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거문도-동백꽃 제 2부

2012.02.02 13:53

연규호 조회 수:674 추천:26

5장. 남지나 바다(South China Ocean)에서 만난 선장과 보트 피플. 잠시 얘기가 과거로 흘러갔었지만, 월남 타운에서 정진성 선장 환영식이있은지 이틀이 되는 날이었다. 닥터.강은 가까스레 정진성 선장을 한인타운에 있는 그의 호텔 숙소에서 잠시 만날 기회를 가졌다. 정선장의 스케쥴이 그만큼 바빳으며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인 관광을 통해 라스베가스, 유타 그리고 월남 사람들에 의해 여기 저기로 초대되어 다녔기에 그를 잠시 만나게 된 것도 여간한 다행이 아니었다. -정진성 선장을 그의 호텔 방에서 만면서, 닥터.강은 마치 시골의 한 촌 노인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마치 여수 앞 바다에서 2시간이나 떨어진 거문도에서 붉게 타는 동백꽃을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동백 꽃잎에 새겨진 사연"이라도 있는 듯 하였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참치잡이 어선의 선장으로 발탁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유망한 젊은이 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남영 수산 회사, 사장의 사위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사 사장의 사위라고요? 어떻게?' 정진성 선장은 마산에서 태어나 진해에 있는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LSD를 타고 해안경비를 하기도 하였다. 1972년, 잘나가던 해군 소령 정진성씨는 뜻밖의 안전 사고를 당하였다. 갑판에 서있던 그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면서 바로 아래 층으로 미끌어져 떨어졌다. 그때 그는 오른 쪽 손목과 갈비뼈의 골절을 당하였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그의 손목은 심줄을 다치면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였기에 의병 제대를 당하고 말았다. 실망한 그는 마산으로 되 돌아 왔지만 그의 꿈은 산산히 깨어 지고 말았다. (해군 제독이 되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멀리 오대양을 다니는 해군 장교의 꿈이었다.) 32세의 노총각이었다. 마침 그는 남영어업에 취직이 되었으며 똑똑하며 해군 사관학교 출신의 소령이라는 이유로 중책을 맡았다. 성심'�일을 하다보니 사장의 눈에 들었다. 마침내 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는 행운도 갖었다. 더 큰 행운이 있었다. 갑작스런 선장의 유고로 그는 통영호의 선장이 되어 멀리 사모아로 가는 중책을 맞게 되었다. 사모아! 그렇다 서쪽 사모아 섬과 동쪽의 사모아 섬(아메리칸 사모아) 근해에는 참치가 많이 잡혔기에 많은 한국 어선이 그곳에서 원양 어업을 하였었다. 사모아로 가는 항로는 반드시 남지나 바다를 지나야 했다. 뜻밖에도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자 수많은 월남 사람들과 중국 화교들은 마치 소 떼처럼 공해 상으로 알몸이 되어 쫒겨 나오고 있었으며 이들을 소위 보트 피플(Boat People)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누구하나 불쌍한 보트 피플들을 구해주지 않았다. 아니 구해 주었다가는 불이익을 당하였다. 오로지 미군 7함대 함정만이 이들을 구하여 미국으로 데리고 가 주었다. 1975년 6월 15일 부산을 떠난 통영호는 마침내 이곳 남지나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보트 피플을 태운 낡은 어선을 발견한 통영호는 처음에는 구해주려고 가까이 갔었지만 선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일단 선수를 남으로 돌려 사모아로 항해를 하다가 정진성 선장의 고집으로 다시 선수를 되 돌려 보트 피플 96명을 구하여 주었다. "다시 선수를 되 돌려 월남 피남민들을 96명이나 구해 주다니..."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 되 돌아 와 구해 주었다는 것..... 닥터.강은 정선장에게 이것이 궁굼하였기에 꼭 물어 보고 싶었었다. "정 선장님? 딱 한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딱 한가지...." "예, 말씀 해 보이소." "정선장님? 월남 보트 피플을 보고 누구도 구해 주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선장님은 다시 돌아와 96명이나 되는 피난민들을 구해 주셨는데, 왜 그랬습니까? 왜? 무슨 이유로 다시 돌아 왔습니까?" ".........." "꼭 들고 싶군요. 무슨 이유가 있었을 텐데요." "꼭 듣고 싶다구요. 사실 그곳을 지나던 어선은 많이 있었습니다마는....일본 어선이나 중국 어선도 있었지만 그들은 도와 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도와 주었다가는 중국과 월남정부로부터 비난을 받게되지요. 마침 우리 어선이 그곳을 지나고 있었지요. 그러나 선원들의 반대와 회사의 방침에 따라 결코 구해 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우리 어선도 구해 주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나의 눈에 떠 오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죽어 가는 월남 피난민들의 모습이었나요? " "아니요. 아니요. 어떤 청년 장교의 죽음이었지요. 어떤 젊은 장교......" "젊은 장교? " "( 그렇습니다. 어떤 젊은 장교의 죽음이었지요. 