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문도에 핀 동백꽃은 한글판-제 1부

2012.02.02 13:50

연규호 조회 수:898 추천:27

장편 소설, 거문도(巨文島)에 핀 동백(冬柏)꽃은... (THE CAMELLIA in Geomoon Island) 연규호 (延圭昊). Kyuho Pen Yun,M.D. FACP. Member of PEN Korea & USA 문인협회 회원, 한국 & 미주 작가의 말: 1973년 5월30일, 뉴욕에 도착하던 날, 케네디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5 년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여미국 내과 전문의 과정을 마침은 물론 내과 보드(전문의사) 시험에도 합격하겠다고 다짐을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내과 전문의사 자격을 받은 후 한국으로 금의환향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내과 교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이 나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남가주 얼바인대학 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후 가든그로브에서 한국사람, 미국 사람, 멕시코 사람, 그리고 월남 사람들을 돌보는 내과 의사로 30 여년을 살아 왔으며 마침내 60세가 넘었습니다. 60, 노인이 되던 날, 나는 고향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의 고향은 충청북도 청주이며 국민학교(초등)를 그곳에 있는 교동학교를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생 중에, 성공회 신부의 손자인 고상진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오르내리던 성공회당의 돌계단이 생각납니다. 1965년, 고등학교 동창인 유순희가 대학 2학년 재학중에 월남 퀴논에 있는 맹호부대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운 좋게도 죽지 않고 미국 로스앤젤스로 이민을 왔었는데, 1979년 어느날, 여기서 다시 만났습니다. 1967년, 고등학교 친구인 김권후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하였습니다. 아주 씩씩한 모습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였었는데, 불과 2주만에 프레이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줌의 재가되어 서울로 돌아와 동작동 국군묘지에 묻혔습니다. 1969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공군군의관들은 월남 봉타오로 가 부상병들을 후송하여 왔습니다. * 내가 살며 개업하는 남가주 가든그로브에는 한국타운이 있으며, 인근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에는 월남타운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이었는지 이민 초기인 1980년대에는 이들 두 타운은 적대적이며 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월남전쟁에 참전하였던 한국과 한국 사람들은 이유 없이 월남 사람들을 무시하였으며, 월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받은 멸시가 가슴속에 앙금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다, 나는 월남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내가 아는 월남 사람들은 한결같이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레. 누엔. 도. 트랜. 후옹. 팸. 그리고 당이라고 하는 성을 가진 월남 사람들은 나의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나는 슬픔과 외로움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참담하고 눈물나는 과거를 갖고 미국으로 와, 열심히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2000년이 되면서 한국 사람들과 월남 사람들은 서로 서로를 이해하며 좋은 이웃으로 지내게 되었는데, 결정적으로 이 두 민족을 형제처럼 만들어 준 한국 사람이 있습니다. 전제용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금년 63세가 되는 경상도 사나이인데 남해안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는 아주 평범한 어부입니다. 그런 전제용씨의 숨겨졌던 영웅적인 선행이 20여년 만에 월남과 한국 사회에 알려지면서부터였습니다. 전제용 선장! 1985년 남지나 바다에서 표류하던 월남 보트 피난민들을 구출하여 주었던 그는 회사의 명령을 거역하였었기에 직장에서 파면됨은 물론 어디에서도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남해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 20여년 간을 가난하게 살아 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렸던 전제용 선장은 그가 구출하여 주었던 96명의 월남, 보트 피플들의 초청을 받아 이곳 월남 타운과 가든그로브를 방문하였습니다. 월남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호칭하여 주었습니다. 영웅 선장 전제용씨가 한국으로 돌아 간 후, 두 민족은 형제처럼 더 친해 졌습니다. * 전제용 선장, 유순희, 김권후, 고상진, 그리고 퀴 레, 휴이 트랜, 제임스 누엔, 마이라 팸...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대수를 가르쳐 주었던 고원영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내 고향은 거문도...동백꽃이 피고멸치 떼와 고등어 떼가 어울려 노는 거문도 앞바다를 사랑한다. 그리고 은퇴를 하면 거문도에 가서 등대직이가 될거다.'라고 하셨던 그의 얼굴이 왜 갑자기 떠오를까? 문득, 나는 나의 가슴속에 거문도의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소설, 거문도에 핀 동백꽃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일년만에 완성을 보았으며 마침내 출판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 부디 한국 사람들과 월남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랑하는 형제애를 유지하며 애틋한 사랑과 위로를 주고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소설은 픽숀(Fiction)이지만 주인공들의 이름은 가능한 내가 아는 친구, 환자들의 이름을 그대로 써 보았기에 마치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이 듭니다. * 감사합니다. 미국, 남가주, 가든그로브에서 소설가, 연규호 씀. 장편소설: 거문도(巨文島)에 핀 동백(冬柏)꽃은..... 저자: 연규호 (延圭昊), Kyuho PenYun,M.D.FACP 펜 클럽 Korea & USA, 한국 문인협회 회원, 미주 문인 협회 회원, 차례: 1장: 디즈니랜드의 불꽃놀이 .1 2장: 두 가지 사건중의 하나 .5 3장: 두 번째의 사건이란? .14 4장: 의사 강석호의 이력서 .18 5장: 남지나 바다에서 만난 선장과 보트 피플 .24 6장: 성공회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29 7장: 30년만에 만나고 보니 .38 8장: 달라트에서 만난 월남 아가씨 .46 9장: 사랑의 계곡에서 .62 10장: 월남에서 귀국한 후,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 .73 11장: 우울증 환자로 만나다니 .77 12장: 남지나 바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82 13장: 가든그로브의 수정교회 .94 14장: 절망 .96 15장: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 .103 16장: 남지나 바다에 다시 와 보니 .105 17장: 거문도, 동백의 가슴은 붉게 타고 .108 18장: 간 이식 수술을 받으면 반드시 산다. .111 19장: 누군가, 너를 위해 기도하네. .113 20장: 거문도로 가는 여객선, 거문도. .119 평론: 평론가 장편 소설: 거문도(巨文島)에 핀 동백(冬柏)꽃은..... (The Camallia in Geomoon Island.) 1장. 디즈니랜드의 불꽃놀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즐거운 곳이라고 불리우는 디즈니랜드(DISNEYLAND)의 캄캄한 하늘위로 요란한 굉음 소리를 내며 수 많은 불꽃(폭죽)들이 마치 로케트처럼 치 솟아 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아름답고 현란한 아취들이 만들어 질 때마다 고개를 고추 세우고 구경을 하는 디즈니랜드의 관광객들은 와! 