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가 사랑한 몽골의 여인들 파트 3

2012.01.25 13:19

연규호 조회 수:137 추천:23

고비사막 위를 비행하던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어느 듯 몽골의 수도 우란 바톨 공항에 가까이 왔는지 안전 벨트를 매라고 하는 안내 방송이 기내에서 흘러 나왔다. 나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던 하이디도 그 방송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 바로 앉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는지 비행기 날개 접는 금속성 소리가 가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우란 바톨 공항에 도착하면 우리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모교인 A의과 대학에서 우란 바톨 의과대학 병원에 파견한 나의 후배 의사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곳에서 이틀을 보내고 남동쪽의 다르 항에 있는 선교단체 교회에 가서 역시 이틀, 카라코름에서 한인교회를 둘러보는 것이 나와 하이디의 계획이었다. * 우리가 몽골로 가게 된 것은 정말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 5년 전 나의 친구, 닥터 기가 신장암으로 죽고 난지 불과 몇 개월 만에 하이디는 불야불야 재산을 정리하고 받은 생명보험금을 갖고는 그녀의 옛 고향, 뉴욕 주 마운트 버논으로 딸을 데리고 갔다. 그녀는 모든 것이 황망하였으며, 하늘이 꺼지는 듯 하였다. 20년을 같이 살아 온 남편의 죽음은 마치 모든 것을 잊은 것과 같았다. 고등학교와 대학 친구들이 생각했던 선입관을 가진 소문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녀는 옛집으로 돌아 온 후 우울증만 더욱 생겨났다. 자동차를 몰고 허드슨 강을 따라 올라가 타판지 다리(Tappanzi Br)를 건너 뉴 저지와 펜실바니아로 달려 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곧장 북쪽으로 달려가 웨스트 포인트에 가서 멍하니 육사 생도들의 분열과 제식 훈련 등을 바라다 보기도 하였다. 때로는 뉴욕 만하탄으로 달려 가 지저분한 차이나 타운까지 걸어 보기도 하였다. 내친김에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다 보기도 하며, 쌍둥이 빌딩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기도 하였다. 그녀와 남편은 가톨릭교 신자였지만 그녀는 개신교 교회에도 가 보고 뉴욕 5번 가에 있는 장로교 교회당에도 가 보았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있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갖고 있는 많은 돈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친정 식구들은 남편을 잃은 딸을 진정으로 위로를 하였다. 그리고 상처(喪妻)하고 혼자 살고 있는 옛 백인 친구를 소개받아 데이트도 하였지만 그 친구도 많이 변해 있었다. 더욱이 그녀가 많은 돈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의도적으로 결혼을 하고자 하였다. 사랑이 없는 목적을 위한 성관계도 그러했다. 마치 동물의 만남과 같았다. 역겨웠다.- 하이디는 이런 생활 속에서 가끔은 무엇이 참 인생인가? 무엇을 하여야 보람을 느낄 수가 있는지를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이디는 문득 잊고 살았던 '아나하임의 마취과 의사 강석호'가 생각이 났다. -강석호, 나를 생각해 보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자기를 은근히 흠모하며,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뿐인가, 남편의 장례 후, 그녀에게 하소연하던 나의 음성이 기억에 났던 모양이다. '하이디!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꼭 뉴욕으로 가야만 하나요? 가지 말고 여기에서 나와 같이 살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묻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 졌다는 말이었다. * 하이디는 자신이 없었다. 그토록 닥터 강을 박정하게 대했는데,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그러나 하이디는 문득 나와 같이 얘기하던 중 나에게서 들었던 몽골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떠 올랐다. '아니? 하필이면 왜 몽골 사람들이 생각 났을까?' 우연의 일치라고 할까? 하이디는 어느 날, 뉴욕의 퀸즈에 있는 한국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을 하였다. 남편이 한국 사람이었기에 한번 한국 사람들의 모임에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뜻밖의 변화였다. 옛날에는 한국 사람들의 사회에 끼어 들고 싶지가 않았는데, 퀸즈 한인교회에서 주관하는,「세계 복음화 운동」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런 종류의 모임이 있었지만 하이디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세미나는 인도네시아, 러시아, 칼미키아, 우즈베키스탄, 몽골에 대한 선교 보고였다. 그 중 특별히 하이디에게 인상 깊은 것은 몽골 선교였다. '몽골? 몽골? 그렇다면 남편과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요, 항가리 사람인 나도 몽골의 피를 갖고 있다면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모임은 하이디에게 크나 큰 자극과 도전을 주었다. 더욱이 죽은 남편이 세 번씩이나 몽골에 다녀왔던 것에 대해 이제서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부터 이곳 뉴욕에 있는 한국의 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중국, 만주, 몽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중미, 남미, 러시아, 터키를 비롯한 회교권 국가들을 상대로 기독교 선교를 하고 있었다.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자'라고 하는 구호를 외치며, 많은 구호품과 금전도 뫃으고 있었다. 하이디는 갑자기 자기가 갖고 있는 많은 돈을 기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며, 그녀는 좀더 구체적으로 선교에 참여하는 길을 알고 싶었다. 그녀가 알아 낸 정보에 의하면 죽은 남편의 모교인 A의과 대학에서 파견한 의사들이 몽골의 우란 바톨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남편의 모교에서 보낸 의사들이 몽골에 있다. 갑자기 그곳에 가 보고 싶었다. * 그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이런 순수한 열정에서 였는지는 모르나 편지를 받은 나의 해석은 엄청나게 달랐다. '멀리 뉴욕에 가서 살다가 아마도 많은 백인 남자들에게 돈을 사기 당하여 잃고 보니, 옛 애인이 생각이 났으리라. 더욱이 강석호처럼 만만한 상대가 또 있을까? 그러기에 나에게 유혹의 추파를 던지는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55살의 나이라면 이젠 서산으로 지는 석양이련만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나의 사랑하던 옛 애인들은 다 제 짝을 만나 결혼을 해서 살고 있는데, 나만 홀로 이렇게 아나하임 힐의 큰 집에서 찬밥이나 먹으며, 혼자 살고 있단 말인가?' '이번에 하이디를 만나면 좀더 적극적으로 결혼을 하자고 우겨보자. 비록 친구의 아내이긴 했지만 어짜피 나는 나의 친구의 뒤나 밟으며, 지나가는 스페어 타이어와 같았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답장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하이디! 드디어 당신을 다시 보게 된다고 하니 내 마음이 설래는군요! 5년 전 뉴욕으로 간 후, 나는 당신을 잊으려고 노력을 하였지요. 그러나 나는 아직도 당신을 내 마음속에 품고 살고 있습니다. 혹시 하이디, 당신이 백인 남성의 친구와 훌쩍 어디로 가 버리지나 않았을까, 비록 당신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걱정하였으며, 또한 당신이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곤 하였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한가지 고백을 하고 싶은 것은 당신의 남편이며, 나의 친구인 닥터 기가 죽기 얼마 전 당신을 나에게 부탁하였답니다. '석호야! 나 죽으면 하이디는 혼자 살아 가기가 힘들거야. 그러니 그녀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어야만 하니. 부탁한다. 석호야! 너 하이디를 돌보아 주기 바란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하이디와 결혼하여 가정을 갖거라. 