1966년 2월 어느날이었지요. 부산을 떠난 LSD는 월남으로 파병되는 맹호부대 군인들을 월남 퀴논 항구로 수송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지요. 700여명의 젊은이들의 우렁찬 군가가 부산 항구에서 울려 퍼지면서 LSD 에 승선한 맹호의 용사들은 한결같이 상기된 얼굴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수송을 한 기억이 있기에 별 감동도 없었습니다. 단지 해군대위 정진성이 하여야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었지요. 수송선은 부산을 떠났습니다. 태종대에서 바라다 본 오륙도와 해운대는 이미 우리들의 시야에서 멀어 지고 있었으며 배는 거제도를 지나 남해안에서 멀어 지기 시작하였지요. 그리고 마침내 수송선은 망망한 바다로 나와 남쪽으로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저녁이 오고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중국과 규수의 어디에 쯤 되는 바다 위였을 겝니다. 해군대위 정진성은 캄캄한 밤에 갑판으로 올라 왔습니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있었지요. 문득 나의 시야에 보이는 젊은 장교가 있었습니다. 먼 바다를 물끄럼이 바라다 보며 서있는 사람은 분명코 육군 장교였습니다. 그는 가끔 한 숨을 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던 군요. "이것보게! 귀관! 잠은 안자고..." 나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아! 대위님? "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귀공자 같았으며 양 옆에 붙은 은 색깔의 계급장이 분명코 육군 중위였다. 그리고 맹호 사단의 마크가 눈에 선명하였다. 그리고 나와 그는 이내 친해지고 말았습니다. 육사 X기, 맹호 사단 육군 중위 한 성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 "예? 한성민이라고요? 정 선장님?" "예, 그렇습니다. 한성민 중위였지요." (한성민 중위는 분명히 우울한 사나이였었다. 그는 청주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할아버지는 성공회 신부님(주: 성공회 신부님은 결혼도 하며 가정도 가질 수가 있음)이라고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6.25 전쟁중에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되어 죽었다고 하였다. 당시 7살이었던 한성민은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할아버지인 신부님의 애틋한 울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는 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원한을 품고 살아왔다고 하였다. 군인이 되기에는 다소 어색한 듯이 보이는 이 청년 한성민은 마침내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한성민에게 너무나 뜻밖의 사건이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이 잃은 한성민 생도는 그와 동갑나기인 한 처녀를 사랑하였다. 미술학도였다. 서로 사랑하였으며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마음씨 고운 이 아가씨는 4학년 2학기 어느 가을 날, 우이동 골짜기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낙옆을 온몸에 덥고 죽은지 사흘만에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애인, 한 성민 생도가 있는 태릉에서 멀지 않은 산에 매장되었다.) "한 중위는 이 대목에서 몹시 흐느껴 울던군요. 그리고 그후부터 한 생도는 삶의 의미를 잃고 육사에서 퇴교하려고 하였으나 육사 당국은 불과 몇 개월이면 졸업을 하게 되니 임관은 하라고 만류를 하였기에 그도 남은 몇 개월을 마치고 육군 소위가 되었다고 하든군요. 그리고 그는 일선 소대장으로 경기도 대광리, 휴전선 근처에서 근무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같이 울려 퍼지는 이북 군대의 김일성 선전에 지쳤으며 무엇보다도 먼저 죽은 그의 애인 민 현숙을 잊지 못하여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월남전에 자원을 하였지요. 월남 전에....") "한중위가? 애인이 죽은 후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중위는 정진성 대위에게 물었다. ("한려수로(閑麗水路)가 참으로 아름답군요? 정 대위님? 해군 사관학교에 가신 이유가...바로 한려수로가 좋아서였군요? 그렇죠?"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너무나 뜻밖의 질문에 정대위는 당황하였다. " 한려수로에 있는 섬들 중에 어느 섬이 제일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섬이?" "아! 나는 거제섬, 그리고, 그리고....다 좋습니다." "그러세요? 저는 언제간 육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면 한적한 섬으로 와 조용히 어부가 되어 살아 보고 싶군요. 오늘 이 배를 타고 오면서 내내 이 생각만 하였지요." "어부가 되겠다고요? 아니, 육사 출신으로 성공할 기회도 많은데...하필이면..." "세상을 떠난 '현숙의 목소리가 들리곤 하였지요. 멀리 어디엔가 살아 있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남해안 섬에 와 있는듯 하군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라남도 여수 남쪽에 있는 섬, 거문도(巨文島)라고 생각이 들던군요." "거문도라고요? 