와!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정확히 15분이 지나면서 마지막 불꽃이 유성처럼 검은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 가 묻혀 버리자 하늘은 또 다시 칠 흙같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불과 15분간의 현란한 불꽃놀이!' 못살아도 백년은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던 관광객들도 언젠가는 저, 마지막 불꽃처럼 자신들도 캄캄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 어디인가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 인생의 종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디즈니랜드의 전광판에는 [2003년 3월 5일, 저녁 9시 45분]이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 미국 칼리포니아주, 가든그로브(Garden Grove)시에서 내과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의사 강석호(姜錫浩)는 그의 진료실의 유리창을 통해 물끄러미 솟구쳐 오르는 디즈니랜드의 불꽃들을 바라다보며 오늘 아침과 저녁 늦게 일어났던 두 가지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 두 가지의 사건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주었기 때문이었다. -강석호 의사! (금년 1월에 60세의 회갑을 맞은 것으로 보아 살만큼은 살았다고 자신도 인정을 하였는데 새삼스럽게 그의 인생을 바꿔 준 두 가지의 사건들이란 과연 무엇인가?)- 30여 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바라왔던 평생의 두 가지 소원들이 오늘 그의 눈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온 그런 사건들이었다. (주, 디즈니랜드: 칼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아나하임에 있는 유락 공원으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즐거운 곳이라고 부름) * 의사 강석호(이하, 닥터.강이라고 부르자.)는 가든그로브시에 있는 한인타운에서 지난 25년간, 한국, 멕시코, 월남 그리고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내과를 개업하며 조용히 남모르는 봉사를 하며 살아 왔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에 걸맞게 머리도 희끗희끗하며 얼굴에 주름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지난 60년의 세월이 평탄치만은 안았던 것 같았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60살이 되도록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작은 콘도미니움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 사회에서는 궁굼한 수수께끼였으며 까싶이 되었다. ("의사, 강석호씨는 혼자서 살고 있다는구먼. 결혼도 않고서...." "그럴 리가 있나? 돈 잘 버는 의사인데...그럴 리가....") 그러나 뜻밖에도 이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또 다른 추측이 한인타운에 난무하였다. ("닥터.강? 그 사람, 문제가 있다는 구먼. 그리고 사연도 있다는 구먼. 결혼을 안한 것은 실연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던군. 그래서 바보처럼 아직도 어떤 여자를 기다리며 혼자서 살고 있다는 거야." "그래? 누가 그러는데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어 결혼을 못한 거라고 하던데..."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하더라구. 신체적으로 불구이니까...고자이니까 말여. 허허." "어쨋거나, 닥터.강이란 사람, 수수께끼같은 의사로구먼...") 그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친구도 없는지, 그와 같이 술을 마셨다든지, 골프를 같이 쳤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콘도미니움에 들어 가 본 사람들도 없었다마는 자칭 닥터.강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이 알려준 말이 인상적이었다. ("닥터.강의 집에 가보니, 가구가별로 없던군요. 낡은 침대와 작은 책상 위에 엉성한 컴퓨터가 하나 놓여 있던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벽마다 한국, 월남 그리고 미국 지도가 붙어 있던군요. 그리고요...충청도의 청주, 월남의 달라트라는 도시에는 붉은 매직 펜으로 둥글게 그어 놓았던 군요. 청주...그리고 달라트(Dalat)라는 도시에....그것참!") * 사실이 그러했다. 불과 2개월 전이었다. 2003년 1월말이었다는 말이다. 닥터.강은 60세 생일(환갑)을 맞아 자축하는 의미로 뜻밖에도 진료실 문을 걸어 잠그고, 로스앤젤스에 있는 '아주 관광사'를 통해 멀리 베트남과 한국을 다녀왔다고 하였다. -그는 베트남의 사이공(호지민 시티), 통킹만에 있는 하룽베이를 거쳐 하노이를 관광한 후 혼자서 돈을 조금 더 내고 월남 남중부에 있는 달라트(Dalat)라고 하는 도시를 다녀왔다고 하였다.- "달라트? 하필이면 달라트? 그곳이 어딘데?" 같이 관광을 갔던 한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월남이 통일되기 전에는 사이공과 달라트로 관광을 많이 갔었지만 통일이 되고 나서는 달라트 보다는 하룽베이를 우선 한다고 한다고 관광사 직원이 말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가서 2박 3일 관광을 하였는데 하필이면 충청도 청주에 갔다고 하였다. "아니? 이토록 추운 겨울에 청주는 왜 갑니까? 따듯한 제주도는 놔두고?" 관광사 직원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을 때, 그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왜냐구요? 달라트와 청주에서 누구인가를 만나보고 싶었지요. 누구인가를..." "예? 누구인가를요? 누구를?" "월남 여인과 한국 여인을..." 그는 힘없이 대답을 하였다. * 잠시 독자들을 위해 닥터.강이 살고 있는 칼리포니아주, 가든그로브의 한인타운(韓人村)과 월남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월남타운(越南 村)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하여야 할 것 같다. -1960년 이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실현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오기 시작하였다. 누구나 잘 아는 로스앤젤스 뿐만 아니라 조금 남쪽에 있는 오렌지 카운티의 가든그로브에도 한국사람들이 몰려와 한인타운(Koreatown)을 형성하였다. 1970년이 되면서 한국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려 들어왔기에 한인타운은 눈에 띄게 확장이 된 것은 물론 그들의 자식들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인 하바드, 예일, 버클리, 스탠포드등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의사, 변호사, 회계사, 엔지니어가 배출되었다. 그뿐인가 세탁소, 페인트 회사, 햄버거 가계 그리고 구두 수선소가 여기저기에 생기는가 하면 부동산 중개상, 보험 대리인도 늘어나고 있었다. 더 더욱 놀라운 것은 정치적인 신장력이었다. 시의원, 가주 하원 의원 그리고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한인도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기에 미국 사람들도 '가든그로브' 하면, '한국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인정을 하게 되었다. 1985년 4월달부터 이곳 가든그로브에서 내과를 개업하고 있는 닥터.강도 한인타운을 발전 시킨 터주대감으로 불리었다. 왜냐하면, 한인들이 주체하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작거나 많거나 그는 꼬박 꼬박 헌금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 참으로 묘한 것은 월남 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의 인연이었다. 1960년 초부터, 한국은 존슨 대통령과 고딘 디엠 대통령의 요구에 응해 수 많은 군인들을 월남에 파병을 하였다. 