧 따라가렵니다. "라고. 내게는 그를 특별히 기억할 일이 있었다. -2000년 9월 초...나는 그의 부부와 같이 삼호관광을 통해 멀리 예로우스톤 공원으로 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유타 주를 거쳐 와이오밍주 엘로우스톤 공원으로 가는 도중 나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삐끗하여 발목을 다쳤기 때문에 여행내내 버스에서 머물렀으며 목발을 집고서야 겨우 걸었으니 여행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와이오밍을 지나면서 나는 버팔로와 수.인디안의 관계를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으며 나의 먼 기억을 일깨워 줬다. "수.인디안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캐러 보냈던 서복장군과 동남동녀 3000명의 후손들이다." 샤이엔이란 제목의 단편소설로 재외동포문학상을 받았으며 일년후 샤이엔이란 장편소설을 써 발표했으며 영문으로 번역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만족하지 못하소 지난해 초부터 샤이엔의 언덕을 쓰면서 늘 같이 여행했던 익주부부에게 감사를 표하며 살아왔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예설!하면서 찾아 가는 것이 최선이다. 황금으로 된 본향에서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사는 거다. 즐겁게...." 그는 내게 가르쳐주기도했다. 지난해 초부터 나는 샤이엔의 언덕이란 이름으로 이 소설을 완전히 고쳐가며 다시 써보았는데 익주는 출판을 불과 두달 앞두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자!" 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죽음을 초월했던 나의 친구, 황익주가 그렇게도 대견스러우다니.......... 마침내, 나의 16번째 소설, 샤이엔의 언덕(The Hill of Sheyenne)의 말미에 나는 "친구 익주를 생각하며"라는 글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3개월만 더 살았더라면 그를 위해 쓴 소설집을 보고 죽었을 텐데..... "익주, 그대와 내가 이 땅에서 50년의 세월을 친구로 지냈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나도 너의 길을 따라 갈 것이다. 너를 꼭 찾아 가마." 2011년 4월, 지상에서 친구 연규호가. 3. 죽음이란? (친구들의 죽음을 바라다 보면서 내가 느낀 죽음이란....) 의사는 죽음으로 가는 육체를 살리는 직업임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의학적으로 죽음은 호흡, 박동,체온, 혈압이 멈추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를 磯�. 그러기에 뇌파가 있으며 심장이 계속 뛰고 있으나 의식이 없는 경우를 뇌사라고 하지 죽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심장의 박동도, 뇌파도 다 없어지면 "사망"이라고 진단을 내리는데 내과 의사 42년 많은 죽음을 진단하여 사망진단서도 발급해 주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 그들의 육체는 없어졌으나 그들에 대한 나의 추억은 간절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은 영(靈),혼(魂)그리고 육(肉)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영(靈,Spirit)은 신령(神靈)이기에 내가 어찌 할수 없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三位一體)의성령님이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내려와 행동하시기에 우리는 그저 성령님의 활동에 나를 내 맞기고 따라 갈 뿐이다. 성령님은 늘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좋은 것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魂)은 마음이요 매 몸속에 있어 내가 조절 할 수가 있다. 어찌보면 욕심이라고도 말할 수있다. 잘못된 욕심은 나를 파멸로 이끌지만 건전한 욕심은 나를 발전시킨다. 혼은 한과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한(恨)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육체적인 것으로 한다면 치료가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에게 나아가 간구하고 고하면 치유가 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혼이 존재하며 건전한 혼이 있으면 영도 기쁘게 들어오리라. 그렇게 보면 나의 친구들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혼을 가졌으며 더 부러운 것은 성령이라는 영이 들어와 그를 지배 했기에 죽는 날 까지도 원망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천국으로 갔음을 나는 확신한다. * * * 나는 한 때 죽는 것을 두려워 한적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노이로제였다. 죽은 후에 썩어질 육체가 두려웠으며 벌레와 균이 육신에 들어와 번식하여 썩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했었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의 죽음 특히 황익주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 그자체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인간은 한번은 죽는 것인데...... 나의 친구도 그렇게 죽는다, 나라고 그렇게 죽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그렇다면 그 진리란? 예수님을구주로 시인하고 그를 따르면 영생한다는 그 진리....