거문도!" "예. 거문도요. 월남에 가서 일년간 착실히 근무를 하고 나면 제대가 가능합니다. 그 때, 제대를 하고는 거문도로 가서 조용히 살렵니다. 현숙의 목소리나 들으면서요. 아니, 등대직이도 하고요. 동백 꽃이 피면 그곳에서 잠도 자렵니다." "아-거문도로....이것보소! 한중위? 나도 제대하면 거문도에 가겠소. 동백꽃을 따서 바다에 뿌리기도 하고...고기도 잡고...그렇소 나도 등대직이가 되겠소. 어때, 우리 제대하면 그곳에서만납시다. 한중위?" "아- 그러지요. 좋습니다. 약속합니다. 약속을..." "한중위? 약속하였습니다. 나도!" 정대위도 큰 소리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거문도 섬을 이미 지나왔으며 오끼나와 섬을 지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 다음날 늦게 LSD는 퀴논 항구에 도착을 하였다. 맹호 장병들은 하선하여 보무도 당당하게 마치 개선 장군처럼 맹호 부대로 들어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LSD선은 봉타오 항구로 가서 그곳에서 약 3주간을 정박하며 월남에서 생긴 부상병들을 실어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정진성 해군대위는 봉타오에서 기다리는 동안 헤여진 한중위를 가끔 생각을 하여 보았다. 귀공자처럼 생긴 한 중위, 그는 군인이라기보다 다른 평범한 인생 길을 찾아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보았다. 사랑하던 애인의 죽음으로 인해 눈에 띄게 우울해 진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마치 인생길을 포기 한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제대하고 나면 나도 거문도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 그리고 한중위를 그곳에서 만나자!" 정진성 해군 대위는 다짐을 하였다. 내일이면 봉타오 항구를 떠나 다시 부산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저녁이 되어 캄캄하여 지고 있었다. 부산으로 다시 실려 가는 물건들이 여기저기에 차곡차곡 싸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사 장병을 화장하여 만들어 진 한 줌의 재와 뼈를 넣은 화장함(火葬函)이 운반되어 왔다. 그런데 아! 이게 웬 말인가, 네 모진 화장함 겉에 쓰여 있는 이름을 본 정진성 대위는 소스라쳐 볼랐다. [고 한성민 대위(古 韓晟旻 大尉]] 라고 쓰여 있었다. "뭐라고? 한 성민 대위? 한성민?" 그렇다면 분명히 3주전에 퀴논 항구에서 헤어진 후 맹호부대로 당당하게 들어갔던 그, 한성민 중위가 전사하여 대위로 되었다는 말이었다. "아니! 한중위가 죽었단 말인가?" 정진성 해군 대위는 함을 붇잡고 울고 있었다. "한중위? 어찌 된거요? 어찌된거요? 죽었소? 그럴 리가.... 제대한 후 거문도로 간다고 하였었는데......제대하고 애인이 살고 있을지 모르는 거문도로 간다고 하였었는데...")- * "예? 한 중위가? 한성민은 내 죽마고우입니다. 별 삼형제 중의 하나였지요. 먼저 살아져 버린 별 하나...." "와! 친구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나의 친구....청주에서부터 같이 자랐던, 성공회 신부님의 손자...." "아! 그랬었군요? 그렇다면 나도 닥터.강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중위가 월남으로 자원 한 것이 죽은 애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지요?" "있습니다. 죽은 애인과 총살당하여 죽은 부모님들을 위해서...그렇습니다. 그는 그래서 육군 사관학교에도 입학하였었구요, 그래서 그는 월남으로 갔었지요." -(닥터.강은 문득 1966년 3월 어느날에 있었던 친구 한성민의 장례식을 회상해 보았다. 그랬다. 1966년 3월2일이었다. 그날은 초봄이기는 하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작동 국군묘지에서는 진혼가(鎭魂歌)가 울리며 한줌의 재로 변한 '고 한성민 대위'가 가족들과 친구들의 오열속에 땅속으로 묻치고 말았다. 불과 한 달전, 청량리 로타리에 있는 목로주점에서 친구, 강석호 그리고 김종일과 같이 막걸리를 마시며 월남으로 파병 되는 것을 축하, 아니 위로하는 술판을 벌리고있었다. 불과 일주일전에 한성민은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이 되었기에 은빛 계급장 두 개를 부치고 있었다. (자유 통일 위하여 조국을 지킵시다. 우리는 맹호부대(猛虎部隊), 맹호부대 용사들아!) 목청을 높여 가며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한 성민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그는 일년 3개월 전에 자살하여 죽은 애인 민현숙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친구인 강석호와 김종일은 직감하였다. "모든 것 다 잊어 버리게! 좋은 여자는 또 있는 거여. 또 있어." "석호야? 아무래도 나는 현숙을 잊을 수가 없어. 그녀가 나를 부르고 있어. 그래서 멀리 저 월남으로 가려는거야. 월남에 가서 한동안 다 잊어버리려고...." "월남에? 그래서 가는 거야? 그래서?" "그래. 그곳에 가면 혹시 그녀를 만날 것 같아서..." "그녀를 만나? 그곳에서? 아니? 너 정신이 있는 거야?" 강석호는 소리를 쳤다. "그래, 월남에 가면 혹시 그녀를 만날 것 같아서...." 한성민 중위는 울고있었다. "야! 힘내! 대한민국 육군 중위, 그리고 맹호부대 용사가 울다니...육사 출신이 울다니...." "그래, 안 울련다. 단지 잊어버리려고 한다! 모든 것을...모든 것을...."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월남으로 가버렸었다. 그리고 얼마 후 월남에 잘 도착하였다는 편지가 한 통 날라 온지 불과 삼일 후 국방부로부터 날라 온 전보가 있었다. [고 한성민 대위, 프레이크 전투에서 전사하였음.] 