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결혼의 비밀-제 3

2012.01.22 14:54

연규호 조회 수:956 추천:25

근친결혼의 비밀 마지막 부. 11. 인연 1967년 6월, 브라질로 이민 온지도 어느듯 4년이 되었을 때, 현정운은 웬만한 자동차를 스스로 만질 줄 아는 정비공이 됐으며 가까스레 고등학교 과정도 이수했다. 그리고 상 파울로 단과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말이 상파울로 단과 대학이지 수준도 없는 대학이었다.( 주: 상파울로 대학교는 아주 유명하지만 상파울로 대학은 이름만 그럴싸하지 돈만 주면 졸업장을 주는 보잘 것 없는 단과대학이다.) 작은 아피트에서 기거하며 그동안 착실하게 모은 돈도 꽤 되었기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국으로 가서 부모님을 만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기기에 그는 월급으로 받는 돈은 무조건 저축했으며 먹고 사는 것도 아끼고 절약하였기에 언뜻 보기에는 아주 가난한 남자로 보였다. 어느새 22살이 되었으며 정비소에서 일을 했기에 온 몸이 근육으로 바뀌어 있었다. * 이런 것을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지......... -상파울로 한인 천주교회에서 부탁한 고장 난 밴을 말끔히 고친 정비소에서 특별히 정운에게 전달해주고 오라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정운은 밴을 몰고 천주교로 찾아가 사무실에 들렸다. 거기서 만난 세실리아 박(Cecilia Park)이라는 여인과의 인연은 현정운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 연인들이 되었다. 무조건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에까지 이를 수가 있듯이 세실리아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리고 3년--- 현정운과 세셀리아 박은 상파울로 연합교회 목사, 김영빈 앞에서 결혼하게 됐다. 행복한 결혼이었으며 슬펐던 과거를 모두 잊고 한으로 가득 찻던 가슴에 희망과 즐거움을 가뜩 담고 있었다. 바다에 떠 보낸 옛 남편의 상징인 성경책 대신 사랑의 결실인 두 아들을 갖게 됐다. 그러나---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1977년, 상파울로로 돌아오던 길에 리오데자네이로 근처에서 끔직한 교통사고로 현정운과 세실리아 박 그리고 첫째 아들은 현장에서 즉사를 했으나 행인지 불행인지 둘째 아들은 용케도 살아 리오데자네이로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말세리노 루나(Marcerino Luna)라는 이름으로 6개월을 살고 있던 중, 하늘의 도움으로 이경진씨에 의해 양자로 입양되어 이철진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이경진은 그의 이름을 이철영으로 등록을 했는데 브라질 사람의 실수로 이철진이 되어 이름만 보면 동생으로 오해가 되었으나 이경진씨는 그대로 쓰고 있었다.) * "아- 목사님? 이번에도 긴 설명을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됐군요. 그러나, 그러나, 동생은 결국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군요. 세실리아도........" 소아과 의사, 김정순 씨는 울고 있었다. "내 동생이, 내 동생이, 죽고 말았구나...........구속보다 자유가 그리웠다고 했는데, 진정한 자유란 노예가 되는 것이구나. 노예가 되는 것.... 무조건의 사랑과 위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되는 구나. " 김정순 씨는 흐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김영빈 목사님과 로베르토 현은 슬피 울고 있는 한국에서 온 손님을 그곳에 두고 각자 갈 길로 가버렸다. 슬피 우는 사람은 울만큼 울어야 마음을 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생은 홀로일 뿐 어느 누구도 같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12. 재회 슬픔에서 가까스레 정신을 차린 김정순 씨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죽은 동생과 그의 아내가 되는 세셀리아를 생각해 보았다. 세실리아는 분명 김정순 씨와 같은 나이(同甲)였는데 참으로 운명적으로 태어낫다고 생각하며 위로하는 마음을 품게 됐다. 브라질에서 별빛이 빛나는 밤마다 울었을 그들의 영혼이 오늘 드디어 그녀의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을 갖게 됐다. "이철진은 사위요 아들이요 그리고 조카가 된다. 아니 죽은 동생이다" 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김정순 씨는 사돈에게 전화를 걸어 상.파올로에 와 있음을 알렸다. 깜짝 놀라 달려온 사돈, 이경진 씨 부부는 어쩔줄 몰라 하며 며칠 집에 가서 머물다 가기를 요청했다. 그러고 보니 사돈 이경진 씨와 부인 심은순 씨의 깊은 마음을 존경하게 됐다. 사실, 이들 부부가 아니었으면 이철진이란 청년은 존재 할 수가 없는 법, 결국 말세리노 루나라는 브라질의 이름으로 가난과 멸시 속에서 자랐으리라... 김정순 씨는 넙죽 고개를 숙여 사돈 부부에게 인사를 올리면서 약혼식장에서 얼굴을 붉혔던 무례함을 마음속으로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돈에게 한 가지 부탁했다. "사돈님? 사돈님께서 처음으로 도착했던 리오데자네이로 항구에 저를 한 번 데려다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오데자네이로의 항구에? 