부탁한다. 석호야!' 사실, 당신의 남편인 닥터 기가 내게 한 이 말을 당신에게 꼭 했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이디! 캘리포니아로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옛날처럼 우리 같이 살아요. 아나하임에서 강석호 드림.〕- * 하이디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난 후, 나는 얼마 동안 후회를 하였다. 마치 어린애가 과자를 달라고 조르는 것 같은 너무나도 유치한 글이라고, 아니 바보같은 짖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나의 바보 같았던 과거를 말하여만 할 것 같다. 1975년 외과 수술 중 일어난 실수로 인해 나의 친구, 기성환이 뉴욕 주 마운트 버논 병원에서 외과 과정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버지니아 주 노훠크에 있는 해군병원으로 가고 난 후, 나는 말 못할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나의 친구를 위해 제대로 변명도 못하고 바보처럼 나만 혼자 살자고 침묵을 지킨 나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에 거지 같았던 고아인 나에게 등록금을 내준 것은 물론이요, 그의 여동생, 성혜까지도 부탁한 그런 친구였는데, 나는 배반자요, 비겁자였다고 한탄을 하였다. 어쨌든 나의 친구는 낙망과 좌절을 맞보면서 뉴욕에서 사라져 버렸으며,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1년 반 후였다. "석호야! 나, 캘리포니아 산 디에고에 있는 해군 기지에 있어. 가끔 캠프 펜델톤에 있는 해병대 기지에도 파견 나가곤 하지. 석호야! 내가 미국에 와서 해군, 해병대 군의관이 될 줄은 꿈엔들 알았겠니! 그리고 아- 석호야! 나, 하이디와 결혼을 했어. 결혼식에 너를 초청하지 않아 미안하구나!" '결혼을? 하이디? 하이디와?' 나는 얼떨결에 우물거렸다. 물론 예상은 했었지만 동양 사람, 성환과 백인 여성, 하이디와의 결혼은 나에게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했듯이 그녀는 성환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단념하였는데,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녀를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1년 후, 나는 마취과 수련을 끝마치고 4년간 몸담아 살았던 마운트 버논 병원에서 마취과 스텝으로 취직이 되었다. 그 해 전문의사 시험에도 합격하여 '미국 마취과 전문의사'가 되었으며, 결국 나의 험난한 인생도 이젠 안정이 되었다. -해방되기 6개월 전에 태어나 6.25를 겪으며, 고아가 되었다. 청량리 역 정거장 뒷편에 있는 판자집 촌에서 거지처럼 살았지만 운이 좋게도 나는 청량리에서 유명한 기성환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33살에 드디어 미국 마취과 의사가 되었다.- 마취과 의사의 생활은 마치 수련 의사처럼 의외로 바뻣다. 그리고 연봉이 엄청나게 많았고, 기분도 좋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토록 큰 돈을 매달매달 받을 줄은 나도 몰랐다. 돈이 생기게 되어 마운트 버논과 이웃한 용커스(Yonkers)에 작은 집을 사들이게 되었다. 용커스의 집은 허드슨 강가에 있어 운치가 있었다. 만하탄을 거쳐 와싱톤 다리를 넘어 온 가지 각색의 크고 작은 배들을 바라다 보노라면, 역시 뉴욕의 허드슨 강이 왜 이토록 유명한 가를 알만도 하였다.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이 맞은편 뉴 저지에 있는 작은 산으로 넘어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고향 생각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서운한 것은 용커스에는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동양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라고는 '통일교의 문선명과 박보희'가 이웃에 산다고 했지만 나처럼 바보같은 한국 사람하고는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그 뿐인가, 나도 굳이 그들과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시간이 나면 나는 한국 사람들을 찾아 뉴욕으로 나가곤 하였다. 나처럼 생기고 한국말하는 한국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회에는 빠짐없이 찾아갔으며, 심지어는 한국에서 온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러 만하탄 53가에 있는 삼복 나이트클럽에도 찾아갔다. 너무나 외로웠다. 1천만이 넘는 뉴욕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몇 명 되지를 않았으며, 설령 안다고 해도 모든 것이 사무적일 뿐이었다. 아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외딴 섬에 혼자 버려진 외로운 존재였다. 그렇다고 학구적인 사람으로 연구를 하여 논문이라도 발표를 한다면 몰라도 그것도 아니니, 차라리 마취약인 에텔이나 후로탄을 내가 마시고 깊이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란 존재는 무용의 존재였기에 외로움증, 아니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밤마다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였으며, 수면제를 복용하여야만 잠이 왔다. 그리고 먼 한국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몇년 전 미국으로 오던 그 날, 나는 몇 번이고 다짐을 했었다. '부조리가 가득한 한국! 결코 나는 찾지 않으리라! 생각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뉴욕에 내 던져진 나는 뜻밖에도 '지겹게도 힘들게 살았던 한국, 특히 청량리 로타리와 정거장 뒤편에 있었던 지저분한 골목 길'이 더더욱 그리웠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살았던 옥녀가 보고 싶었다. '옥녀! 나는 몇 번이고 소리내어 불러 보았다. 가난하게 인생 밑바닥을 살고 있는 옥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남들처럼 아니, 성환의 동생, 성혜처럼 대학에도 못가고 그녀는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음식점에서 일도 하였으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나이트 클럽에도 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만나 주지도 않았으며, 나 또한 그녀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는 격이 맞지 않는 불쌍한 아가씨였다. 어쩌다가 만나도 옛날처럼 반기지도 않았었다. 옥녀! 그녀에게 있어서의 첫 남자는 '석호 오빠'라고 그녀가 말한 적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 옥녀는 처음의 여자였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는 잊혀진 여자였다. 내 나이 23살에 의과대학 3학년이 되던 봄이었다. 그러나 봄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나는 기성환의 아버지로부터 장학금조로 등록금을 받아 왔었다. '성환이 아버지? 한번만 더 도와 주세요? 한번만 더…'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1년간 휴학을 하리라고 결심을 하고는 청량리 로터리를 힘없이 혼자 걷고 있을 때가 3월 초라고는 해도 밤 공기가 차거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보니 세상이 더 차거워 지면서 성혜와 옥녀에게서 받았던 그런 따뜻한 인간의 체온이 그리웠다. 정거장을 가로 건너 집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나의 앞길을 막는 여자가 있었다. 향수와 화장품 냄새가 나의 코를 콱 쏘았다. "총각! 예쁜 색시가 있어요, 예쁜 색시가!" "뭐라고? 예쁜 색시?" 나는 힘없이 말했다. "그래요, 예쁜 색시! 재미 좀 보고 가세요. 예?" 그녀는 전농동 588의 창녀였다. 그리고 나의 손을 잡아 끌고 있었다. 아-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옥녀처럼 예쁘고 가련했다. 아니, 성혜처럼 우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한 창녀였다. "아가씨? 나 돈 없어 돈! 학비도 없어, 학비도!" "……" "돈 없어도 좋아. 나를 한번만 않아 주겠어? 한 번만?" "한번만 않아 달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 그래. 한 번만…" "……" 나는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이 여자의 얼굴에서 나는 외로움을 읽고 있었다. 아니, 나는 옥녀의 얼굴을 느끼고 있었다. "옥녀? 