며칠후 고 한성민 대위의 유골이 들어 있는 화장함이 도착하였으며 국립묘지에서 그를 위한 장례식이 진행 되었다. 한성민의 할아버지, 여동생 한순해는 울고 또 울었다. 일년 4개월 전에 죽은 성민의 애인 민현숙의 장례식 때 보다도 더 구슬프게 울었다.)- * "아! 그랬었군요. 한중위가 그런 과거를 갖고 있음을 좀더 잘 알았더라면 내가 갑판에서 그를 위해 더 좋은 위로를 해 주었을 텐데... 어짿거나, 닥터.강? 내가 되 돌아 가다가 다시 돌아와 월남 피난민들을 구출해 준 이유는 바로 갑판에서 만났던 한 성민 중위가 생각이 낫기 때문이었지요. 한줌의 재가되어 한국으로 되 돌아 간 그가 생각이 났었지요. 그가 죽어 한줌의 재가 되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었지요. '아! 전쟁은 싫다. 이토록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니...내 동생같았던 한 성민이 죽다니...그리고 나는 월남 사람들에게 가엾은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나는 궂게 결심을 하였었지요. '이젠 월남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따슷하게 대해 주자. 한 중위에게 못하였던 사랑의 감정을 월남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자'라고. 그래서 나는 다시 뱃 머리를 돌렸지요. 그리고 갑판에서 살려 달라고 하는 그들과 96명을 모두 구해 주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정선장님! 내친구를 그토록 생각하여 주셨다니...마치 나를 그렇게 대해 준 것 같군요." "닥터.강을?" "그렇습니다. 그런데 언제 거문도로 돌아가시렵니까?" "며칠내 돌아가야지요. 월남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환대해 주어서 오히려 부담이 가는 군요. 어서 거문도로 돌아가렵니다. 그리고 삼호교를 지나 (기와집 몰랑)을 통해 활짝 핀 동백꽃이나 보렵니다. 동도(東島)와 서도(西島)가 마주 보이는 곳에 있는 영국군 묘지에도 가보렵니다. 옛날 영국 군인들이 마치 한 중위처럼 그곳에 주둔하면서 멀리 두고 온 연인들을 생각하며 죽었던 젊은 이들의 영혼이 동백꽃에 붉게 물든 거문도에 가서 고기를 잡으며 그리고 등대를 지키며 살렵니다. 거문도(서도)의 능선으로 오르는 365계단을 오르내리며 96명의 월남 피난민과 갑판에서 울던 한중위.....그리고, 오늘 만난 닥터.강과 그 별 삼형제를 기억하렵니다." 정진성 선장은 마침내 닥터.강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닥터,강? 나는 이렇게 왔다가 훌쩍 가버리지만 당신은 의사가 아니요? 그러니 이곳에서 외롭게 살아 가는 저 월남 피난민들을 내 대신 돌보아 주소. 남지나 바다에서 죽었어야 했을 저들을..." "예, 선장님! 대신 선장님은 내 친구의 이름을 잊지 마쇼. 아참! 언젠가 나도 동백꽃이 붉게 핀다고 하는 거문도(고도)에 있는 거문항구에서 선장님을 다시 만나겠습니다. 아니 언젠가 저도 그곳으로 가 선장님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꼭 만나렵니다. 그러니 안녕히 가세요." "오신다면 언제든지 오세요. 기다리지요. 한 중위의 혼이 그곳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으니까요. " "꼭 가겠습니다." 닥터.강은 큰 소리로 약속을 하고 말았다. 닥터.강이 정진성 선장과 이별을 하고 호텔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듯 오후 2시가 되었으며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닥터.강을 찾는 비퍼가 울리고 있었다. 6장.성공회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닥터.강! 나요. 나. 제임스 야마시로, 정신과 의사요!" 그리고 그는 전화를 통해 아주 정중하게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며칠전 응급실을 통해 카운티 병원으로 보낸 그 정신과 환자, 로즈 맥.나이트의 병세가 많이 좋아져서 마침내 내일 카운티 병원에서 다시 브레아 정신병원으로 되 돌아 오게 되었으니 계속하여 폐염뿐만 아니라 그 환자의 내과적인 문제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덧부쳐 말하여 주었다. "닥터.강. 그 환자는 말을 전혀 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얼굴에는 표정도 없는 아주 중증의 우울증 환자이기에 아마 회복되어도 병원 문을 나가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겁니다. 아니면 평생 정신병원에서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겠지요." "아니? 그렇게 상태가 나쁩니까? 아주 불쌍하군요." "그렇습니다. 닥터.강!" 닥터.강은 측은 한 마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로즈.맥.나이트(Rose McKnight)라는 이름이 그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 할 이유는 없었다. -한 줌의 재가 되어 월남에서 돌아 온한성민, 그리고 김종일과 같이 놀았던 그 미국 사람, 마크 맥.나이트라는 이름이 아무래도 로즈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나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한 성민과 그의 여동생, 한 순해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바오로 신부는 닥터.강에게는 아주 잊지 못할 그런 한 가족이었다. 다음날 저녁, 닥터.강은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에 브레아 정신병원으로 우울증 환자 로즈, 맥.