왜 하필이면 항구에?" "예.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어디를요?" "이민배가 정착했던 그 부둣가에 ......" "부둣가에?" 사돈부부는 고개를 흔들며 의아해 했다. 다음날 아침, 사돈부부는 김정순 씨를 태우고 리오데자네이로 항구로 달려갔다. 5시간이나 달려간 리오데자네이로는 정말로 인상에 깊은 항구였으며 멀리 뵈는 등대를 기준으로 목사님이 말해준 부두에 도착했다. 잠시 머물러 등대를 바라다보며 기도를 올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기도를 다 하시고...." "예, 이곳이 바로...바로...."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곳이? 바로? 무슨 말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 사돈 부부의 궁금증은 더 깊었으나 알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리오와 상파울로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약 한 시간쯤 달려온 거리에서 그녀는 사돈에게 잠시 차를 세워 주기를 부탁했다. "어디 몸이 불편하시나요? 사돈?" 심은순 씨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예.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서요." "여보! 그러기에 운전을 천천히 하시지, 너무 빨리 달리면 안 돼요!" 심은순 씨는 남편에게 힐책하듯이 말을 했다.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고...."역시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이 근방에서 분명, 동생 정우(정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세실리아와 죽은 큰 조카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정우(정운)야! 그리고 세실리아씨, 고히 잠드소서.' 자동차 밖으로 나온 김정순 씨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척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사돈의 눈에는 역시 기이하게 보였다. 그리고 달려온 상. 파울로의 캄캄한 저녁 불빛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다음날, 전화로 로베르토 현과 김영빈 목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로스앤젤스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긴 비행을 하게 됐다. 비행기속에서 그녀는 죽은 동생을 생각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비행기는 분명 아마존 장글위를 지나고 있는 듯했다. 아무도 거쳐 가지 않은 처녀림에서도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을 했다.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태평양에서도 동생의 목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누나, 나 정우(정운)야. 성공해서 누나를 만나려고 했는데, 그만 이렇게 됐어요. 누나."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정순 씨는 완전히 지쳐 있어 한 발작도 걷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항 청사에서 만난 딸과 사위를 보면서 정신이 번뜩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장모님!" "어-어-어-" 김정순 씨는 어-어 소리만 낼뿐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들에 대한 동정심과 사랑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동생의 아들.....' 그녀는 사위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잊지 못했음은 사위가 되는 그도 그녀의 분신이었기 때문이었다. * 다시 돌아온 강남의 큰 집에서 남편, 딸 그리고 사위의 숨소리가 서로 섞였으며 밤마다 그녀는 보고 온 브라질의 풍광이 아련하게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13. 청산 마침내 김정순 씨는 5년간 미국에 가서 살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침 저녁으로 딸과 사위를 보는 것이 큰 부담이 됐기에 멀리 가서 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반대하던 남편도 집요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왕 사는 한 인생인데 그 소원 못 들어 주겠느냐며 마침내 그렇게 하기로 동의를 하자 김정순 씨는 본격적인 미국이민을 추진했다. 5년간의 세월도 긴 세월이기에 혹시나 해서 미리 신청해 두었던 이민 수속이 예상외로 빨리 순조롭게 허락이 돼 남가주 실비치에 있는 노인 타운인 '레저 월드(Leisure World)'로 오게 되었다. 2006년, 5월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하기 며칠 전, 김정순 씨는 사위 이철진을 특별히 강남에 있는 아담한 그 음식점에서 마주하였다. "어머니? 집에서 얘기해도 되실 텐데 아니 여기 음식점에는?" 사위는 뜻밖의 만남에 의아해 하면서 웃고 있었다. 