옥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 옥녀, 옥녀? 그런 여자 여기 없어요. 내 이름은 순영이라고!" "순영? 예쁜 이름이군!" 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 어둠컴컴한 방으로 안내 되었다. 분위기를 돋구려고 그런지는 모르나 얼굴이나 겨우 보이는 듯한 희미한 불빛에 짙은 향수 냄새가 나의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녀는 20살이 갓 넘은 듯한 처녀인데, 꼭 옥녀를 바라다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이 순간만 그랬다는 말이다. 나는 그녀를 마음껏 안아주면서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이유로 여기에 들어 와 이 짓을 하고 있어요?" "당신 같이 멋있는 남자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아- 아- 순영? 그런게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알아요. 보아하니 당신도 가난한 학생같군요. 그렇죠? 나도 가난합니다. 나의 동생 학비를 만들려고 그래?" 그리고 순영은 한숨을 쉬었다. "학비를? 학비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학비를 못 구해 속상해 이곳을 찾은 나에게 또 다른 사람도 역시 학비가 없어 몸을 팔고 있다니, 나보다 못한 사람도 있구나!' "아가씨? 미안합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 뿐인데, 이것이라도 학비로 보태 쓰시오." "아니? 그냥 가지고 가세요. 나는 웬일인지 당신이 마치 오빠같아 좋아했을 뿐이야!" "오빠?" 나는 마치 뒷퉁수를 맞은 듯 했다. 나는 시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다시피 던져 놓고는 음침한 방을 뛰쳐 밖으로 나왔다. 순간 나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허무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남자의 욕구를 잠시 풀고 만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애인, 성혜와 옥녀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덮쳐오고 있었다. 애정이 없는 성 행위는 단지 남성의 성적 욕구나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동물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동생을 위해 몸을 파는 여인이있는가 하면 바보처럼 그 음산한 굴로 들어가는 멍청이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성환이가 살고 있는 저택을 뒤로 하고 꼬불꼬불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학교에 내어야 할 등록금을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등록금을 2주 내에 완납을 하라고 하는 고지서를 들고 보니, 정부 대여 장학금은 절반만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다. 갖고 있는 돈을 몽땅 계산해 봐도 60만원이 더 필요했다. 2주 내에는 불가능했다. '성환이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 볼까?' 나는 불현듯 가던 길을 되돌려 성환의 집 앞에 가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짚차가 성환의 집 앞에 멈추면서 성환의 어머니와 성혜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마! 석호 오빠 아냐? 석호 오빠!" 성혜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다 말로 나를 보고 큰 소리로 불렀다. "응! 그래, 성혜구나!"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오빠, 들어 가?" 하면서 나를 그녀가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거실에 앉아서 심각한 얼굴로 말 문을 열었다. "사실, 등록금이 부족해서 찾아왔습니다. 60만원이 더 있어야 등록을 할 수 있는데…" 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자초지총을 말하였다. "이번에도 등록금이 모자란다고? 석호야! 너는 의사가 될 팔자가 아닌 거야. 그러니 차라리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직장을 구하거라." 성혜의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옆에 있던 성혜가 말을 받았다. "그래? 나는 의사가 될 팔자가 아닌 거야. 그런데, 지금까지 의사 공부를 해 온게 맞아!"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본과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었지만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외삼촌에게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겠다고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잠을 잤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60만원도 문제였지만 성환이 어머니가 더 미웠다. 마치 나는 의사가 될 자격도 없다고 말한 것이 더욱 원통하였다. '사창가의 순영이만도 못한 돈만 아는 욕심 많은 여자가 아닐까!' 그렇다고 현실이 그런데, 성환의 어머니를 욕할 수도 없었다. 의과 대학에 들어 간 것만 해도 대견했으며, 여러 차례 입학금과 등록금을 성환의 아버지로부터 받아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만 해도 고마웠다. '안되면 1년간 휴학을 하자, 휴학을! 돈 없는 것이 무슨 죄가 되나!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을 마련하자.' 나는 이런 결론을 짖고는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리고 거의 2주일이 지났다. 업친데 겹친 격으로 정부 대여 장학금도 생각했던 것보다 적게 준다는 통지를 받았다. 결국 60만원이 아니라, 100만원이 더 필요하게 된 셈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1년간 휴학을 하고자 결심을 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가서 휴학 수속을 하고자 용지를 받아 들고 보니 너무나 허망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뜸했던 교회당이라도 가서 기도라도 해 보려고 집 밖으로 나와 걷다 보니, 엉뚱하게도 나의 오랜 친구, 김종일의 집 근처를 가고 있었다. 김종일은 집에 없었고, 그의 어머니만 혼자 계셨다. "석호 아냐? 웬일이니, 너가 우리 집을…" 종일의 어머니가 나를 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웬 한숨을 쉬십니까?" 라고 나는 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늘 그랬다. 아들인 종일은 어머니에게 늘 문제만을 갖다 주는 불량아였다. 종일은 그동안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겨우 마치고 불량배들과 어울려 이곳 저곳에 가서 사기도 치며, 공갈도 치는 깡패였다. "그래서 겨우겨우 달래어 군대에 보냈더니, 제대 후 그놈이 사람 되었는지 공사장을 찾아 다니며 일을 하다가 2개월 전에 건설회사에 입사하여 사우디로 돈을 벌러 갔다." 라고 그녀는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사우디로요?" 나는 물었다. "그래, 석호야! 너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의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나마도 마음 잡고 사우디에 갔으니 내 마음이 놓이는고나!"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종일을 만나지 못함을 후회하였다. 결국 나는 이익이 되지도 않는 종일보다는 학비도 도와주고 차 값이라도 보태주는 기성환에게 보다 더 치우쳐 살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찬밥에 기름을 넣고 데운 비빔밥을 얻어 먹고 집을 나오면서 나는 친구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옥녀는?" "응! 옥녀? 그년 요즘 로타리에 있는 맥주 집에서 일한다. 맥주 집에서…" "예? 맥주집에서요?" 하면서 나는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나의 발걸음은 로타리에 있는 맥주집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옥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늘 나를 보면 웃으면서 대해 주면서 어리광을 부리곤 해서 나는 마음에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편안했다. 