자유 월남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수 많은 젊은 군인들이 월남 땅에서 죽었으며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월맹에 의해 패배를 당한 후 월남 사람들은 보트 피플(쪽배나 어선을 타고 도망치다시피 나온 월남 피난민들)이 되어 가까스레 태평양에서 구출되어 미국으로 와서 정착을 하였는데 하필이면 한국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인타운의 옆 동네인 웨스트민스터(Westminsrer city)시였다. "우리, 월남 사람들은 당신네, 한국사람들이 좋아 여기까지 따라 왔습니다. 그러니 잘 좀 봐주소!"라고 말하였다. "와! 하필이면 월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은 달갑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남 피난민의 절반이 넘는 6-7만명이 이곳 웨스트민스터시에 월남 타운을 형성하였으며 해마다 그 인구는 더 늘어나고 있었다. 한가지 특이 한 것은 월남 사람들은 그들의 타운을 '리틀 사이공(Little Saigon)'이라고 불렀는데 사실 알고 보면 사이공이란 이름은 이미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지도 오래였다. 결국 사이공이란 이름과 자유 월남을 잊지 못하고 그들은 '작은 사이공'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위로하며 달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한국 사람들이 평소에 깔보고 얕보았던 월남 사람들은 알고 보니 한국 사람들 보다 더 현명하며 정치적으로도 단결력이 강하였다. 거지처럼 취급받으며 살아 온 월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 보다 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기에, 월남 사람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는 점점 더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바드, 예일, 버클리, 스탠포드에 입학하는 학생들도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 변호사, 회계사 그리고 엔지니어의 수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시의원들과 주 하원의원도 생기고 있었다. ("와! 웨스터민스터시는 바로 월남 타운이구나!" "와! 이러다가 월남 사람들이 한국타운을 점령하게 되는구나!") 마침내 한국 사람들은 월남 사람들의 저력을 알게 되었으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 "그렇다면? 월남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사이가 좋았나요?"라고 미국 사람들이 물으면, "아니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민 초창기에는 한국사람들과 월남 사람들 사이에는 "깔보기 그리고 무시하기"에 의해 많은 갈등이 있었다. "월남 사람? 흥! 바보처럼 나라를잃고 이곳으로 쫒겨 온 놈들...피난민주제에....나? 옛날, 월남에 갔었지. 그리고 거기서 응, 응, 꽁까이하고 어허! 좀 놀았었지..." 한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월남 사람들을 깔 보았으며 반대로 월남 사람들은 이와는 또 다른 감정이 있었다. "웃기지마! 한국 놈들? 딸라를 벌려고 제 목숨 바쳐가며 월남에 와서 못된 짖 많이 했었지. 무식한 놈들...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고...와! 어글리 코리안들! 웃기지마! 이놈들아, 월남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우리, 월남 땅이 한국보다 두 배나크고..인구도 8000만이나 된단말야! " 결국, 한인타운과 월남타운에서는 반복되는 갈등과 깽단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칼에 찌려 죽기도 하였기에 주류 사회인 미국 사람들도 혀를 내 두르고 말았다. "월남 사람들..한국 사람들...깽단에 법도 모르는 놈들...제 나라를 잃어버리고 피난민으로 온 월남사람들...아직 반쪽으로 나뉘어 동족끼리 싸우는 불쌍한 한국 놈들"이라고 정의하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그래도 월남은 공산 월남으로 통일이 되어 베트남공화국이라고 엄연히 부르며 경제 재건을 하고 있으나, 남과 북으로 갈리운 한반도는 '조선과 한국'으로 나뉘어 아직도 반쪽의 나라로 지내고 있으니까....- * 그러나 이토록 싸움과 반목으로 질시하여 오던 한국 사람들과 월남 사람들은 10여 년이 지나면서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게 되었으며 화목하기 시작하였기에 깽단의 싸움도 살인 사건도 사라지게 되었다. '아니? 월남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서로 화목을 하기 시작하다니!' 미국 사람들도 놀랐다. 뿐만 아니라 두 민족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우리 월남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소수 민족입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힘을 합쳐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한국을 보십시오!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축구도 잘하지요. 올림픽도 훌륭하게 치루었지요. 그뿐인가요? 한국 영화가 옛 사이공에서 그리고 여기 리틀 사이공에서도 인기랍니다. 한국? 최고입니다. 최고! 아! 월남도 그렀습니다. 이젠 공산주의보다 시장 경제 체제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경제 개발의 모델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통일 월맹도 옛 원한을 잊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호치민 시티에 가 보세요. 한국제 자동차가 한글로 아직도 쓰인 채 달리고 있으니까요. 그 뿐인가요. 하노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2003년이 되면서 한국사람들과월남 사람들은 나란히 월남 식당과 한국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며 정치적인 행사도 공동으로 개최를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한.월.(韓.越)관계는 우정과 이웃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 이렇게 보면 닥터.강이 금년 초 월남으로 여행을 갔었던 것은 아주 자유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옛날, 월남에 가서 싸웠던 그 추억을 못 잊어 여행사를 통해 사이공, 베트공 루트, 메콩 델타, 하노이 그리고 하룽베이를 관광하고 미국으로 오는 길에 한국에 들렸다 오는데 그 가격은 불과 1500달라 안팎이었다. 닥터.강은 1968년 5월부터 1969년 7월31일까지 맹호 사단 기지인 퀴논에서 군의관으로 참전 하였던 그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으며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달라트에서 만났던 월남 아가씨를 다시 만나보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퀴논에는 맹호 사단의 기지도 없었으며, 달라트에 있었던 그 육군 사관학교와 레 장군의 저택도 사라졌기에 찾아보지 못하고 미국으로 되돌아 왔다고 하였다. ("아니? 닥터.강? 퀴논과 달라트에 무슨 아련한 사연이 있었나요?" "사연은? 아- 사연은 사라지고 그곳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푸레이크에서 죽은 내 친구, 한성민(韓晟旻)의 목소리....그리고...어디에서인가 살아 있을 '닌 레 (Nihn Le)'와 '퀴 레(Qui Le)'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요." "목소리를? 그런데, 만나 보았나요?" "............"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못 만났군요? 그렇죠?" "못 만났습니다마는 꼭 만나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렇다면 청주에는 왜 갔었나요?" "예, 거기에 가면 돌계단이 있지요. 돌계단이...." "뭐라구요? 돌계단? 아니? 그곳에는 왜?" "예 돌게단에 새겨둔 이름을 확인해 보려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있던 가요?" "예, 있었습니다마는.....") * 사실이 그러했다. 