사실, 미국으로 간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오고 갈 수 있는 상황이니 이별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과 미국, 특히 남가주는 일일 생활권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돈만 있다면........ "어, 미국으로 가기 전에 단둘이 식사를 하고 싶네. 용연이를 잘 부탁한다는 마음으로.." "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요...." "아냐, 꼭 부탁할 말이 있어서....." 둘은 마주 보며 앉았는데 이번에는 더 친근한 마음이 들었으며 얘기 하기도 편했다. 마침내 김정순 씨는 말문을 열었다. "여보게, 자네, 아직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나?" "예? 아버지요? 조금은....아니 그건 왜 또 물어 보시나요?" "어-, 전에 내게 보여준 그 낡은 사진, 아직도 갖고 다니는가 해서 말야." "아, 예, 갖고 다닙니다." "여보게, 그 사진 이젠 안 갖고 다녀도 될 텐데...왜냐고? 이젠 옛 생각에서 벗어나란 말이네.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란 말야." "예." "그래서 말일세, 이젠 여기 나하고 장인을 그 사진 속의 부모로 생각하고 잊으란 말일세." "아, 예....그렇게 하지요." "여보게. 내가 그 사진 좀 잠시 빌려 보고 싶네. 보고 줄 테니까." "예. 그렇게 하시지요." 사위, 이철진은 지갑에서 그 옛날 사진을 꺼내 김정순 씨에게 주면서 말했다. "보시고 돌려주시는 거지요?" "그럼세. 조금 시간이 걸릴걸세. 그 사진을 자세히 보려면 말일세." "........." 사진은 마침내 김정순 씨의 손을 거쳐 핸드백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마치 죽었던 동생 정우를 가슴속에 아니 핸드백 속에 넣고 있다고 느꼈다. '정우야, 정우야!' 너를 이제서야 만나는구나. 이렇게 이렇게......' 마음속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솟고 있는 듯 했다.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마친 후, 김정순 씨는 걸어서 집으로 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치 동생을 만난 것을 축하해 준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왔으나 그녀는 사진에 관한 내용이나 정우에 관한 정보를 식구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정우는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말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녀는 입을 궂게 다물었다. * 2006년 3월, 김정순 씨와 남편은 예정대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이민이라고는 하나 마치 멀리 휴양지로 놀러 가는 느낌이었을 뿐이었다. 일 년에 두 번씩 한국에 놀러 오며 반대로 자식들도 일 년에 한번은 미국으로 부모를 만나러 오기로 계획을 했기에 마음은 한국에 두고 몸만 달랑 간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과연 이민(移民)이란 무엇인가? 오래 살던 곳에서 벗어나 더 많은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마음은 40년 전, 동생이 말없이 도망가듯이 느꼈던 그 심정이나, 불편한 가족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찾아 가는 지금의 심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김정순 씨는 지난날 이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민이란 가난한 사람들이 밥 먹기 위해 조국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민은 모험이요 드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브라질의 경우도 그러했다. * 2006년 3월, 실비치 노인타운으로 이민 온 김정순 씨 부부는 은퇴한 소아과 의사답게 그들의 건강을 책임져줄 인근에 있는 내과 의사를 찾던 중 어떤 친구가 '가데나(Gardena)에 가면 김명수란 내과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이라면 걱정 하지 말아도 된다' 고 귀 뜸을 해주어 주었다. 5월, 햇살이 조금은 따갑고 눈이 부신 오후 나의 진료실로 찾아온 김정순 씨는 나를 보자 대뜸 반가운 얼굴로 "닥터.김, 나 모르겠소? 나"라고 말을 시작했다. 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어느듯 40여 년 전, 의과대학 다닐 때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선배 의사임을 알게 되었다. "저- 선배님? 김---" "그래요. 김정순." "어떻게 여길?" "얼마전에 은퇴하고 여기 실비치로 살려고 왔습니다. 조기 은퇴..." "은퇴를 하시고? 아, 잘 오셨어요." 김정순 선배와 남편 최 선생님의 건겅 상태는 아주 양호했으며 정신 건강도 건전하다고 우선 판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그녀의 과거를 말해 주지 않았기에 돈 많이 벌어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은 미국에서 반년, 꽃피고 선선한 봄과 가을에는 한국에서 반년을 사는 의사부부라고만 생각을 하였다. 