그 뿐인가, 그녀는 내가 남자로 태어나 처음으로 포옹을 했으며, 성 본능의 첫 경험을 느껴 본 여자가 아닌가!- * 말이 맥주집이지 나이트 클럽으로 요란한 음악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괴성을 울리고 있었으며, 그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컴컴한 구석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포옹하고 있는 남녀도 있었다. 나를 알아 본 옥녀는 깜짝 놀라면서 내게 달려왔다. "석호 오빠? 여긴 웬일이야?" 술과 화장품 냄새가 나의 코를 찔렀다. "어- 그냥, 널 보러 왔지! 너를…" "나를? 오빠가 나를…" 그녀는 나를 빈 구석방으로 안내했다. 그 후 나는 어떻게 그녀와 시간을 보냈는지, 무슨 얘기를 하였는지도 모를만큼 술에 취해 있었으나, 우리의 즐거웠던 기억은 희미하게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그녀는 아침에 어찌된 셈인지 내게 뜻밖의 질문을 해 왔다. "석호 오빠! 꼭 성공해서 의사가 돼야 해. 그리고 우리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도 해 줘야지. 석호 오빠는 우리들의 희망이야, 희망! 알겠어?" "……" 나는 대답을 못했다. 나는 등록금이 없어서 의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실토할까 하다가 가난한 옥녀에게 하고 싶지가 않아 말을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옥녀가 내게 말했다. "석호 오빠? 등록금 냈어! 등록금을?" "……" 나는 깜짝 놀라서 뜻밖의 질문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등록금을 못내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안냈구나? 석호 오빠?" "아니!" 웬 일일까, 나의 입에서 '아니'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고 말았다. "그랬구나! 석호 오빠?" 그녀는 마치 나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게 그녀는 나의 집으로 찾아와 내게 두툼한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석호 오빠? 이거 오빠에게 주는 거야. 그러니 등록하고 꼭 의사가 되어야 해!" "아니, 돈을?" "그래, 오빠! 부담은 갖지마. 오빠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을테니, 그냥 주는 돈이야, 그냥!" "그냥?" "그렇다니까! 오빠는 이미 많은 것을 내게 주었잖아. 모든 것을…" "……" 그리고 옥녀는 돈 봉투를 방에 그대로 두고 급히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옥녀야! 이거 가지고 가! 가지고 가라고!" 나는 소리를 치면서 그녀를 따라 갔지만 이미 골목 밖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놀라웠다. 그녀가 내게 준 돈을 보니, 120만원이었다. 한 학기 등록금 전액이었다. -맥주집에서 받는 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옥녀에게나 나에게는 큰 돈이었다. '588창녀촌'에 있는 아가씨가 한 번에 받는 화대가 2만원이었으니, 60명의 남성을 상대해야 하는 거금이었다. 60명의 남자와! 60명의 남자와!- "옥녀야, 옥녀! 고맙구나. 고마워!" 허공에 대고 부르짓는 것이 고작 나의 대답이었다. * 2년 후, 의과대학을 졸업한 나는 군의관이 되어 강원도 원통 골로 가면서 옥녀를 만난 일이 기억에서 난다. 그녀도 이젠 22살의 세련된 처녀였다. 맥주집에서 일하던 그녀가 이젠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전환이 되었다고 했다. 원통 골로 가기 전날 밤,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양주, '시바스 리갈'을 그녀와 나는 별도로 만나 같이 한 병을 비웠다. 나는 몽롱했다. 그녀는 내게 한가지 청을 하였다. '등록금을 받은 내가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석호 오빠? 몸 건강하라고요, 몸 건강을? 그리고 오빠, 딱 한번만 나를 안아주면 안 될까?" 그랬다. 딱 한번만 안아 달라고, 포옹해 달라고 애걸을 하는 그녀를 안아 주웠다. 그리고 나는 강원도 원통 골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2년, 3년… 나는 육군에서 제대를 하고 청량리로 돌아 왔다. * 내가 생각을 해 보아도 나는 멍청한 의사였다. 남들처럼 박력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큰 꿈을 가진 것도 없었다. 단지 세월이 가기에 나이를 먹었으며, 그래도 머리가 영리하기에 의사가 되었을 뿐이었다. 제대를 하고 돌아 왔지만 나에게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가지 마음 아픈 것은 나의 친구, 기성환과 그의 동생, 성혜가 한결같이 미국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성혜와는 의과대학 졸업 후, 잠시 결혼 얘기가 나왔지만 워낙 상대가 안되는 열악한 나의 집안 조건으로 인해 그의 어머니로부터 나는 무안만 당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나와 성혜는 잠시 혼담의 말이 오고 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로부터가 아니고 나의 친구가 그의 어머니에게 잠시 마음을 떠 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머니? 석호가 드디어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알다시피 석호는 강인한 녀석입니다. 게다가 성품도 좋고 집이 가난한 것 뿐이지 머리도 영리합니다. 내 생각에는 성혜와 짝지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머니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어머니의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아니, 평소에 그랬듯이 일언지하에 반대였다. "안돼! 거러지같은 놈하고는 안되지?" "예? 거러지같다고요?" 나는 너무나 역겨워 되 물었다. 결국 나는 그 독설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으며,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무조건 미워졌고 싫어 졌다. * 결국, 나는 두 번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스럽고 역겨웠던 한국을 떠나오게 되었다. 그래도 한국을 떠나기 얼마 전 나는 나에게 등록금을 대 주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옥녀를 만났다. 옥녀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많은 남자들과 연애도 했고, 한 남자와 동거도 하였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나이트 클럽에서 춤도 추고, 때로는 돈 많은 남자를 유혹하는 '그런 여자'라고 했다. 과연 옥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성적으로도 매력적이며, 얼굴의 화장도 짙었다. -미국으로 가기 며칠 전, 나는 역시 와인도 마시며, 이번에는 호텔이 딸린 고급 레스트랑에서 그녀를 따로 만났는데, 그녀는 울고 있었다. "석호 오빠? 이제 미국으로 가면 영원히 오지 않겠지?" "그래, 옥녀아! 난 한국이 지긋 지긋해. 한국 사람이라는 것도 모두 잊고 싶어!" "그렇겠지. 오빠는 너무나 가난해서 많은 차별을 받고 살았으니까!" "……" "미국에 가면 성혜같은 여자와 결혼을 하겠지? 그리고 많이 배운 여자, 돈 많은 여자와 결혼을…" "……" 나는 너무나 당혹했다. 옥녀에게도 돈 많고 많이 배운 동갑의 친구, 성혜에 대한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옥녀야! 성혜는 이미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갔다." 나는 겨우 변명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렇지만 오빠는 성혜를 좋아했어. 그리고 나보다는 성혜와 어울렸잖아?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이미 버린 몸이니까. 버린 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옥녀야!" 나는 큰 소리로 말을 하였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여자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질투가 있는 법이며, 남자에 대한 집념은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그랬다. 집념이라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옥녀에게도 집념은 있었다. 미국으로 가던, 어디로 가던 그녀는 나를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훌륭한 의사가 되어 언젠가 옥녀를 찾아 주기를 바란다고 말을 하였다. 