그 진리를 알고 나니 아니 마음 속에서 체험하며 확신을 하면서 자유로워 질 뿐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이 되었다. 결국 죽음이란 다른 삶의 연속이기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익주야! 고맙다. 너와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그리고 너를 통해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 * 죽음 앞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면 의사로서 나의 경험을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도 말해 주고 싶다. 사람의 죽음은 한순간 잠자는 것이요 다시 이어질 다음의 세계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라고....... 4.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와 나. 내 소설의 또 다른 선생님 소설, 빙점(氷点, 고오뗑)으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 소설가를 나는 아주 좋아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나의 멘토로 생각하며 그녀의 소설과 사상을 흠모하며 모방하고 있다. 기독교가 1%도 안된다는 일본에서 모범적인 기독교 작가이기에 갖는 친근감도 있지만 나는 그녀를 도아준 그녀의 남편 미우라 미쓰요(三浦世光)를 더 존경하고 있다. 미우라 아야꼬를 세기적인 소설가로 키눠준 사람은 문학을 하는 사람(文人)이 아닌 평徨� 잡화상 가계 주인인 남편이요, 그 남편을 키워준 분은 그녀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이었음을 미우라 아야꼬의 고백시에서 읽을 수가 있다. 미우라 아야꼬 소설가는 나의 어머니와 비슷한 년배(1922년생)로 혹가이도 아사히카시에서 출생하여 사립여고를 졸업한 후 7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폐결핵과 척추 결핵으로 13년간 요양생활을 하였으며 헌신적으로 도와준 2살 연하의 미우라 미쓰요와 결혼후에도 후유증으로 침대에 누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작은 아사히카시(市)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며 근근이 살았으며 큰 희망도 없었다. 하루하루 괴롭고 힘든 투병생활을 하던 어느날, 그녀에게 같은 병(결핵)을 앓고 있던 소꼽친구가 찾아와 예수님을 전했으며 그녀의 인도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소꼽친구는 아야꼬에게 예수를 전해 준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친구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다.---- 친구의 죽음을 본 그녀는 마침내 그녀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될것인가? 죽음? 내게도 온다." 동시에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에게 간곡하게 기도로 매달리게 되었다. 글을 쓰고 싶다. 글을....그녀는 혼자 독백을 하고 있었으나 몸이 불편하니 마음 뿐이었다. "아야꼬, 당신은 글쓰는 재주가 있어요. 글을 써봐요." 남편 미쓰요는 말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 글을 쓸까?" "조금씩 시간 날때마다 기도하고 글을 쓰시오. 내가 뒤에서 기도로 도우리다. 그리고 당신을 도우리다." 남편의 격려에 힘을 얻은 아내 아야꼬는 병상에서라도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 영원한 행복을 만들�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며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이땅에서 내 고통을 씻어 줄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이나마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내 구주를 바로 알고 찾는 일, 그것이 곧 행복을 찾는 일의 시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 그리고 쓴 글이 장편소설, 빙점(氷点, 고오뗑)이었으며 아야꼬는 일약 일본은 물론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었다. * 세계적인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를 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혹가이도의 작은 도시 아사히카로 몰려 왔으며 미우라 부부가 경영하는 잡화점은 매상이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미우라 아야꼬는 더 많은 물건과 전에 취급하지 않았던 품목도 팔기 시작하니 돈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남편 미쓰요는 말했다. "여보, 우리가 물건을 더 팔고 더 많은 품목을 위급함으로 말미아마 다른 잡화점은 큰 타격을 받고 있소. 욕심을 버리고 옛날과 똑같은 품목의 물건을 팝십다. 그래야 우리는 모두 다 살 것이요..." "당신 말이 맞소...." 결국 미우라 잡화점은 변한 것이 없이 똑같이 운영되고 있었다. * 그리고 미우라 아야꼬는 전과 동일하게 침대에서 글을 조금씩 썻으며 그녀가 글을 쓰는 동안 남편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를 위해 기도를 올려주었기에 주옥같은 소설이 여러편 더 쓰여졌다. * 남편의 친구가 어느 날 아야꼬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 친구는 인물도 좋았으며 재능도 있어 남편과 같이 있는 동안 아름다운 목소리로 시를 읊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 데 아야꼬는 그에게 매혹이 되어 "악기도 다루시나요?"