의과대학 동창 모임에도 가서 만났으며 지역에서 행해지는 의사 모임에서도 만나곤 했지만 그녀는 그녀의 고민을 말하지 않았다. * 2006년, 그녀는 실비치에 정착하면서 남편과 더불어 알라스카 크루즈에와 한국에 한차례 다녀왔으며 감사주일을 전후해서 한국에서 찾아온 아들과 딸을 나도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동창으로 가끔 만나는 관계일 뿐 다른 큰 감정은 없었는데 어느날 김정순 선배가 내게 뚱딴지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닥터.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기억하는가?" "아, 줄줄이 다 기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요. 왜 묻습니까?" "개업을 접고 보니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얽매이지 않아서 마음이 가볍군요. 그런데...." 그리고 그녀는 말문을 닫았다. 2006년 겨울(12월) 그녀는 브라질에 가서 약 2주간을 보내고 왔다고 내게 말해 주었을 때 나는 단지 부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다보기만 했다. '돈 많은 사람들? 와 부럽구먼.....' 나는 브라질을 생각해 보았다. '삼바 춤이나 추며 축구나 하는 나라.....별 볼일 없는 나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 그리고 2007년을 맞았다. 연초에 정기 검진으로 나를 찾아와 혈액검사, 흉부촬영, 그리고 위 대장 내시경을 하고 갔는데 모든 것이 양호했다. "와 모든 것이 좋군요. 100살은 사시겠습니다. 선배님!" "듣기 좋군요. 후배님." 그리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 갔다. 그 후 듣기로는 한국을 한번 다녀왔으며 브라질에 다시 한 번 가서 그 아름다운 리오데자네이로에 있는 예수님의 동상을 한 번 더 보고 오겠다고 전화를 해 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리오데자네이로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특히 산에서 내려다본 항구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앞에 뵈는 등대와 부두는 절묘한 사진과도 같답니다. 후배님. 그러니 언젠가 진료실 문을 닫고 나하고 같이 브라질에 한번 가봅시다." "아니? 브라질에대해 어찌 그리 관심이 깊습니까?" 나는 언젠가 한번 물어 본 일이 기억에서 났다. "아, 닥터.김? 사실 내 사위가 브라질에서 온 교포랍니다. 브라질 교포. 상 파울로 출신이요." "브라질? 와! 한국의 정 반대쪽에 있는 나라?" "그렇지요. 이게 다 인연이라고요. 그리고 지구는 이젠 바야흐로 글로발 시대랍니다." "언제 같이 가도록 하죠. 부탁합니다." 나는 브라질에 한번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다. 14. 죽음 앞에서. 2007년도 다 저물어 가는 11월, 어느 금요일 아침. 나의 선배, 김정순 씨가 나를 찾아 왔다. "닥터. 김? 조금 시간을 내 주시죠.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그리고 그녀가 내게 던져준 질문은 아주 뜻밖의 일이었다. -얼마 전, 그녀는 브라질에 여행을 갔다가 뜻밖에도 심한 복통을 이르켜 상파울로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암(Pancreatic Cancer)"일지도 모른다는 청천 벽력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브라질 병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며칠에 걸쳐 검사를 했는데 위 장 내시경에는 잡히지 않으나 복부 단층 촬영에서 취장에 꽤 큰 종양이 발견됐다. 그리고 내시경을 통한 취장 촬영에서 역시 확인된 덩어리가 있었다. 불길했으며 섬짖했다. '아-췌장암, 췌장암.' 나는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근래에 체중감소가 심했나요? 소화는 잘 됐구요?" 그녀의 대답은 반반이었으며 마침내 조직검사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병원에 입원해 초음파를 통한 취장 조직 검사를 한 결과 역시 " 악성 췌장암"으로 판명되었을 때 나는 말문을 열어 알려줄 수가 없었으나 용기를 내어 말해 주었다. "아- 췌장암이라고....." 그녀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65세를 갖 넘긴 젊은 나이인데 취장 암이라니.... 수술은 가능한 경우였으나 과연 수술로 인한 생존률이 얼마나 좋을지도 궁금했다. * 암 진단에 대한 선배의 심정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수술이 가능할까?" "예. 위플(Whipple)수술로 취장을 제거 하실 수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나? 그냥 죽으면 안 될까?" "하는데 까지 해야지요. 선배님?" "어짜피 죽는건 데. 췌장암? 다 알잖아요, 생존률도 낮고......키모(Chemotherapy)도 그렇고...." "포기 할 필요는 없지요. 선배님. 증상이 아주 경미하고 간 기능검사도 좋으니까, 게다가 전이도 없고..." "닥터. 김에게 맞기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수술 날자를 잡았다. 수술 날자를 잡은지 며칠 후 그녀는 내게 특별 부탁을 하였다. "닥터.김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수술 전에. 혹시 수술 후에 깨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예? 