나이트를 보러 저녁도 굶은 채 찾아갔다. 정말로 그녀는 폐염에서 완쾌가 되어 숨도 제대로 쉬며 침대에 가만히 누어 있었다. 그러나 세수를 안했는지 아니면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냄새는 계속 나고 있었으며 이글어진 얼굴이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악마'의 얼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뜻밖에도 환자 옆에는 그녀의 남편, 맥.나이트와 딸, 제니퍼가 같이 있었다. 남편은 이미 60을 넘은 전형적인 아이리쉬계통의 백인인 듯 머리칼이 온통 흰 색이었으나 부드러워 보였으며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닥터.강은 습관대로 청진기를 들어 폐와 심장을 검사하였으며 갖고 들어간 챠트를 들여다보며 검사 결과를 주시해 보았다. 역시 환자는 말이 전혀 없었으며 '숨을 크게 쉬라' '숨을 내 쉬라'해도못 들었는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얼굴은 일글어 졌으며 웃지도 않았다. '이 여자는 사람인가? 아니면 원한이 가득찬 악마인가?' 닥터.강은 불쌍한 생각이 들었으며 사람이 우울하다 보면 더 이상의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였다. 옆에 앉아 있는 그녀의 딸도 그러했다. 아무런 관심도 표정도 없이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맥.나이트씨? 환자는 많이 좋아졌군요. 약은 필요 없으며 음식만 잘 먹으면 빨리 회복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환자는 별 말이 없군요?" 닥터.강은 남편에게 경과를 설명하여 주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말이 없은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표정이 없어진 것도 약 3년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병원에 장기 환자로 살아 온 지도 벌써 일년이 넘는군요." "장기 환자라면 아주 중증의 정신병 환자가 아닙니까? 치료가 불가능한?" "그렇습니다. 내 아내, 로즈는 치료 불가능한 중증의 우울증 과 조울증으로 자살도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었지요. 미국 이민의 실패자요, 남편과 나라에 대한 심한 거부 반응으로 오는 향수병 환자입니다." "향수병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내 아내는 한국에서 왔지요. 이미 30여년 전에..." "아? 한국인이군요? 일본 사람이 아니고?" "예, 한국사람, 충청도 사람입니다." "예? 충청도?" 닥터.강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핑 돌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맥.나이트란 이름은 분명히 그 옛날 청주에서 같이 놀았던 그 마크였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맥.나이트? 맥.나이트?" 닥터.강은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닥터.강? 지금 뭐라고 했지요? 왜 내 이름을 거듭 부르셨습니까?" "아, 예. 아. 저..." 닥터.강은 말을 잊지 못하고 갖고 있는 명함을 그에게 주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예, 옛날에 알고 있던 이름이 아닌가해서요..." "그러세요? 아는 이름이라고요?" 마크도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의 명함을 닥터.강에게 건네 주었다. 닥터.강은 병실을 나오면서 흘끔 누어 있는 그 한국 환자, 로즈를 다시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와! 대단히 고약한 중증의 환자로군! " 그는 불쾌한 기분으로 병원을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허기진 느낌이 들었다. *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그의 눈에 띄이는 싸인이 있었다. 맥도날드(McDonald)였다. "아! 맥(Mc)!, 맥.나이트라면? 그래 그 때 그 사람임에 틀림이 없어." 맥도날드에 들려 햄버거를 하나 먹으며 그가 준 명함을 다시 보았다. [칼 스테이트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State) 경제학 교수. 마크. 맥.나이트(Mark McKnight) ]라고 쓰여 있었다. * -마크. 맥.나이트라면? (마크라는 소년을 어린 강석호가 만나 것은 지금부터 무려 36년 전인 1957년이었지만 이보다 3년 전인 1954년의 일을 기록하는 편이 이해하기에 조금 더 편할 것 같다. "왜 하필이면 1954년이냐고요? 그렇습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6.25전쟁 직후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 당시를 기억하는 나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눈물나는 가난과 시련이 있던 시절, 피난민 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거지같았던 소년 강석호가 정식으로 교동 국민 학교로 전학을 하여 당당한 청주 사람이 되던 해였으니까요. 그것보다도 강석호는 한성민과 김종일 그리고 한 순해를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피난민이었던 강석호의 아버지가 정식으로 청주 성공회당의 수위로 취직이 되면서 먹고 살수가 있었다. 