옥녀는 어느 누구인지는 모르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결혼을 하여 아이도 낳고 살면서도 석호 오빠를 가슴속에 묻고 잘 살겠노라고 했다. 술에 취한 나는 그날 저녁 역시 폭신한 침대에서 옥녀를 마음껏 밤이 새도록 안아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바보같이 옥녀도, 성혜도 모두 포기하고, 아니 모두 다 잊어버리고 나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아직도 나는 그녀와의 그날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미국으로 와 몇 년이 된 후, 나의 친구, 기성환이 마저 멀리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미칠 것만 같았었다. 첫째는 그의 결백을 내가 증명해 주지 못해 그는 어처구니 없이 나 때문에 병원에서 쫒겨 난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으며, 또 하나는 그의 애인인 하이디를 보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미국에 와 있는 동안 성혜가 뉴욕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건설회사 사장의 아들인 남편이 이곳에 지사장으로 와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한국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가 있었다. 문득, 나는 성혜를 생각해 보며,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감히 그녀를 찾으려고 하지 못했다. 그것은 나보다 돈도 많고, 성공한 그녀의 남편과 만나는 것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돈 많고 학벌 좋은 건설회사 사장의 아들에 비해 비록 마취과 의사이기는 하지만 나는 초라한 존재였으며, 혹시라도 성혜의 어머니를 만난다면 더욱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성혜도 역시 개인적으로 성공을 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열리는 한국 화가의 단체전 및 개인전에 곧잘 '화백(畵伯) 기성혜'라고 쓴 안내의 글을 읽을 수가 있었으니까. '화가, 기성혜 개인전'이 뉴욕에 있는 화랑에서 열린다고 하는 뉴스를 듣고 나는 그곳으로 간 적이 있었다.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담한 화랑이었다. 나는 먼 발치에서 나의 사랑하는 성혜의 모습을 바라 볼 수가 있었다. 감히 그곳으로 들어가 그림을 관람하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아니, 그녀를 만날 용기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너무나 기뻣다. 한때 나를 오빠라고 불렀으며, 나를 좋아했던 성혜의 모습을 이곳 뉴욕에서 바라다보다니, 더 가까이에 가서 본 성혜는 너무나 우아했다. 원색의 파란 드레스를 입고 밝고 환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 몇 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검은 싱글에 흰 손수건을 윗 주머니에 꽂은 남자가 바로 성혜의 남편이었다. 그는 키도 크며, 몸도 육중하였다. 그리고 신중한 모습이 정말 사장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벌써 내가 성혜와 그 남자와의 관계를 들어서 안 것이 7년이 넘었다. 그러나 막상 그 남자를 보게 된 것이 오늘 처음이었다. 정말 멋진 사나이요, 역시 돈이 많은 듯 하였다. 나는 성혜를 향해 '성혜! 나야, 석호!'라고 말을 하였지만 내 입안에서 맴돌고 말았다. 왜 그럴까? 왜?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왜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가서 반갑게 인사를 못한단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내가 그녀를 아직도 짝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겠다고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이 없다면, 그녀에게 가까이 못갈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을 의식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아! 아직도 나는 성혜를 갖고 싶어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멋진 남편을 소유하고 있으니!' 그날 밤, 나는 밤새 한 잠도 못 자고 말았다. "성혜의 남편이란 자, 사장의 아들이란 그 녀석이 죽었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그러면 성혜를 내가 가질 수가 있으리라." 나는 너무나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냐!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어!' 나는 또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내가 성혜의 남편, 미스터 리를 다시 만난 것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게도 삼복 나이트 클럽에서 였다. 마취과 의사, 닥터 안과 같이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아주 우연히도 미스터 리를 소개받게 되었던 것이다. 아날 따라 삼복 나이트 클럽에 특별한 가수가 출연을 하였다. '꽃반지로 유명한 가냘픈 목소리의 은희'였다. "은희라면? 한국에서 꽃반지로 유명한 여자 가수?" 나는 닥터 안에게 물었다. "그렇다니까! 은희, 바로 그 은희야!" 닥터 안은 내게 대답을 하였다. 큰 그랜드 피아노 옆에 앉은 은희의 모습을 보노라니 내 마음도 서글펐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 / 그대가 만들어준 꽃 반지 끼고 / 아-아-아- 그대는 저 하늘의 저별"〕 그녀의 가냘픈 노래는 뉴욕에 버려진 나의 마음을 더 감동케 하였다. '아-아-아-, 그대는 저 하늘의 저별.'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내게는 그토록 안타까운 별도 없었다. 성혜는 부잣집 딸이었을 뿐 무슨 간절한 인연도 아니다. 옥녀는? 비록 내가 좋아 한다고는 했으나, 너무나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어 내게 큰 도움이 안 되었다. 그리고 하이디는? 그녀는 내가 짝사랑을 한 백인 여성이요, 내 친구의 아내였으니, 결국 내게는 저 하늘의 별들은 많았으나 정작 나의 별은 없었다. 〔저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울려 퍼지는 은희의 노래도 구슬펐지만 바보스러운 나 자신이 더 안타까웠다. -은희? 1960년대의 한국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 잡았던 그녀가 갑자기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젊은 목사를 만나 새로운 마음으로 뉴욕에 가서 잘 살겠다고, 예수 믿고 전도하며 남편을 좋은 목사로 만들려고 화려한 가수 생활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했을 때, 나는 감동했었는데 막상 뉴욕에 와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기를 당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고, 이혼녀가 되어 먹고 살기 위해 삼복 나이트 클럽에 나와 정말로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은희의 노래를 들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나 자신을 잃고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 "어이! 닥터 강? 인사하게. K건설 회사 뉴욕 지사장님이야, 이 사장님이라고!" 갑자기 마취과 의사, 닥터 안이 나에게 옆자리에 몇 명의 남자들과 같이 앉아 있는 잘 생긴 남자를 소개했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나의 애인, 기성혜를 사로잡아 간 그 돈 많은 사나이였다. 갑자기 힘이 빠졌다. 그리고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졌다. 마치 성혜의 어머니가 내게 큰 소리로 말한 것이 기억에 났기 때문이었다. '석호야! 성혜는 우리가 점 찍어 둔 남자가 있다. 집안 좋고, 학벌도 좋으며, 인물도 좋은 K건설의 아들이야! 성혜는 졸업을 했으니 곧 결혼을 하고 뉴욕으로 가서 미술 공부를 더 할 거야. 석호? 너 언제 군에 간다고 했지? 3월이라고? 그러면 5월로 잡았으니까, 너는 성혜가 결혼하는 것을 못 보겠구나! 자식, 가난뱅이 주제에 어디에다 대고 내 딸을 달라고? 주제 파악을 할 줄 알아야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 때보다 더 초라함을 느꼈다. -K건설의 사장 아들은 생각보다 남자다웠으며, 역시 보스 타입의 남자였다. 