할 말씀?" 할말 씀이란 다음과 같았다. -"닥터.김, 히포크라테스의 선언을 지켜 주소서. 내가 하는 말은 환자로서의 비밀이니까..의사가 아니라 환자로서의 비밀이니까." "예. 선배님. 잘 알겠습니다." 그녀는 몇차례 망설이다가 나에게 그녀의 가슴 깊숙이 품고 있었던 그 비밀을 말해 주었다. 사진 속에 나온 그 사나이와 브라질로 이민 갔던 동생 김정우의 얘기였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의사인 닥터. 김이요." "........................." 나는 너무나 뜻밖의 고백 앞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닥터.김. 내 비밀을 털어 놓고 보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꼭 내가 간직해야 하는지....일단 들었으니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소. 닥터.김. 아니 후배님."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그 어려운 위플 수술을 성공리에 마칠 수가 있었다. 수술 후 그녀는 경과가 좋아 수술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키모(Chemotherapy)도 여러 차례 받으면서 암과의 투병을 잘하고 있었기에 동료 의사로서 만족했다. * 암과의 투병.... 사실, 인간은 삶이란 투병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예약된 종말을 예기치 못하지만 어짿든 때가 되면 암으로, 중풍으로, 전염병으로 그리고 사고로 죽게 되기는 마찬가지 일뿐.... 암 환자의 경우는 그 경과가 너무 빠르거나 통증이 심해 가엾게 뵈는 것일 뿐 역시 삶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되었다. 췌장암의 경우도 그러했다. 대부분의 환자는 심한 통증으로 인해 마약도 복용하는데 김정순 씨는 정신력이 강한지 생각보다 순한 과정을 격고 있었다. 한 가지 내가 크게 놀란 사실은 죽음 후에 올 천국에 대한 믿음이 강한 신앙심이었다.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인 생수(生水)를 마신 후 영원한 평화를 찾은 것처럼 김정순 씨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한 가지 천국에 대한 소망이 그녀를 이토록 여유 있고 평화롭게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후배인 나는 역시 선배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게 됐다. * 2008년이 되었다. 5년만 미국에서 살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김정순 씨에게는 한해 한해가 아쉽고 안타까운 하루하루였다. 사람의 심장의 박동도 한계가 있는 법이며 수명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김정순 씨에게도 그 한계가 온듯했다. 갑자기 황달이 생기는가 했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울컥 토하였다. 검은 피가 넘어 오면서 췌장암이 재발하였으며 인근 담도와 간에 전이가 된 것을 확인하였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의사도 그리고 환자 자신도 직감하게 됐다. 곧 닥처 올 죽음 앞에서 김정순 씨는 뜻밖에도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 드리는 그 모습이 성스러워 뵈었다. 췌장암이 무서운 것은 나도 잘 알지만 아무런 손도 못쓰고 죽음을 맞아야 하는 환자의 심정은 더 더욱 처참하리라...... 결국 김정순 씨는 자신을 호스피스에 맞겨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어짜피 죽을 인생을 더 이상 힘들이고 싶지 않았는지 한국에서 온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듯했다. 죽음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환자, 김정순 씨의 특별 부탁이 있었다. 보호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배제한 채 의사인 나와 특별한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순 씨의 배(腹部)는 물로 차있어 배가 팽팽하게 몹시 불러 보였으며 다리도 손을 꾹 누르면 1센티 정도 손이 들어 갈 만큼 부어 있었다. 게다가 숨이 찬지 가끔 한숨도 쉬었다. 환자 침대 곁에는 산소 통이 놓여 있었으며 플라스틱 튜부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환자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누가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선배님은 곧 가시는 구나...곧....' 15. 사진 "닥터.김?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어려운 부탁을 하고 가렵니다." "말씀 하십시오." 김정순 씨는 침대 곁에 보관하고 있던 그녀의 지갑에서 아주 낡은 사진을 한 장 꺼내어 나에게 주었는데 언젠가 그녀가 말했던 그 낡은 사진 한 장이었다. 낡고 바랜 흑백 사진을 받아 든 나는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30세정도의 남자와 여성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는데 남자는 긴장한 듯 입을 궂게 다물었으며 여성도 긴장된 얼굴이었다. "내 동생, 김정우와 아내, 세실리아 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 후 아들을 낳고 살다가 리로데자네이로에 갔다가 상.