라고 물었다. "실은 바이올린을 했습니다마는..... 지금은 울지 않는 바이올린이 되었지요." "아니 왜 그만두셨나요?" 아야꼬는 물었다. -결혼하고 그는 아내를 위해 바이올린을 켜 주었는데 아내는 남편의 바이올린 솜씨를 말하지 않고 바이올린을 정말 잘 치는 사람을 몇 안다고 말 햇을 때, 그는 무슨 뜻인지 알고 그후 20년동안 단 한번도 바이올린을 잡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아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야꼬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도 혹시 내 남편도 울지 않는 바이올린을 숨기고 살고 있지나 않은지..." 남편의 친구는 노래도 잘했으나 자기 집에서 편한 마음으로 노래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아이들도 싫어 하고 아내는 너무 시끄럽답고 하니..... 아야꼬는 진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듯 정감있고 사랑이 넘치는 노래를 어째서 이 사람의 아내와 아이들은 들어주지 않는가....설사 남편이 노래를 음정이 틀리게 부른다 해도 가슴에 사랑이 있다면 기꺼이 들어주고 만족해 하는게 도리가 아닐까?' 아야꼬는 어느날, 남편을 위해 작은 의자를 만들었는데 나름대로 큰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내마음을 전해 주는 방법은 그저 아무말 없이 그 의자에 앉아서 기뻐 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남편이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삼아 얘기할 때, 그것이 다소 지루할지라도 조금은 감탄하며 들어주는 것이 그에 대한 작은 사랑이자 배려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가정이란 별 것 아닌 작은 이야기도 자랑삼아 나눌수 있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다정하고 관대한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친구가 돌아 간 후.... 아야꼬의 남편은 아야꼬에게 말했다. "당신은 울지 않는 바이올린을 울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구....." 내가 울지 않는 바이첩걋� 울게 해 주었다는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계속되는 한 내 마음 속에도 역시 울지 않는 바이올린이란 없을 것이다. 이상은 미우라 아야꼬의 글에서.... * 내가 존경하는 미우라 아야꼬는 왜 글을 썻는가? 역시 친구의 죽음을 통해 잊혀졋던 자아가 되 살아 난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전해 주었던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아야꼬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숨겨졌던 자신의 소질이 따슷한 봄날 새싹 처럼 뾰족히 대지를 뚫고 나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글을 통해 그녀는 좋은 친구를 또 다시 만나게 된게 아닌가? 남편, 미우라 미쓰요라는 친구를.....아니 동역자를 만나면서 그녀는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과 친구..............죽음과 친구........... 과연 나에게도 죽음과 친구가 존재하는가? 글을 써야 할 만큼 간절한 죽음과 글을 쓰도록 도와 주는 친구가 존재하는가? "나더러, 내가 의사이기에 능력이 있으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남을 도와 주라고 하지만, 아- 나는 지쳤으며 불한당에게 칼맞은 나그네, 그게 바로 나다. 나---, 그러기에 내게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닥아와 주기를 바란다." 미우라 아야꼬가 외롭고 힘든 병상에서 소설을 쓴 것처럼, 나도 외롭고 힘든 망망한 바닷가운데에서 사람을 그리워 하며 소설을 써야만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병든 미우라 아야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남편)을 만났기에 외로움을 떨치고 글을 쓸 수가 있었듯이 나 또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타구치(아리) 선생을 만났기에 나를 추스리고 소설을 쓸 수가 있었다. 주: 타구치 선생이란? 1977년 나는 오하이오주 데이톤시에 있는 원호병원에서 일본인 2세, 제임스 타구치(田口)라는 내과 의사겸 원호병원 내과 과장을 만나게 됨으로 그의 도움으로 나는 절망과 슬픔속에서 제 2의 인생을 개척할 수가 있었기에 나는 그를 은인(恩人)으로 그리고 선생님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도 역시 2차대전중에 미국정부로부터 콜로라도 아마체 일본인 수용소에 3년간 감금되었다가 2차대전이 끝나면서 못다한 내과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보존한 후 한국인을 사랑하는 일본계 미국인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한국계 미국인 의사를 도와 주었으며 아리랑을 좋아 하였기에 우리는 그를 아리선생이라고도 부른다. 나는 그를 만났기에 못다한 내과 전문의사 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나는 제임스 타구치, 아리 선생을 소재로 나의 장편 소설, "아오소라"를 써 출판을 하였으며 일본어로 번역중이다. 5. 내 인생의 차거운 겨울에서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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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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