씀씀이가 좋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고, 심지어는 머리를 조아려서 '사장님'이라고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 집에 돌아 와 침대에 누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울분이 솟았다. '그자가 바로 그 K건설의 아들이란 말이지? 아! 내 애인을 빼앗아 간 놈이란 말야!' 그리고 문득 성혜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변하였을까? K건설의 아들과 결혼을 하여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며칠 후, 나는 용기를 내어 K건설의 뉴욕 지사장님의 집 전화 번호를 알아내었다. 예상했던 대로 회사는 퀸즈 후러싱에 있었으나 가정집은 역시 롱 아이랜드 글렌 코브의 부촌에 있었다. 그렌 코브는 몇차례 지난 적이 있었으며, 돈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곳에 여러 명이 살고 있었기에 가보지 않고도 성혜가 잘 살고 있음을 짐작해 알 수가 있었다. 세월이 빠름을 알 수가 있었다. 졸업 후 내가 군에 입대한 사이에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왔으니 그후 성혜를 본 일이 없었는데, 어느 듯 8년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성혜, 성혜! 내게는 운이 없었다. 성혜와 결혼이라도 하였더라면 따뜻한 가정을 갖고 안정되게 살고 있었을 텐데, 운이 없었다. 운이 없었어!' 라고 나는 결론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한 번 보고 싶었다. 제기랄! 성혜의 어머니 때문에 번번히 나는 다 된 밥에 콧물을 떨군 기분이었다. 글렌 코브의 성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성혜의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울려 나왔을 때, 나는 물론 성혜도 놀랐다. 전화를 통해서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흘러가 이젠 완전히 남남인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말았다. -성혜는 유부녀였다. 그것도 잘 나가는 K건설의 지사장 부인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유부녀를 만날 수가 없었으며, 만나면 범죄 행위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 우리는 남편 몰래 만하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내가 얻어들은 소식은 기성환의 부모들도 머지 않아 미국으로 이민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려고 한다고 하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나도 그러했지만 성혜도 나를 마음 속으로는 사랑하고 있었지만 나를 깨끗이 잊고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혜가 나를 찾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어엿한 유부녀였기에 느끼는 도덕적인 절제보다도 잘 나가는 남편, 이 사장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잘 못했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호걸처럼 호탕해 보이지만 사실은 의처증을 가진 남자였다.- '의처증이란? 사랑의 도가 지나쳐 부인의 모든 사생활을 의심하는 증세, 아니 너무나 사랑하기에 상대방을 송두리째 갖어야 하는 증상'이라고 정의하고 싶었다. 그러기에 사사건건 감시를 하며, 간섭을 하여야 하는 증세가 있다고 한다. 결국 상대방의 자유를 송두리째 쇠사슬에 묶어 두고자 하니 상대방에서 반발이 생기게 마련이며, 결국에는 죽음을 불러 온다고 한다. 반대로 그녀가 가까운 뉴욕에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가 스스로 찾지 않았던 것은 나의 열등의식에서였다. 성혜를 만나 나의 초라한 모습을, 결혼도 않고 초라하게 인턴, 레지던트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가 싫었다. 드디어 성혜를 만나 반가웠으나, 우리는 성혜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더 이상 찾지 말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싱겁고 허무한 만남이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만나는 사실을 남편이 알면 죽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성혜의 우려한 목소리었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결혼하고 싶다.' 라고 몇 년간 기다려 왔던 나와 그녀와의 만남은 너무나 싱겁게 끝이 난 셈이었다. 유부녀를 만난다는 것이 이처럼 큰 위험인 것을 나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 무명초라고 하는 꽃이 있다. 낮에 피는 꽃이 아니고 꼭 해가 지고 난 컴컴한 밤에 꽃을 피우는 그런 허망한 꽃이다. 그러기에 나는 나 자신을 '무명초 인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날부터 이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되었다. 〔남몰래 지는 꽃이 너무도 서러워 떨어진 꽃 잎새마다 깊은 사연 서리네. 따뜻한 어느 봄날 곱게도 피어나서 애꿎은 비바람에 소리 없이 지는구나. 아- 지는 꽃도 한 떨기 꽃이기에 웃으며 너는 가느냐. 그 누가 그 이름을 무명초라 했나요. 떨어진 잎새마다 깊은 사연 서리네 밤새어 피어나서 그 밤에 몰래지는 너무나 애처로워 아픈 가슴 적시네. 아- 지는 꽃도 한 떨기 꽃이기에 웃으며 너는 가느냐.〕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였는데, 그녀를 만나고 온 그 날 저녁 나는 와인을 마시면서 큰 소리로 부르고 불렀다. 무명초? 강석호? 그렇다. 강석호는 기성혜와 그 가족 앞에서는 밤새어 피어나서 그 밤에 몰래 지는 무명초였다. '나는 더 이상 성혜라는 여자를 그리워 하지 않겠노라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리라고!' 또다시 나는 다짐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성혜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단념하기로 했다. * 그러나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성혜를 잊고 혼자 살겠노라고 맹세를 한 후, 몇 개월 동안 나는 술을 너무나 마시며 살았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라고 해도 좋을 듯 너무나 많은 술을 마셨다.- 실연을 하면 바보처럼 술을 마신다! 결국 나는 바보같은 실연자가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나의 무명초 같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는 사건이 생겼다. 1978년도 저물어 가는 겨울 어느 날, 허드슨 강에도 타판지 다리 위에도 흰눈이 내려 싸이고 있을 때, 뜻밖에 마운트 버논 병원 마취과로 걸려 온 전화가 있었다. 그는 K건설의 이사장이었다. 만하탄에 나와 한번 만나자고 했다. 꽤나 흥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기가 편치 않은 듯 하였다. 그러나 나는 곧 약속한 역사 깊은 삼복 나이트 클럽에서 그를 만났다. "닥터 강? 당신 알고 보니, 내 아내와 연인관계라고 하던데, 맞소?" "예?" 나는 한 대 맞은 듯이 대답을 하였다. "당신, 내 아내와 간통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사실이요? 이것 봐! 다 알고 묻는 거야!" "아닙니다. 나는 기성환과 동창이며, 성혜는 동생일 뿐입니다." "동생이라고? 그런데, 왜 내 아내가 당신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단 말이요? 왜?" "아니요, 성혜는 교양 있는 규수입니다.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경고합니다. 앞으로는 내 아내에게 전화질도 말고, 찾지도 말라! 그렇지 않으면 손을 봐 주겠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나는 난감했다. 필경 무슨 일이 성혜에게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 후, 나는 성혜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였다. -남편, 이사장은 요즘에 와서 더 더욱 의처증이 심해진 듯 하다고 했다. 사업도 생각보다 잘 안되어 적자를 내기 시작하여 빗도 지고 있으며, 우울증이 심하여 식사도 못하며, 말도 하지 않다가 발작적으로 화를 내곤한다고 했다. 그 결과 성혜의 일상 생활도 위축되며, 가끔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고 했다.- '우울증에 의처증이라니?' 나는 문제가 심각함을 느끼고 있었다. 며칠 후, 내가 사는 용커스의 집에 어둠이 찾아오고 있을 때, 몇 명의 한국 사람들이 나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아니? 