파올로로 돌아 오던 중 고속도로에서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무참히 죽었음을 설명해 주었다. -아름다운 항구, 리오데자네이로의 부둣가와 그 부둣가에 얽힌 얘기를 들려 줄 때 나는 숙연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동남쪽으로 약 한 시간 달려오다가 발생했던 그 교통사고....그리고 홀로 살아 난 두 살짜리 남자 아이가 바로 그의 사위인 이철진이라니... 아니 친 조카라니..... "닥터 김? 이 사진을 잘 부탁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서 처럼.....'나는 환자로부터 받은 비밀을 결코 누설하지 않습니다.'라는 그 선서에 따라....혼자만 알고 계십시오. 부탁입니다." "예. 선배님!" 나는 그 낡은 사진을 내 지갑 속에 잘 보관하였으며 작별 인사를 한 후 병실을 나올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그녀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닥터. 김? 당신의 환자, 김정순씨, 새벽 4시 30분에 운명을 했습니다." 호스피스의 간호원이 의무적으로 나에게 보고를 했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전능하신 하나님, 김정순 님의 고독했던 영혼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갖게 해 주소서. 아멘." * 3일후 그녀의 가족들만이 모여 장례식을 치룬 후 화장을 해 한국으로 갔다고 하는 보고를 들으면서 나는 그녀가 준 사진을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이 사진을 본래의 주인인, 사위에게 돌려 줄까? 아니면 남편에게 줄까? 아니면?' 나는 사진을 어떻게 해야 할른지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 2주후, 죽은 김정순 씨의 화장재가 천안 근교에 있는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음을 확인하면서 웬일인가? 나는 그 낡은 사진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을 했다. 아마도 죽은 누나, 김정순 씨와 동생 김정우 씨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가 드디어 만나 울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남의 사진을 내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도 없다고 생각을 했기에 집에다 보관한 후 언젠가 사위가 되는 이철진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3개월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김정순 씨의 남편은 아내가 죽은 후 실비치의 노인타운의 집을 헐값에 팔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면서 다시는 미국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 모처럼의 기회가 있어 나는 롱비치 바닷가에 간 일이 있었다. 롱비치 항구에서 바라다 본 태평양에 작은 등대가 기능을 잃고 서 있었다. 등대라고 해야 이젠 붉은 지붕위에 우뚝 솟은 관광의 명소가 되었을 뿐, 등대로서의 기능은 전혀 없었다. 밤이 되면 등대 밖에서 비쳐 올려 오는 밝은 불빛이 등대의 기능을 해 주기 때문에 롱비치 항구의 등대는 폐쇄 된지 오래였다. 퀸 메리 호가 정박한 곳에서 본 주위바다에 몇 조각의 종이가 둥둥 떠 있었다. 작은 종이배였으리라.... 종이배- -누가 띄웠을까? 작은 종이배는 가다가 소용돌이에 잡혀 더 가지 못하고 있었다. 두고 온 것이 아직도 그리워서 일까? 마침내 종이배는 파선이 됐는지 갈기갈기 찢긴 종이로 변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떠난 버린 님을 찾지 못해 맴돌고 있는 듯 햇다. 아니면 저기 뵈는 등대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으츠러지게 떠나보낸 애잔한 마음과 그리움을 다시 접어 또 띄어 주고 싶은 마음일까?- * 문득 번뜩 나에게 떠오르는 기발한 생각이 있었기에 나는 다음날, 롱비치 항구에 또 다시 찾아 왔다. 바닷가 등대 주변에 앉아 퀸 메리호 넘어 멀리 바다를 바라다보며 밀려오는 작은 파도가 작은 포말(泡沫)로 변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래, 인간도 저 파도와 같이 밀려오다가 작은 포말로 사라지고.....또 밀려오고 사라지고....' 나는 집에 두었던 그 사진을 다시 가지고 나와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 사진속의 주인공들은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진을 바라다보는 나의 생각은 왜 이다지도 변하고 있는지.... 나는 갖고 온 빈 작은 커피 병을 꺼냈다. 맥스웰 커피 병이었다. 브라질에서 만든 커피일지도 모른다고 레벨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리고 그 사진을 조심스레 커피 병속에 넣고 성냥불을 그어 불을 부쳣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사진은 타기 시작하면서 작으나 붉은 화염이 사그러지더니 흙 갈색의 재로 변하여 통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진 한 장이 타는데 불과 2-3분도 안 걸렸다. 