강석호가 전학하여 간 교동학교에는 크고 우람한 전나무와 풀라타나스나무가 유달리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학교 운동장에서 동쪽 편을 올려다보면 높은 언덕이 있으며 그 언덕에는 나무가 우거져 마치 깊은 숲 속 같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토록 우거진 나무들이 6.25 동란 중에도 불타지 않고 견디고 있었는가? '라는 의문이 갈 정도였다. 그리고 또 한번 놀라는 것은 그 우거진 나무 숲속 언덕에 빨간 벽돌로 지은 유럽풍의 왕성(王城)이 눈에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청주 성공회당(聖公會堂)이었다. 이 왕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차곡차곡 싼 돌계단이요, 다른 길은 옆길로 돌아서 올라가는 자갈로 된 자동차 길이었다. 성공회당 입구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수위가 일일이 어디로 가는지를 물어 보았으며 행상들이 입구에 너절하게 앉아 떡과 과일을 팔고 있었다. 물론 이 곳 수위실에서 강석호의 아버지는 일을 하였기에 어린 강석호는 자주 이곳으로 찾아 가곤 하였다. 이 왕성같은 성공회당의 주임신부가 바로 석호의 친구인 한성민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58세였으며 성공회당 뒤편에 있는 역시 서양풍의 아담한 단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1950년 8월 어느날, 한성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북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신부님을 대신하여 총살을 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한성민의 부모들은 피를 토하며 쓸어졌으며 인민군에 의해 어디로인가 들려 갔는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 둘은 구덩이에 던져졌다고 하였다. 수복 후, 어린 성민과 순해는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성공회당의 신도들로부터 마치 공주와 왕자처럼 대접을 받으며 바로 아래 편에 있는 교동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강석호가 만난 또 다른 친구는 김종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양조장을 운영하였기에 청주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그리고 김종일의 아버지는 한 신부와 절친한 사이였기에 자연스레 성민과 종일은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가 되였으며 성민과 종일보다 세 살 아래인 순해는 이 둘을 오빠라고 자연스럽게 불렀다. 종일은 성공회당에 다녔으며 때로는 한 신부의 집에서 저녁도 먹으며 잠도 자기도 하였다. 반면, 피난민 학교를 다니다 전학을 하여온 강석호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났으며 아버지가 수위로 일을 하다보니 그도 자연스레 한성민, 김종일 그리고 한순해와 같이 어울리며 한 식구처럼 살았다. 그러나, 어린 강석호의 마음속에는 "수위의 아들, 피난민의 아들"이라고 하는 열등 의식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종일과 성민에게 양보하며 살아 왔다. "모든 것을 다, 종일과 성민에게 양보하고 남는 것이 있으면 갖는다."라는 신념으로.... 더더욱 눈물겨운 것은 한 신부와 양조장 사장은 가난한 수위의 아들인 강석호를 마치 그들의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소년 강석호는 성공회당의 공주인 한순해, 왕자인 한 성민, 그리고 양조장 주인의 아들인 김종일과 친구가 되어 술래잡기를 하였으며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은행잎을 주어 모아 책 갈피 속에 꽃기도 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같이 놀던 곳은 성공회당으로 올라가는 청주의 명소,돌계단이었다. 네모진 돌들로 정교하게 차곡차곡 쌓아 만든 돌계단에는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올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양편으로 우거진 나무 숲으로 인해 굴속을 걷고 있는 듯하였으며 젊은 이들은 가끔 돌계단에 앉아 사랑스러운 얘기를 하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돌계단 난간에 기대어 놀기도 하였으며 다섯 개의 매끄러운 돌을 가지고 공기 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새벽 6시 정오 12시 그리고 저녁 6시마다 성공회당의 종은 규칙적으로 울리곤 하였다. "뎅그렝, 뎅그렝..."마치 에밀레 종처럼 처량하기도 하였다. * 강석호 소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공주같은 한순해와 같이 공기를 하거나 가위바위보를 하여 돌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던 추억이었다. 비록 수위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유럽풍의 신부님의 사택에 가보고 싶었다. "성공회당안과 신부님의 사택"을 한번보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가난뱅이 수위의 아들 주제에 감히 성당 신부님의 집을 보겠다고? 그리고 성당안을 보겠다고? ' 그런데 이 소원이 8 살된 한순해에 의에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었다. 다섯 개의 매끄러운 공기돌을 가지고 돌계단에 앉아 놀다가 실증이 났다. 결국,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높은 돌계단을 올라갔다. 가위 바위보? 그리고 한 계단...