웬 한국 사람들이?' 나는 불길하였지만 차를 주차하기 위해 놀란 마음으로 천천히 차를 몰고 집 앞으로 갔다. 이때 분명히 이사장과 몇 명의 남자들이 내게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무엇인가 들려 있음을 발견했을 순간,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나의 집 앞에서 쓸어지고 말았다. 얼마 후 내가 의식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응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흑인들이나 푸에르토리칸에게 가끔 테러를 당한다고는 하지만 같은 동족인 한국 사람들에게 당하다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잠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진찰 결과 불행하게도 칼로 어깨를 찔려 갈비 뼈 2개만 부러지는 사고에 끝혔다. 며칠 후 나는 성혜로부터 전화를 받았으며, 그녀는 남편을 대신하여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내게 당부를 하였다. "몸 조심 하십시오. 그 사람, 능히 그럴 사람입니다. 잔인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성혜로부터 부모님이 드디어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역시 돈 있는 사람들은 '한국보다는 미국을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 노인이 되어 아들과 딸들이 사는 미국으로 와서 편안한 인생의 말로를 보내겠다고 하는 것에 대해 굳이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인사차 캘리포니아로 전화를 걸었을 때, 성환의 아버지는 몹시 반가워하며, 나를 축하 해 주었다. 역시 그는 옛날처럼 나를 사랑해 주었다. "미국에서 마취과 전문의사가 되었다고? 축하한다. 석호야! 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성환이도 금년에 외과 전문의사 시험에 합격했다는구나! 그리고 해군에서도 제대를 곧 하게 된다는구먼!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개업을 하려고 한다더라. 아참! 석호야! 너는 언제 결혼을 하려고 하나?" "예, 때가 되면요!" 나는 대답은 하였지만 힘이 없었다. 그놈의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기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성환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역시 나를 싫어 하고 있었다. "석호냐? 너, 성혜를 만나는 모양인데, 안된다! 안돼! 성혜가 너 때문에 이서방한테 오해를 받고 있는 모양이더라. 성혜 옆에 얼씬도 말거라. 알았냐?" "예?" 나는 작은 소리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나는 성환이네 식구들을 만나면 웬 일인지 무명초가 되었다. 왜 그럴까? 특히 그의 어머니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 미국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도 생긴다고 하지만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생기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와 뉴욕 데일리 뉴스에 난 끔찍한 기사가 있었다. 〔엽기적인 실종 사건! 미국에 파견된 한국의 K건설 회사의 지사장이 퀸즈에 있는 크리드 무어 정신병원에서 실종되었음. 금년 38살의 한국인 미스터 리는 몇 년 전부터 우울증으로 시달려 왔는데, 최근에는 사업의 부진으로 인해 더욱 그 증세가 악화되었다고 함.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항 우울제를 몇 년간 복용하였으며, 최근에는 증세가 악화되어 크리드 무어 병원에 2일 전에 입원을 하였는데, 다음 날 아침 그는 실종이 되었음. 환자의 행방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음. 병원의 부주의로 간주되고 있음. 혹시 환자들에 의해 숨겨졌거나 아니면 피살 되었는지도 조사 중임. 사업상의 원한 관계 또는 가족 사이의 치정관계를 조사 중임.〕 '아니? 무슨 말인가? 성혜의 남편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실종이 되다니?'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보는 그런 내용 같았다. 그렇다고 나는 이 내용을 자세히 알고자 성혜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더 궁굼했다. 가끔 정신 병원에서 우울증으로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또 실종된지 5년을 기다리다 환자를 찾아 내지 못하여 생명보험금을 받은 유족의 경우도 신문에서 본 일이 있었다. 더욱이 퀸즈에 있는 크리드 무어 정신병원에서 이런 일이 한 두번 있었다고 한다. 또, 병원이 워낙 크고 중증의 정신병 환자들이 입원을 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며, 격리되어 수용되는 환자에게 접근하는 마약 환자와 미리 짜고 일을 꾸미는 병원 직원도 있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다. 병원 입구는 아주 아름답게 꾸며 있어 처음 와 보는 사람들은 이곳이 병원인가? 공원인가? 하고 의아해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뿐인가, 직원들도 많고 환자들을 잘 관리하여 훌륭한 병원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들은 의외로 영리한 점도 있어 돌발적인 방법으로 자살도 하며, 병원에서 도망을 나가기도 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병원 식당에서 천장에 목을 매고 죽은 사람도 있었고, 혹자는 병원의 쓰레기통에 숨어 있다가 쓰레기 치우는 흑인에게 돈을 주고는 밖으로 사라져, 그후 소식이 없자 병원에서 사망으로 처리되어 생명보험금을 가족들이 받아 간 일도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성혜의 남편에게도 생기다니? 실종된 미스테리의 사건으로 되고 보니 나도 놀라고 말았다. 뉴욕에서 발간되는 한국 신문에서는 더욱 요란했다. 〔속보: K건설 지사장 사건. 정신병원에서 실종된 지사장 사건은 아직도 오리무중임. 지사장의 우울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고 함. 뿐만 아니라, 의처증이 심하여 아내와도 불편한 관계로 살아 왔다고 함.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부인의 애인에 대해 늘 의심을 하고 있었다고 함. 부인의 애인은 현재 뉴욕 근교 Y시에 살고 있으며, 의사라고 함.〕 "뭐라고?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온 애인? 그리고 의사? 아니 나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성혜에게는 또 다른 애인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의심해 보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그러나 며칠 후 나는 성혜에게 다른 애인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경찰이나 신문은 나, 강석호를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었구나!' "맙소사? 맙소사! 신문이 나를 아주 불륜의 남녀 관계로 만들고 말았구먼!" 나는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 그러나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을 해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닥터 강? 잠깐 봅시다. 몇마디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용커스 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다. "예,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전화를 끊고 경찰서로 갔다. "닥터 강! 신문 기사를 읽어 알겠지만 성혜의 남편과 만난 적이 있었죠? 아니, 그로부터 테러를 당하였지요? 그 후 무슨 원한을 품지나 않았습니까?" 놀라운 질문이었다. '아니, 내가? 바보같은 의사, 무명초같은 강석호에게?'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후 몇 개월 미스터 리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으나, 미스터 리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으며, 신문에서도 더 이상의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경찰인지, 아니면 탐정인지 용커스의 자택과 마운트 버논 병원에 찾아와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 하였다. K건설의 지사장의 행방이 좀처럼 잡히지를 않았다. 