물론 작은 불꽃이니 병도 뜨거워지긴 했으나 터지지 않고 무사히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검은 색에서 점점 회색빛으로 바뀐 종이 재를 몇 번 가볍게 흔들어 주니 작은 재가 더 작은 잿 가루로 변하더니 커피 병 밑에 내려앉았다. 다소 따스하던 커피병도 다시 제 온도가 되었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 온 셈이었다. 나는 커피 병의 뚜껑을 살며시 덮었다. 마침내 사진은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불과 얼마 안 되는 재가 되어 커피병속에 같혀 버렸다. 사진속의 두 주인공의 얼굴들은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다. 사진을 내게 맏겼던 김정순 씨의 얼굴도 내 기억에서 흐려지고 있었다. 순간 나는 눈에서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내 가슴은 더욱 더 북 바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구나. 모두다..." 롱비치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붉은 등대 집에서 나를 향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는 듯했다. -"닥터.김? 감사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디에 가서 편히 쉬지를 못했습니다마는 이제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 주셨습니다." "자유롭게 놓아주다니요? " "그동안 숨 막혔습니다. 이젠 숨통이 트이는군요." 이민선을 탓던 김정우씨와 세실리아 박의 목소리였다. '아-그런데 나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 그까짓 바랜 사진을 태우면서 왜 우는건가? 슬퍼서? 아니면 그들이 불쌍해서?'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 나의 모습을 조명해보니 나도 자유롭지 못했으며 가슴속에 슬픔이 깃들여 있음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더 슬펐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숭고한 사랑의 훈훈함 속에 내가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느끼며 내 가슴속에 그들이 갖고 있던 그 사랑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아-내게도 저런 사랑이 잠시라도 들어와 주기를...' 나는 그들의 사랑을 훔쳐갖고 싶은 마음이었다. 더욱이 사진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선배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마음이 애절했을까? 겉으로 표현도 못하고 바라다본 딸과 사위... "철진아! 너는 내 동생 정우의 아들이여, 그러니 너는 내 핏줄이여. 내 조카여." 이 한마디를 못하고 내게 사진을 전해 주고 간 선배를 생각하니 더 더욱 뜨거운 눈물이 쏫아지고 있었다. 입이 넓고 작은 맥스웰 커피 통에 들은 사진 재를 어찌해야 할지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 바다에 그 재를 뿌려 멀리 보낼까? 아니면 그 재를 사막에 뿌려 바람에 날려 버릴까? 결국 커피 통을 바다에 버리지도 못하고, 아니 사막에 날려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집으로 가지고 와 책상에 놓았다. 커피 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며 한편 마음이 답답했다. "아, 이 커피 통? 소아과 김정순 선배가 준 사진인데, 참으로 사연이 깊어."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으나 의사이기에 비밀을 말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의사이기에 말 못하고 주저주저해야 하는 비밀이 있기 마련인데, 그 일로 인해 오히려 엉뚱한 의심을 받는다면 의사가 된 것이 죄인이 될 뿐이다. * 그리고 몇 개월이 바람개비 돌듯이 훌쩍 지나고 보니, 이젠 맥스웰 커피 통에대한 안타까움도 잊을 때가 얼추 된 듯 했는데 어느 날 이 커피 통을 무심코 바라보면서 브라질에 가고 싶은 충동감이 생겼다. "한번, 브라질에 가보고 싶은데 당신도 같이 가겠소?" "뭐라고요? 브라질에? 아니 브라질은 왜 가려고......" 아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투덜 대었다. "여보, 브라질은 정말 볼 것이 많은 나라라고 해서...자, 갑시다. 아니면 나 혼자라도 갈테니...." "혼자? 그럼 같이 갑시다." 아내는 마지못해 허락을 하였다. 마침내 나는 11월 어느 날,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를 아내와 같이 동반하여 탑승했다. 동상이몽으로 나는 몇 군데 꼭 들릴 곳이 있는데 반해 아내는 브라질 관광으로 이과수 폭포등을 반드시 보겠노라고 벼르고 있었다. 로스앤젤스를 떠난 비행기는 상파울로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스케쥴에 따라 관광을 하게 됐는데 나는 리오데자네이로에서 특별히 나의 시간을 내겠다고 직원에게 요청하니 하루를 주겠다고 했다.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가 볼 병원이 있으니 당신은 관광으로 따라 다녀, 여보." 