높은 계단이었기에 몇 개나 되는지 세기도 힘들었다마는 소년 석호는 아름다운 순해와 같이 돌계단으로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마침내, 성당 입구에 도착하였다. 뜻밖이었다. 그녀는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성당 안은 침침하였으나 자세히 눈을 뜨고 보니 온통 성인들의 흉상이 늘어 서 있었으며 유리창들은 천연색으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도 있었으며 한곳에 가니 어린양을 안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수염 긴 어느 남자의 그림 앞에 섰을 때였다. "석호 오빠? 예수님이야! 예수님." "예수님? 미국 사람 같은데?" "엉, 미국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예수님이야. 예수님을 믿으면 천당에 가는 거야. 석호 오빠!" "예수님?" "그래,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모든 것을 들어 주신데..." "모든 것을? " "그렇다니까, 석호 오빠!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셨대." "죄인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그래.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줄 수가 있어.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오빠를 위해서, 나도 무엇인가를 줄 수가 있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 비록 가난한 소년이었으나 강석호는 세 살이나 어린 한순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뿐인가 그녀는 강석호 오빠를 위해 무엇인가를 줄 수가 있다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어린 강석호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기에 강석호는 한 순해를 어려서부터 사랑하였다. 아니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말을 한 순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런데, 3년이 지난 1957년이 되었을 때 잔잔하던 돌계단의 평화가 깨어지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허덕이고 있던 청주 성공회당에 뜻밖에도 미국 성공회당에서 파견한 신부가 찾아오면서 부터였다. 미국 성공회에서 매년 경제적인 원조를 하여 주는 대신 미국 신부 하나를 파송하였는데 그 신부의 이름이 바로 "피터.맥,나이트(Peter McKnight)"였다. 비록 45세의 젊은 나이였으나 미국 성공회 소속이기에 당연히 57세의 한 신부를 제치고 성공회당을 좌지우지하는 실권자가 되었다. 그에게는 강석호, 한 성민 그리고 김종일보다 한 살 위인 아들이 있었다. 마크 맥.나이트( Mark McKnight)라고 하였으며 덩치도 월등하게 컷기에 중학교 3학년인 이들 삼총사들은 고등학교 일학년인 마크에게 응근히 켕기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마크는 성당 뒤에 있는 사택에 살았는데 그들이 사는 내부는 완전히 서양식이었으며 미국에서 가져온 음식도 많았기에 미국의 어느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였다. 흰 피부에 금발을 한 마크는 더듬더듬 한국말을 하였으나 한국 아이들과는 어울리려고 하지를 않았다. 설령 같이 놀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먼저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크라고 하는 미국 소년이 은근히 한순해를 좋아하는 듯 하였으며 순해의 할아버지조차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듯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들 삼총사와 한순해의 잔잔하며 평화스러운 평형 관계가 한순간에 깨어지고 있는 듯 하였다. 강석호로서는 더더구나 난감하였다. -등록금을 대어 주는 김종일의 아버지를 봐서러도 감히 김종일에게 도전을 할 수가 없었는데 마크라고 하는 강적이 나타나고 보니 더더욱 난감하였다. 너무나 버거운 상대들이었다. 버거운 상대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내가 순해를 좋아 한다고 하여도 나는 마치 상놈이 양반의 딸을 좋아하는 것과 같기에 불가능하다. 나보다 부자인 김종일이 한순해에게는 적격이리라...그리고 김종일 보다는 마크 맥.나이트가 더 강적이리라.......' * 아니나 다를까? 어린 강석호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치욕적인 사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1957년 가을이었다. [찬 바람이 솔솔 불어오며 은행잎이 낙옆이 되어 성공회당의 돌계단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석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에 숨이 차다고 하던 어머니가 방바닥에 쓸어져 정신을 잃고 누어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인근에 있는 순화병원으로 옮겼으나 어머니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성공회당의 도움으로 삼일 후에 어머니는 우암산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히고 보니 석호는 허전하였다. 강원도 철원에서 피난을 나와 고생을 하며 살다가 심장병으로 죽은 어머니를 생각 할 때마다 석호는 성공회당의 돌계단으로 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만나기도 하였다. 