닥터,강은 멀리 베트남과 그리고 청주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오늘, 그는 이 둘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말이다.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사건들이..... 2장. 두 가지 사건중의 하나. 2003년 3월 5일은 닥터.강에게 있어서는 잊지 못할 하루였다. 아니 그 운명의 하루였다. 아침 일찍, 닥터.강은 그의 내과 진료실 문을 닫고 월남 타운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아주 떠들썩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96명의 월남 피난민들을 구해준 영웅, 정진성(鄭眞成)선장, 환영식)이었다. 정진성 선장이라니? 더구나 월남 사람들이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대대적인 환영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한 일이 엄청난 일이었음을 쉽게 느낄 수가 있었다. 닥터.강이 이월 초에 한국을 방문하고 미국에 돌아 왔을 때 그는 한국 신문에 대 문짝 만하게 실린 기사를 읽으며 깜짝 놀랐었다. [96명의 월남 피난민들을 구출해 준 한국사람 선장(船長), 정진성씨와 그 가족을 미국으로 초청한 월남인 변호사 제임스 누엔(James Nguyen)씨에 대한 기사였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웨스트민스터 시에 사는 33세의 제임스 누엔이라는 변호사와 그의 외삼촌이 되는 43세의 퀴.레(Qui Le)라는 눈먼(盲人)목사가 몇 년에 걸친 수 소문 끝에 본인을 포함하여 96명의 죽어 가는 피난민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한국인 원양어선 선장 정진성(금년 63세)씨를 찾아 내어 그 은혜를 갚고자 미국으로 그와 그의 가족을 초청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월남 타운 전체가 전 민족적으로 환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미국 텔레비전죤에서도 대대적으로 이 감동적인 뉴스를 크게 보도를 하였으며, 가든그로브에 사는 한국사람들도 역시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겠다고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월남 신문과 텔레비죤에서는 연일 한국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다고 특집으로 보도를 하고 있으니 한국 사람들은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지며 지금까지 무시하였던 월남 사람들에게 따슷한 우정을 느끼고 있었다. 신문과 텔레비죤에 비친 정진성씨의 모습은 마치 어느 시골 아저씨 같았으며 아주 겸손한 모습이었다. 월남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칭하는 정진성 선장, 그가 한 일은 이러했다. [ 1975년 6월 15일이었다. 부산에 있는 남영 원양 어업 소속의 참치잡이 배가 멀리 남 태평양에 있는 사모아 섬을 향해 항해를 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이 어선을 책임진 선장은 불과 35세의 젊은 청년 정진성씨였다. 정진성씨가 선장에 임명된 것은 우연의 경로에서 였다. 사모아 섬으로 참치를 잡으러 가게된 원양어선 통영호(統營號)의 본래 선장이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휴가를 내는 바람에 급히 임명된 사람이 바로 젊고 패기에 찬 정진성씨였다. 통영호는 2500톤의 어선으로 항해사, 어부등을 모두 합쳐 22명이 승선을하였으며 어선 내부에는 얼음으로 꽉 찬 참치 저장소(콘테이너)와 선실, 기관실, 휴게실, 갑판 그리고 창고, 식당이 있으며, 만일을 위해 권총, 칼빈등으로 무장된 비교적 잘 갖추어진 아주 쓸만한 어선이었다. 모르기는 해도 남영 어업이 갖고 있는 어선들중에서 가장 좋은 배였다. 그러기에 한번 사모아를 갔다 오면 엄청난 참치를 잡아오기에 기대되는 수입도 엄청 났다. 출항하던 그날 아침에 사장이 직접 나와 선원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통영호는 순조롭게 거문도 남쪽을 거쳐 오끼나와 근해를 지나, 마침내 중국 남쪽 그리고 사이공 동쪽에 해당되는 남지나 바다에서 거친 파도를 혜쳐 가고 있었다. 불과 1개월 반전인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에는 큰 전쟁이 있었으며 우유부단하며 하늘하늘하던 자유 월남이 마침내 공산 월맹에 의해 패망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 남지나 바다는 긴장감이 감도는 공포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통일 공산 베트남(월맹)은 반동적인 월남인들과 중국계 월남인들을 남지나 바다로 내 몰아 소위, '보트 피플(Boat people)' 로 만들었다. 자유 월남에서 고위직으로 있던 사람들과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중국계 월남 사람들은 무조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월남에 남겨두고 한푼도 없는 알몸으로 보잘 것 없는 어선에 실려 멀리 남지나 바다로 쫒겨 나와 기다리고 있던 미국 제 7함대의 군함에 구출되거나 아니면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소위 타이 해적선(Thai Pirates, 泰國 海賊船)'에 의해 무고한 월남 피난민들은 약탈을 당하거나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 가기도 하였다. 그 뿐인가, 젊은 여자들은 강간을 당한 후 바다에 던지워 죽고 말았기에 보트 피플들은 험한 파도와 싸우는 것보다 타이 해적선을 만나지 않아야 하는 고초를 겪고 있었다. 1975년 6월17일이었다. 남지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어선이 있었다. 모터는 고장이 났으며 선장도 없는지 망망 대해에 버려진 아주 오래된 보잘 것 없는 어선이었다. 험한 파도와 싸운지 벌써 며칠이나 되었는지 이 배에 타고 있는 월남 피난민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몇몇 청년들은 살겠다고 안간힘을 다해 스며드는 바닷물을 바께츠로 퍼내고 있었으며 나이든 몇 명의 노인들은 갑판에 올라와 흰 셔츠를 들어 지나가는 어선이나 미국 7함대 의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월남 어선은 스며드는 바닷물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어쩌다가 지나가던 일본 어선, 그리고 중국 어선은 모르는 척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어느 나라의 어선도 월남 사람들을 구출하여 주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였다. 운이 좋으면 이 어선은 흘러가다가 인도네시아나 말레지아의 어느 해안에 도달하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어선은 바다에 침몰하여 몰살을 당하는 것이 대부분의 보트 피플과 같은 운명이었다. * 부산을 떠 날 때 통영호도 사장으로부터 아주 강력한 교육을 받았었다. "월남 어선을 만나면 일절 접근하지 말라! 혹시 접근하더라도 음식이나 조금 줄 뿐 절대로 그들을 구출하지 말라. 구출하면 우리가 곤난하다. 미국 함대가 있으니 절대 구출하지 말라!. 만일 월남 피난민을 구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 회사에서 퇴직을 시킬 것이다. 물론 퇴직금도 줄 수가 없다. 동정이나 인도주의 따위는 안 통한다. 알겠는가!" 그뿐인가, 통영호에 승선한 선원들 모두는 주어진 종이에 도장을 찍고 떠났다. "월남 피난민을 구출하다가는 월맹과 중국에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미국 7함대가 구출을 하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자! 그리고 조심하자! 타이 해적선, 인도네시아 그리고 말레지아의 해적선들을! 잘못 하다가는 우리가 죽는다." 통영호의 어선들은 궂게 이 규율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남지나 바다를 지나가던 통영호가 발견한 것은 침몰해 가는 월남의 어선이었다. 노인들 몇 명이 갑판에서 힘없이 흰 셔츠를 흔드는 듯 하였다. 망원경으로 보니 갑판에 단 6명의 노인들만 눈에 띄였을 뿐이었다. 어선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기에 그냥 두면 몇 시간 내에 남지나 바다에 침몰 될 것 같았다. 정진성 선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선원들에게 말하였다. "여섯 명의 월남 노인들을 살려 줍시다. 죽기 일보전이요!" "무슨 말이요! 월남 사람들을 구출하면 우리가 죽소! 그리고 부산으로 가면 우리는 모두 파면이요. 