경찰과 FBI까지 동원되어 찾고 있었으나, 1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수사의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성혜와 가족도 그러했다. 가장이 없어지고 보니 마치 선장 없는 배가 된 듯 하였으며, 엉뚱하게도 부인인 성혜를 의심하는 수사관도 있었다. '성혜와 옛 애인, 강석호가 짜고 만든 엽기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고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와 성혜는 이 사건이 있은 후에는 전화도 하지 못했으며, 전화를 하다가 오히려 경찰의 의심을 더 받을까 해서 아예 단념을 하였다. 당사자인 성혜가 겪은 고생은 더욱 심했다. 처음에 병원측으로부터 남편이 행방 불명이 된 것을 통보 받았을 때, 성혜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울기만 하였다. 앞으로 살아 갈 길이 막연하고,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성혜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뉴욕의 하늘이 마치 지옥에서 떨어져 나온 동굴과도 같았다. 경찰들과 같이 부르클린에도 가 보았으며, 허드슨 강가에도 가서 남편의 시체라도 찾아 볼양 하루를 보냈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문제가 더 고약하게 꼬이게 된 것은 시집 식구들과 경찰들의 예사치 않은 눈초리였다. 마치 성혜가 공범일 수도 있다고 하는 의심과 모욕적인 언사들이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이젠 차라리 남편이 돌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왜냐하면, 성혜를 괴롭힌 것은 석호 오빠에 대한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석호 오빠와 결혼하기를 응근히 원하고 있다고 할까! '아니! 내가 남편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 석호 오빠를 더 사랑한다고?" 성혜는 소스라쳐 놀랐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에는 시집 식구들도 성혜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도 성혜는 멀리 퀸즈의 하늘을 바라다 보면서 남편이 어디엔가에 살아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그가 죽어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다시 살아 난다해도 그를 더 받아 들일 것 같지가 않았다. 공격적이며 때로는 포악한 성격의 남편이 싫었다. 차라리 그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K건설 미국 지사 이사장의 실종 사건은 한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조금씩 사라졌다. 단지 불쌍한 가족들과 친척들에게만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되어 갔다. 결국 성혜에게는 씻지 못할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남편을 옛 애인과 공모해서 죽였을지도 모르는 여인?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나쁜 며느리!'라고 하는. 그 뿐인가, 그녀는 한국에 있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로부터 '더 이상 내 식구가 아니다'라는 극단의 질책과 재산 상속도 단념을 하라고 하는 협박도 받았다. 누구하나 남편의 정신병인 의처증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의 생명보험 회사의 규정에 의하면 실종된 사람은 5년 간의 추적 기간을 지나고 나서야 일단 사망을 한 것으로 진단을 받으며, 드디어 생명보험금을 받을 수가 있었다. 결국 생명보험금으로 100만 달러를 받았다고는 하나 성혜에게는 마치 도둑질한 돈과도 같아 불안하였다. 비록 이사장이 우울증과 의처증이 있기는 하나 그래도 성혜로서는 살과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이었다. 그림을 그리도록 자상하게 도와 주었으며, 개인전을 열 때도 많은 돈을 드려 성대하게 도와 주었던 남편이었다. 그리고 더 간절한 것은 그로 인해 얻은 아들과 딸, 건강하고 예쁜 생명들이었다. '며느리가 못된 남자와 눈이 맞아 아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온 시집 식구들의 눈살도 매서웠다. 어쨌든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고 말았다. '5년 간이나 수사를 하였으나, 단서도 못찾고 결론을 못지음. 일단 사망한 것으로 간주함.' '실종된 남편을 100만 달러로 사다니!' 성혜는 한탄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껏 울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 많은 돈도 받았으니 기회를 봐서 석호 오빠하고 결혼을 하라고!' * '그렇다면 실종된 성혜의 남편, 이사장은 과연 어찌되었을까?' 궁굼하였다. 보험회사 직원의 말에 의하면, 이사장과 같은 실종 케이스는 병원 내에 있는 정신병 환자에 의해 빼 돌려 져 살해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또, 환자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어디로인지 가서 가짜 이름을 만들어 평생을 살아가는 수도 있다고 했다. 가장 가능한 것은 우울증에 빠진 이사장 스스로가 허드슨 강이 만나는 바닷가에 가서 스스로 바닷물에 빠져 죽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했다. "미국과 같은 법치 국가에서도 이런 엽기적이며, 미스테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보험료가 오르게 마련이라고요." 라고 보험회사 직원은 덛부쳐 말했다. 크리드 무어 정신 병원 정원 어디에 파뭍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그의 시체에서 울려오는 울음 소리가 들려 오는 듯도 하고, 아니면 '강석호? 요놈 잘 됐다. 나는 병원을 탈출하여 지금은 멀리 알젠틴에 와서 예쁜 여자하고 다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롱!'이라고 하는 소리도 들렸다. * 더 놀라운 일이 생겼다. -생각지도 않았던 기성환의 어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다. 늘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나를 미워하던 그녀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남쪽에 있는 뉴 포트 시에 나의 사랑하는 친구의 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산 디에고에서 해군 복무를 하며, 외과 전문의 과정을 마친 닥터 기는 해군에서 제대를 한 후, 아나하임으로 이사와 한국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외과 개업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역시 성공적으로 개업을 하여 많은 돈을 모았기에 한국에 있는 부모들을 당당하게 모셔와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뉴 포트에 대궐같은 집을 사서 같이 살고 있었다. 성환의 아버지는 많이 늙었으며, 특이한 것은 그의 어머니의 변화였다. 나에게 늘 불친절하며, 모욕적인 말만 하던 그녀가 웬일인지, 사위가 실종된지 꼭 5년이 지나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과부가 된 딸, 성혜를 보면서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다. "석호야? 나 성환 어머니이다. 어떤가? 결혼은 하였는가? 아니, 아직도 혼자 살어? 어떤가? 성혜를 한번 생각해 보겠나? 성혜는 남편이 실종 된지 5년이 지났으며, 생명보험금도 탓으니 사는 것도 안정이 되었다. 혼자 사는 모습이 애처러워서 그래. 애처러워! 석호야? 어려서부터 너 성혜를 좋아하지 않았니? 그때는 내가 잘못 생각했었어. 그러니 나를 용서해! 너와 성혜를 결혼 시켰어야 했는데…" "……" 나는 말을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석호야? 나는 너를 나의 아들로, 성환이와 같은 아들로 생각하고 사실 좋아 했어. 비록 네가 가난했지만 너는 정말로 똑똑했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자랑스러웠어. 그래, 석호야! 너는 성혜와 결혼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어서 결혼하거라. 너는 나의 아들이고, 사위이다. 알겠니?" "예, 어머니! 그래도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나는 대답을 하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14
전체:
59,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