나는 아내에게 부탁을 하였던바 아내는 "그렇다면 나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당신을 따라 다니겠어'라고 말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할 수없이 아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리오데자네이로 항구와 등대가 뵈는 부두가로 찾아 갔다. "아니, 여보 병원에 간다면서 하필이면 부두를 찾아 간단 말요?"아내는 내가 조금 돈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멀리 바다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마치 죽은 곽 대위가 보이는 듯했으며 그곳에 버렸다는 성경책이 뵈는듯했다. 아내는 나의 행동이 못 마땅한지 입을 실쭉이더니 잠시 한 눈을 파고 있었다. 잠시 아내가 방심하여 틈을 비운사이에 나는 숨겨 가지고 온 맥스웰 커피 병을 멀리 바다를 향해 힘껏 던지면서 죽은 김정우와 세실리아의 영혼을 위로 하고 있었다. 맥스웰 커피 병은 잠시 물 위 아래로 출렁이더니 이내 바다 속으로 묻혀 들어가고 말았다. "당신 무엇을 던지는 것 같던데 뭐지?" 아내는 아마도 흘낏 내가 던지는 모습을 본 듯했다. "아, 작은 돌이 있길래 한번 던졌어...." "작은 돌을? 내가 보기엔 꽤 큰 물건이던데...." "어, 꽤 큰 돌이었어." "그래요?" 서둘러 우리는 다시 시내로 나와 예정된 곳에서 관광팀을 다시 만나게 됐다. 일행을 만나게 되니 반가웠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브라질이라고 해도 남의 나라에서 보는 타인종은 친금감과 아울러 두려움도 같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가까워 오면서 관광 뻐스는 리오를 빠저나와 상 파울로로 가는 고속도로(101번)를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약 한시간정도 달려갔을 때 나는 관광 안내원에게 잠시만 뻐스를 세월 줄 것을 요구했다. '노바이가쿠아'라고 쓴 안내판으로 보아 어렴프시 이 근처에서 현정운(아니, 김정우)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급한 일이라니요?"안내원이 의아한 듯이 내게 물었다. "예,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 같아 잠시 밖에 나가 심호흡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자, 그럼 잠시만 나갔다 오세요." 친절한 운전사는 관광 뻐스를 잠시 고속도로 주변에 세워 주었기에 뻐스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하는 체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여기에서 숨진 현정운(김정우),세실리아 박,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소서. 나의 동생이요, 나의 조카가 됩니다." 얼마후, 나는 속히 올라오라는 안내원의 신경질이 섞인 듯한 요구에 따라 급히 뻐스로 올라왔다. "아니, 여보, 어디가 그렇게 아프길래?" 아내가 내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 조금 어지러워서...." 상파울로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나는 비릿내가 나는 부두에서 철석거리며 닥아 오는 파도를 향해 힘껏 내던진 맥스웰 커피 통과 그 속에 들은 사진 재를 생각해 보았다. 35년 전, 청년 김정우에 의해 던져진 낡은 성경책과 그 속에 담긴 마른 풀, 잎새 그리고 나뭇잎이 내가 오늘 던진 사진 재와 물속에서 만나 하나로 뭉뚱그려지리라고 생각을 하니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고 다시 만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역시 마음속에 가득찬 슬픈 과거를 버리고 한스러운 슬픔을 내려놓는 것이 평안을 찾는 지름길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나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그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다 볼 때 긍휼한 마음이 솟아남을 느끼게 됐다. 김정순 선배가 내게 준 그 비밀의 사연을 리오데자네이로의 파도 속에 던져주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나 자신도 환자로부터 얻은 곤욕스러운 비밀이라는 감옥 속에서 풀려나 훨훨 날아 갈 듯한 자유를 마음껏 느끼면서 상 파울로를 떠난 비행기 속에서 나는 마침내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소설 끝. 주: 이 소설은 나의 절친한 친구, 고 황익주가 내게 죽기 전( 2011년 2월 8일, 췌장암으로 사망함)에 주었던 소재를 근거로 쓴 소설이다. 익주는 나의 한 팔과 같은 친구였기에 그의 죽음은 나에게 여러 가지의 의미를 주었다. 첫째, 친구의 그리움이 너무나 크다. 둘째: 나도 익주처럼 내게 죽음이 오면 담담하게 하나님에게 찾아가리라는 신앙심을 더해 주었다. 셋째: 그는 종교적이며 윤리적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느낀다. 넷째: 익주의 그늘 속에 그가 좋아했던 아리랑이 있다. 그리고 슬펐던 과거가 현재의 사랑으로 익어 앞으로 올 미래에는 밝은 햇볕이 되리라고 확신하며 이 소설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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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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