괜한 생각하지 마쇼! 젊은 선장님!" 뜻밖에도 선원들의 반발은 강력하였는데 사실이 그러했다. 통영호가 부산을 출항 할 때, 신신 당부하던 사장님의 훈시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진성 선장은 월남 피난민을 구출하지 못하고 사모아를 향해 배를 몰았다. 월남 어선은 그들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 지고 말았다. "선장님? 잘 결정 하셨습니다. 괜한 일을 하여 보았자 칭찬을 받을 것도 아니고, 허긴 월남은 망하고 말았으니까....그 사람들, 어디로 가든 문제가 아니지요. 어짜피 그 사람들은 죽어야 합니다. 갈곳도 없는 피난민들이니까요!" 고참 선원이 젊은 선장에게 인생을 가르치듯이 조용히 말하였다. "죽다니요? 왜요? 나라를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아니, 뭐, 그런 의미가 아니고...망한 나라의 백성들의 몸값이 그렇다는 거지요." "그럴까요?" 정진성 선장은 먼 바다를 바라다보며 말하였다. -순간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아! 아! 한 중위! 프레이크에서...프레이크에서....") 정진성 선장은 큰 소리로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아니? 선장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곁에 있던 한 선원이 물었다. "이것 보소! 여러분들! 선수를 북으로 돌리시오. 북으로...아무래도 그 어선에 있는 여섯명의 노인들을 구출하여야 겠습니다. 그냥 가면 안됩니다." "예? 월남 피난민을? 말도 안됩니다. 참치를 잡으러 사모아에 가는 것도 바쁜데...." "아뇨! 내가 책임을 지겠소. 그 어선은 곧 침몰합니다. 그러니 여섯명을 구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모아로 가는 길에 미군 7 함대에게 인계를 하면 되는 거요." "예? 무슨 말씀을...아무리 선장이라고 해도 사장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선원들의 반발은 예상보다 컸다. "아니요, 월남 사람들은 우리와 형제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가서 그들의 자유를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을 끝까지 지켜 주었어야 했는데 중간에 그만 두었기에 그들은 망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도와줍시다!" 결국 젊은 선장, 정진성씨의 고집에 의해 통영호는 다시 북으로 되 돌아와 침몰하기 직전에 있는 월남 어선 가까이로 접근을 하였다. 마침내 통영호와 월남 어선은 넓따란 널판자로 연결되어 갑판에 있던 6명의 노인들을 하나하나 구출해 주고 있었는데.... 이게 웬 말인가... 배 밑창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월남 피난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밑창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구해 줍니까? 안됩니다! 우선, 우리 배에 수용할 수가 없고...먹여 줄 양식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모아에도 못 갑니다. 안됩니다!" 선원들은 소리를 쳤다. "아- 아-" 정진성 선장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결국 큰 오산이었다. 여섯 명이라면 통영호에 태워 남쪽으로 가다가 7 함대를 만나 인계 해주고 사모아로 가 참치를 잡아도 된다고 계산을 하였었는데... 배 밑창에서 기어 나온 월남 피난민들이 모두 96명이나 되었다. "아니! 선장님? 96명을 어떻게 하려구요? 우리가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저 사람들을 다 먹여 주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먹는단 말요!" 정진성 선장은 당황하였으나 그는 월남 피난민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리고 닷새를 남지나 바다에서 미국 7함대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미군 함정 한 척을 만나 96명의 보트 피플들을 인계하여 주었을 때 통영호에 남은 식량은 바닥이었으며 선원들도 많이 지쳐 있었다. 반대로 96명의 월남 피난민들은 미군에게 인계된 것이 더 기쁜 듯 그들의 생명을 건져준 통영호와 정진성 선장등에게는 감사의 표시도 변변하게 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망할 놈들! 은혜도 모르는 놈들!" 통영호의 선원들은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화살은 엉뚱하게도 정진성 선장에게로 향했다. "정진성 선장님? 괜한 일을 하셨군요! 어쩔려고 이런 일을 하였습니까?" "알겠습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결국 통영호는 사모아로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고기 한 마리 없는 빈배가 되어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 온 정진성 선장은 결국 남영 어업에서 파면이 되었으며 퇴직금도 못 받은채 쫒겨 나고 말았다. 쫒겨 난 정진성 씨는 그의 고향 마산으로 돌아갔으며 그 후에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세월이 흘러 2002년 가을이 되었다. (망할 놈들..은혜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불리었던 그들 월남 피난민들중에 그래도 정진성씨와 선원들의 은혜를 기억하는 월남 피난민들도 꽤나 있었다. "우리들은 죽음에서 살려준 생명의 은인들...한국 사람들..그리고 정...정...진성 선장님을 찾읍시다. 우리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들을..." 이런 말을 시작한 사람은 금년에 62세가 되는 트랜씨였다. 결국 그는 96명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크라멘트 그리고 텍사스등으로 전화와 편지를 하였다. 뜻밖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반갑게 호응을 하여 주었다. 그들도 그 악몽 같았던 보트 피플의 기억을 잊지 않았으며 정진성 선장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60이 조금 넘은 트랜씨와 42살의 젊은 목사, 퀴.레...그리고 33세의 아주 젊은 변호사 제임스 누엔등이 주동이 되어 옛 은인 정진성씨의 행방을 찾기 시작하였다. 부산에 가보았다. 남영 어업 회사는 이미 없어 졌으며 쫒겨난 정진성씨를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작은 섬에 가서 숨어사는 가 봅니다." 어디에 가서 숨어사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미국으로 되돌아 온 트랜씨는 인근 가든그로브에 사는 한국 친구들에게 호소를 하였다. "우리의 은인, 정진성씨를 찾아 주세요!"라고. 한국 친구들은 너무나 감격하여 백방으로 찾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그들은 거문도(巨文島)의 고도(高島)에 있는 거문 항구(巨文 港口)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고 있는 정진성씨를 찾아내었다. -(동백꽃이 피고 갈매기가 우는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고도(高島)로 된 조용한 섬이며 일찍이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여 영국군이 이년간 주둔하였던 아름다운 섬이다. 이곳에서 정진성씨는 아내와 딸 둘을 데리고 아주 평범한 촌 어부로 살면서 간간히 1975년 6월, 남지나 바다에서 구출해 주었던 월남 피난민들을 생각하며 살아 왔다고 한다.)- 마침내 생명의 은인을 찾아 낸 사실을 안 모든 월남 사람들은 한결같이 발 벗고 나섰다. "96명의 목숨을 구해준 한국인, 정진성 선장을 민족적으로 초청하여 그 은혜를 보답합시다." 그리고 월남 사람들은 비행기표를 사서 보내었으며, 훌륭한 관광 일정을 만들었다. 그뿐인가 그들이 머물 호텔도 최상으로 준비하여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주요 일간지와 TV방송국에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려 신문 방송의 기사로 만들었다. 미국 언론에서 며칠에 걸쳐 이토록 눈물나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보니 '정진성'씨는 일약 유명한 '굿 사마리탄'으로 전 미국에 알려지고 말았다. 마침내 월남 사람들의 영웅인 정진성씨가 어제 미국에 도착하였음을 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바로 오늘 아침,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큰 공회당에서 성대한 환영식이 베풀어 진다고 하였다.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 96명의 월남 사람들을 구해준 영웅 정진성 씨의 환영식에 참석하고자 닥터.강은 진료실을 휴진하고 월남 타운(리틀 사이공)으로 갔다. 가든그로브와 인접한 월남 타운, 리틀 사이공은 이른 아침부터 축제에 들떠 있는 듯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한복을 입은 여자들과 아오자이를 입은 여자들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한국여자가 아오자이를 입었으며 월남 여자가 한복을 입은 경우도 꽤나 되었는데 이유를 물어 보니 한.월(韓. 越)의 우정을 다지기 위하여 의복을 바꿔 입었다고 하였다. 가슴에 장미꽃을 꽂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장미꽃을 꽂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월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진 빚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번에 조금이라도 갚아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정말로 엄청난 축제였다. 한 사람도 아니고 96명의 목숨을 살려준 정진성씨의 사연이 하나 하나 알려지고 있었다. 정진성씨는 96명을 살려준 대가로 회사에서 파면을 당함은 물론 아내로부터도 이혼을 당한 후 고향 마산을 떠나 멀리 거문도로 숨어 들어가 지금까지 어부로 살았으며, 뒤늦게 결혼을 하여 딸 둘을 가졌다고 하였다. "직장도 잃고, 이혼도 당하고?" 닥터.강도 눈물겨웠으며 정진성씨가 가엾다고 생각을 하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과 월남 언론기관 뿐만 아니라 미국 주류사회의 3대 TV방송사인 ABC, NBC, CBS에서 나온 취재 기자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정진성 선장으로 인해 축제 장에 나온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그 자체로 인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마침내 축제는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신문과 방송에서 만 보았던 정진성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그는 월남 유지들의 안내를 받으며 화환을 목에 걸고 식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영웅이라고 하는 칭호를 받았지만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경상도 사람이 엉뚱하게도 전라도 거문도에 가서 고기나 잡으며 동백꽃이나 재배하며 또한 등대직이를 해온 그런 평범한 어촌의 노인이었다. 머리는 희끗희끗하였으며 치열이 고르지 못하여 얼굴은 이글어 진 모습이었다마는 그는 애써 웃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서 지난 30년간의 고생스러웠던 삶을 읽을 수가 있었다. 닥터.강은 연단에서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 안내를 받았기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다 볼 수가 있었다. 닥터.강보다 세 살이 더 많다고 하는 정진성씨를 바라다보노라니 문득 먼 옛날의 일들이 가물가물 그의 기억에서 하나씩 실타래를 풀고 밖으로 나오는 듯하였다. -그러고 보니 35년 전인 1968년 5월이었다. (닥터.강은 1967년 2월,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군의관이 되어 강원도 인제 산골에서 근무를 하다가 자원하여 다음해에 월남 전쟁에 참전을 하였다. 그것이 1968년 5월부터 다음해인 1969년 7월 31일까지였다.) 다시 말하면 닥터.강은 맹호부대의 군의관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나이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전쟁의 포성과 살기 위한 인간들의 잔인함이 눈에서 아롱거리고 있었다. - * 환영식은 월남 타운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사라고 하였듯이 웨스트민스터, 가든그로브의 시장들과 연방하원의원 그리고 경찰 서장들이 참석을 하여 각각 최상의 언어로 축사를 하였으며 큰 선물을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월남 교민 회장과 한인 교민 회장이 번갈아 나와 축사를 하였으며 서로를 격려해 주었다. 한결같이 정진성씨가 한 일을 높이 평가하여 주었으며 그가 한 일을 유엔에 신청하여 '유엔 난민 구호상'을 수상 받도록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도 하였다. 모든 것이 훌륭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뿌듯하게 한 것은 정진성씨로부터 구출을 받은 당사자들의 증언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정진성씨에게 감사하였으며 이 광경을 바라다보는 하객들도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역시 이번 일을 주동한 62세의 트랜 이었는데 그가 한 말은 너무나도 감격적이었다. -"1975년 6월13일 이었습니다. 우리들, 피난민들을 태운 어선은 남지나 바다에서 침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나이는 34세였습니다. 나의 조국인 월남에서 무참하게 배척을 받아 무한정 보트 피플이 되어 허름한 어선에 승선을 하여 파도가 치는 남지나 바다로 쫒겨 나왔습니다. 봉타오에서 떠난 어선은 파도에 밀려 공해 상으로 밀려나오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아 미국 7함대를 만난다면 우리는 살게 되며 아니면 타이 해적선을 만나 노예가 되든지 남지나 바다에 빠져 죽게 된 운명이었습니다. 어선의 배 밑창에서 물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교대로 물을 퍼내며 노인들은 갑판에 서서 흰 셔츠를 흔들어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으나 배는 점점 기울고 있었습니다. 머지 않아 우리는 영락없이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몇척의 어선들이 우리가 탄 어선의 근처를 지나갔었으나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한국어선 한 척이 우리 배를 향해 접근하여 오더니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아마 몇 시간 만 늦었어도 배는 침몰하였을 터인데 우리는 가까스레 구출을 받았지요. 그들이 바로 한국 사람들...그리고 여기 정진성 선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정진성 선장과 한국 선원들로부터 아주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5일간을 남지나 바다에서 미군 7 함대를 만나기 위해 항해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월남 어선에 탑승했을 때, 일행은 모두 12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24명은 남지나 바다에서 죽었습니다. 정진성 선장을 하루 먼저 만났더라면 모두다 살았을 터인데... 미국 7함대에 인계된 우리 월남 피난민들은 괌도(Guam)를 거쳐 마침내 칼리포니아로 와서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정진성 선장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월남 피난민들은 한시도 한국사람과 선장님을 잊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정진성이라는 이름만 기억하였을 뿐 우리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이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우리들은 정진성씨를 찾으러 한국으로 갔습니다마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앉아 있는 '레' 목사님과 그의 조카가 되는 '누엔 변호사'를 만나 도움을 청하였더니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벌써 했어야 할 일을...비록 늦었으나 지금이라도 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한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월남 사람들을 살려준 영웅, 정진성 선장을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찾고 보니 뜻밖에도 그는 우리 때문에 직장도 잃고 아내로부터 이혼까지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조용히 살려고 한국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조용한 섬, 거문도에 가서 동백꽃을 보며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등대직이가 되어 바다에 불을 밝히며 살아왔다고 하던 군요. 우리들 때문에... 정진성 선장님! 우리들을 용서 해주세요.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어떻게 보상을 하여야 할른지.... 우리는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30년이나 되어서야 찾은 우리들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는 정진성 선장을 포옹하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엉엉 울고 말았다. 수많은 월남 사람들도 기립하여 박수를 치면서 같이 울기도 하였다. "아니? 월남 사람들이 이렇게 울면서 감사하다니..." 닥터.강은 눈을 지긋이 감고 말았다. 잠시후--- 닥터.강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눈먼(盲人)목사의 짧은 스피치였다. 금년, 43세가 된다고 하는 비교적 마른 몸매에 온화한 얼굴을 한 '퀴. 레'라는 목사가 연단위로 올라와 더듬거리는 손으로 그를 구출해 주었다는 정진성씨의 두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정진성 선장님? 저는 그날, 불과15살의 소년이었습니다. 누나 그리고 조카와 같이 그 어선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선장님에 의해 구조를 받아 미국으로 와 UCLA대학에 다니던 중, 뜻밖에도 나의 머릿속에 암이 생겼습니다. 뇌하수체(腦下垂體)암이라고 하든군요. 그리고 수술을 받아 생명은 구하였으나, 눈먼 맹인이 되었습니다.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결국 나는 예수를 믿는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목사가 되어 어려움에 처한 월남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한번도 우리를 살려준 정진성 선장님을 잊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언젠가 꼭 만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선장님 덕분에 여기 나의 조카는 이렇게 자라 변호사가 되어 월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많은 백인들을 돕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정진성 선장님!" 눈먼 목사, 퀴.레는 정진성 선장의 손을 꼭 잡았다. 잠시후---- 단 아래에 있던 맹인목사의 조카. '지미 누엔'이라고 하는 젊은 변호사가 단위로 올라와 정 선장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였다. "선장님! 저는 그당시 불과 다섯 살이었기에 상황을 기억을 잘 못하나 삼촌을 통해 선장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때였다. 닥터.강은 1969년 월남 전쟁에서 귀국하기 전 에 보았던 달라트라는 도시와 그곳에서 만났던 그 가족이 기억에서 떠 오르고 있었다. (-두옹 레 장군과 그 가족들이었다. 장군의 딸, 닌(Nihn Le), 그리고 아들, 퀴(Qui Le)였다. 그렇다면 저 단위에 서있는 맹인 목사, '퀴.레' 라는 저 남자가 분명히 두옹 레 장군의 아들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 그 때, 그 소년? 달라트에 살았던 그 소년? 아니겠지? 아냐, 그 사람일거야. 설마...' 닥터.강은 눈을 크게 뜨고 눈먼 목사를 뚫어지게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조카라는 변호사에 대한 느낌도 있었다. '아! 아! 그렇다면, 닌의 아들? 닌의 아들?' 지미 누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다보았다. 참으로 잘 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통해 떠오르는 여인, 닌의 모습이 선명하였다. 아- 닌! 닌! 월남 중부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달라트와 그 도시 한 복판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에 작은 유람선이 떠 있는 듯 하였다. 그리고 달라트 북서쪽에 있는 우람한 호수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눈에 떠오르고 있었다. "강 중위님? 여기에서 손을 놓으면 우리는 영원히 못 만납니다. 그러니 이 손을 꼭 잡으세요. 놓지 마세요. 강중위님?" 아름다운 달라트의 한 여인이 닥터.강, 아니 강석호 중위(姜錫浩 中尉)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 닌? 닌?" 닥터.강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 환영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닥터.강을 더욱 더 감격하게 한 것은 정진성 선장의 답사였다. 거문도에 사는 63세의 초라한 한 어부의 얼굴에서 30여 년의 고달픈 인생을 읽고 있는 듯 하였다. 그는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면서 아주 간단한 답사를 하였다. "여러분! 제가 한 일은 아주 당연한일이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어느 사람이라도 그런 상황을 보았더라면 나와 똑 같은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결코 영웅이 아닙니다. 이렇게 저를 잊지 않고 초청하여 주셔서 저는 살아 생전에 아름다운 미국을 구경하게 되었으며 특히 디즈니랜드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나에게 주신 선물로 주신 돈은 너무나 과분합니다. 그러기에 이 돈을 월남 사회에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월남 피난민들을 위해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월남 시민 여러분들!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부디, 한국 사람들과 형제처럼, 다정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주 친절하게, 형제처럼....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정 선장의 답사가 끝나자 우래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졌으며 여기저기에서 흐느껴 우는소리도 들렸다. (그 곳을 지나가는 어느 사람이라도 그 환경이었으면 나와 같은 일을 하였을 겝니다. 제가 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닥터.강의 귀에서 이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왜? 선원들의 강력한 만류에 의해 구출해 주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항해를 하다가 다시 돌아와 구출을 하였는데 왜? 되돌아 왔을까? 왜? 무슨 이유로 다시 돌아와 월남 난민들을 구출하였을까?' 닥터.강은 그것이 궁굼하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여 주려고 하다가도 어떤 이유가 생기면 그것을 핑계로 아주 포기하고 사라지는 것이 상식이었다마는 정 선장은 왜 선원들의 강력한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돌아와 96명이나 되는 피난민들을 구했는지 그것이 위대하였다고 생각을 하였다. 닥터.강은 환영식이 끝난 후 꼭 정선장에게 '왜 다시 돌아와 구해 주었는지'를 물어 보리라고 다짐을 하였으며 아울러 눈먼 목사와 그의 조카라는 제임스 누엔 변호사를 만나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환영식을 지켜 보았다. '퀴.레?" "누엔?" 어찌된 셈인지 반가운 이름이었기 때문에 따로 보고 싶었다. '퀴.레? 퀴.....' 달라트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두옹 레 장군과 그의 딸, 닌. 레가 생각났다. 1시가 넘어서야 행사가 끝났다. 닥터.강은 틈을 보아 정 선장을 만나려고 가까이 가고 있을 때, "삐-삐-"하며 비퍼가 울리고 있었다. 응급 환자가 진료실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급히 돌아가야 했다. '아! 그냥 돌아가야 한다니...정선장과 퀴레를 만나 보아야 하는데....' 닥터.강은 할 수없이 진료실로 되돌아 가고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흐믓한 감정이 꽉 차이었다. "과연 월남 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이구나! 은혜를 갚음은 물론 우리네 한국 사람들과 친구가 되겠다고 먼저 손을 내 밀지 않았던가..한국사람들이 하지 못한 일을 그들은 해 냈어. 그들이 먼저..." 아주 뿌듯한 하루였다. 정진성 선장, 트랜씨, 누엔 변호사, 퀴.레 목사님,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나 눈 앞에서 아롱거리는 '닌 레'의 모습이 오늘 하루 종일닥터.강의 눈 앞에서 아롱대고 있었다. 3장. 두 번째 사건이란? 닥터.강은 진료실로 돌아와 응급 환자와 오후 환자들을 진료하였지만 마음은 들떠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정진성 선장과 맹인 목사, 그리고 누엔이라는 젊은 변호사를 못 만나고 온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오후 5시가 되어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뜻밖의 전화가 울렸다. -정신과 의사인 제임스 야마시로(James Yamashiro, 山城)에게서 온 응급 전화였다.- "닥터.강? 나를 좀 도와주세요! 나의 환자를 진료해 주세요. 그 환자는 지금 브레아 정신병원에 있는데 며칠 전부터 폐렴이 악화되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닥터.강이 빨리 가서 힘 좀 써 주어야 하겠습니다. 가능한 오늘 저녁, 아니, 지금 당장...브레아 정신 병원에 가 주세요." "정신 병원에?" "예, 내과 병동에 있습니다. 여자환자입니다. 이름은 로즈. 맥.나이트(Rose McKnight)라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닥터.강은 약속을 하였다. * 닥터. 제임스 야마시로란(醫師 山城)? -그는 금년 51세가 되는 일본인 3세의 미국 시민이며 일찍이 예일 의과대학(Yale)을 나와 전문의사가 된 유능한 정신과 의사이다.- 닥터.강과 그는 어쩌다 만나거나 환자를 보내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같은 동양 사람이기에 닥터.강은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 친구가 되려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그의 호감을 사려고 한 적이 있었다. "제임스? 고향이 규슈(九州), 오이따(大分)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오이따라면? 그 유명한 벳부(別府)온천이 있는 곳이 아닙니까?" "오이따라고요? 나는 그런데는 모릅니다. 나의 고향이요? 천만에, 나의 고향은 콜로라도 주, 덴버입니다. 이차 대전 중에 일본 사람들을 격리 수용했다고 하는 그 곳 말입니다. 아시겠소?" "아! 그러세요. 미안합니다. 그래도 혹시 기회가 되면 나도 한번 오이따에 가봅시다. 관광으로 말입니다." "관광으로요? 허긴 나의 할아버지는 그곳에 살기는 살았으니까... 원한다면 한번 가보시지요. 원한다면?" 처음에는 비교적 냉랭하게 대화가 시작되었으나 예일 의과대학 출신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 닥터.강은 그런대로 친해지고 말았었다.- * 저녁을 먹지도 못하고 닥터.강은 가든그로브에서 약 5 마일 정도 북쪽에 있는 브레아 정신과 병원(Brea Psychiatric Hospital)으로 차를 몰았다. 브레아 정신과 병원은 흔히 뉴욕이나 한국에서 보는 그런 우중충한 정신병원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층으로 된 아담한 건물과 병원 입구에 우뚝 솟은 야자나무가 시원시원하였으며 정신병원 답지 않게 창문에는 쇠 창살이 없었다. 그뿐인가 병원 수위도 밝은 유니폼을 입었으며 권총이나 곤봉도 없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닥터.강은 급히 건물 이층으로 올라 갔다. 내과 중 환자실(重患者室)이라고 쓰여진 병실로 들어가니 금발의 간호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였다 "닥터.강이시죠? 닥터.야마시로의 환자는 여기 이 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진료 챠트는 여기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서두르세요." "아! 이 환자요?" 닥터.강은 챠트를 읽기 시작하였다. [환자는 금년 57세. 미세스 로즈 맥.나이트씨(Mrs.Rose McKnight)이며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한지 금년이 3년째가 됨. 전혀 말이 없음. 남편은 61세이며 현재 칼 스테이트 대학(Cal. State University)에서 경제학 교수임. 환자는 동양화가임. 최근의 병력: 2주전부터 폐염이 악화되어 항생제를 투여하고 있으며 이틀 전부터 호흡이 악화됨. 산소를 주고 있음. 오늘 갑자기 악화되어 내과 의사 닥터.강에게 환자를 의뢰함.] * 닥터.강은 청진기를 꺼내 들고 환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여자 환자 곁에 젊은 처녀가 앉아 있었다. "닥터.강입니다. 닥터.야마시로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잠시 진찰을 하려고 합니다." 젊은 여인은 환자의 딸이라고 하였다. 금년 21세의 UCLA 대학생이었는데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을 적당히 섞은 혼혈의 미인이었다. 그러나 57세라고 하는 여자 환자는 뜻밖에도 동양 사람이었으며 폐염이 꽤나 진전이 되었는지 호흡이 거칠며 죽기 일보 전 같았다. 응급으로 혈중 산소치를 측정하였으며 산소 마스크를 씌어 주었으나 별 차이는 없었다. 동양 여자인 이 환자의 얼굴은 흉물스럽게 이글어 져 있었으며 악취가 몸에서 나고 있었다. 세수를 며칠째 안 했는지 얼굴에는 군덕 군덕 무엇인가 붙어 있었으며 머릿칼은 헝클어 져 있었다. '와! 웬 여인이 이토록 더럽단 말인가!' 닥터.강은 숨이 막히는 듯 하였으나 가까스레 참았다.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 그는 더더욱 악취를 느끼고 있었다. 우울증이 얼마나 심하였기에 이토록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퇴행이 되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 아마도 대 소변도 침대에서 싸고 있다고 느껴졌다. 잠시 후에 보고된 혈중 산소치는 놀랍게도 55%밖에 안되었다. "간호원! 호흡기계를 써야겠습니다. 급히 호흡기계를 보내주시오!" 닥터.강은 급히 환자의 머리를 뒤로 제치고 입을 크게 벌려 푸라스틱으로 된 호흡기 튜브를 기관지로 삽입하였다. 그리고 준비된 호흡기계를 연결한 후 100% 산소를 연결하여 주었다. 놀라웠다. 잠시 후, 환자의 얼굴이 다소 붉어지기 시작하며 호흡기계는 정해 준 대로 일 분당 16번씩 움직이고 있었다. "휴!" 닥터.강은 안도의 숨을 몰아 쉬면서 간호원에게 오더(Order)를 하였다. 규정상, 카운티 UCI 병원으로 이송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앰뷰란스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한 일들을 잠시 환자의 챠트에 기록하였다. [페염으로 인한 호흡 부전증이 심하여 호흡기계에 연결하였으며 카운티 병원으로 이송하여야 함.] 금발의 간호원은 감탄 한 듯이 닥터.강에게 말하였다. "과연 내과 의사가 필요 하군요. 정신과 의사하고는 또 다르군요...." 잠시후, 앰뷰란스에 실려 정신 병원을 떠나 카운티 병원으로 이송되는 정신과 환자를 닥터.강은 바라다 보며 퍼뜩 놀라고말았다. '일본 사람이 아닌 것 같군! ' 사실,닥터.강은 이 환자는 당연히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였었다. 왜냐하면 닥터.야마시로가 일본 사람이기에.... '로즈? 로즈? 맥.나이트? 맥.나이트? McKnight?' 맥.나이트라면? 혹시 옛날, 닥터.강이 아주 어렸을 때, 청주에서 보았던 그 미국 사람의 이름과 너무나 같았다고 생각을 하였다. '맥.나이트?'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알던 그 맥.나이트는 아주 깨끗하고 예의 바른 아이리쉬 가족이었어. 아이리쉬!' 닥터.강은 더럽고 냄새 나는 이 동양 여자가 아니라고 부인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에게 또 다른 이름이 생각났다. '혹시? 마크. 맥.나이트를 찾아미국으로 갔다고 하던 그...그...그...한(韓).순(舜).해(海).?' 순해라면? 강석호가 일생을 걸려 기다려 온 그 여인의 이름이었다. 닥터.강이 60이 되도록 결혼을 않고 혼자 뉴욕과 가든그로브를 전전하며 살아 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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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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