토요일 오후였다. 오늘도 석호는 성공회당으로 갔다.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순해를 돌계단에서 만났다. "석호 오빠? 슬프지?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응." "석호 오빠? 나는 엄마도 아버지도 없어. 나, 고아야. 고아. 나도 엄마가 보고 싶어. 그런데 나는 엄마가 생각이 나지를 않아. 아버지도...." "너무 어려서 생각이 나지를 않는구나?" "그래." 소년 강석호는 소스라쳐 놀랐다. '공주같이 예쁜 순해도 늘 웃음을 띄고 있었으나 그 뒷면에는 슬픔과 외로움이 있었구나. 슬픔을 가슴에 품고 살았구나.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가 생각 날 때마다 저기 저 종탑 아래에 외로히 앉아 울고 있었구나. 비록 할아버지가 그토록 사랑을 하였건만 그녀도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구나. 저 종탑에 울려 나오는 종소리는 나에도 그리고 순해에게도 아니, 성민에게도 슬픈 노래였구나.' 문득 소년, 강석호는 순해가 측은해 보였으며 같은 처지인 그녀가 갑자기 더 좋아지는 듯 하였다. 순간 순해가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 "석호 오빠? 우리 계단으로 오르는 게임을 하자. 게임을...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기는 사람이 먼저 올라가는거다. 어때?" 둘은 돌계단 제일 밑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이기는 사람이 먼저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은 44개인데 꽤나 높고 먼 길이었다. 마치 중세기 시대, 수도사들이 무릎을 끓고 한계단 씩 오르듯이....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그리고 그들은 한 계단씩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계단 꼭대기에 먼저 오른 사람은 바로 강석호 소년이었다. 성당 주변은 어둑어둑해 지고 있었다. "이겼다! 이겼어!" 석호는 공주같은 순해와 노는 것도 가슴 벅찬데 게임에서 이겨 먼저 오른 것이 너무나 기뻣기에 함성을 지르며 좋아하였다. 순간 기뻐 소리를 치고 있는 석호의 앞을 가로막는 덩치 큰 소년이 있었다. "이겼어? 이겨? 야! 이 거지같은 자식이! 수위 아들 주제에!" 그리고 큰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악!" 소리를 치며 석호는 계단에서아래로 굴러 떨어지다가 정확히 여섯 계단 밑에서 장승처럼 서있는 순해의 발 밑에서 멈추고 말았다. "마크? 너, 무엇을 하는거야? 나쁜 자식!" 순해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너, 거지같은 석호하고 놀지 말라고 했잖아!" 마크라고 하는 소년이 큰 소리로 타이르듯이 순해에게 말하였다. "석호 오빠! 오빠!" 순해는 발 아래 쓸어져 있는 석호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잠시 후, 석호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으며 일어났다. "아니? 석호 아냐? 많이 다치지 않았니?" 석호를 어루만져 준 사람은 바로 한 신부였다. 그리고 그는 마크에게 말하였다. "마크? 잘 못하였다고 사과를 하거라. 어서!" 한 신부님의 얼굴은 많이궂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크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고는 투덜 투덜 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뒤에 남은 한신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석호? 너 어디 다친데는 없니? 얼굴이 많이 빨갛구나. 우리집으로 가자. 그리고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구나. 미안하구나. 자 어서 가자. 석호야 그리고 순해. 너도." 그러나 석호는 신부님에게 맞은 얼굴을 보여 주기도 부끄러웠으며 더욱이 순해 앞에서 나가 떨어 진 것이 너무나 초라하여, 마치 전투에서 패하고 잡힌 포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냥 가겠습니다. 순해야! 먼저 간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는둥 마는둥 하며 그는 성당 계단을 내려왔다. 마치 패배자처럼... * 이토록 마크와의 만남은 순탄치가 않았으나 세월이 가면서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었다. 강석호, 김종일 그리고 한성민으로 구성된 삼총사의 세계에 마크라고 하는 이질적인 사람이 끼어 들고 보니 하얀 앙금이 생기고 있었다. 다행히도 마크는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미국 칼리포니아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기에 방학 때와 휴가 중에만 볼 수가 있었다. 석호뿐만 아니라 집안이 좋은 김종일도 마크에 대한 부담은 마찬가지로 컸었다. 상대하기가 버거운 미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 석호와 종일 그리고 성민은 고등학교에 같이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삼 년후 석호는 Y의과대학 의예과에 그리고 종일은 S 의과대학 의예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도 성민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너무나 뜻밖의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민이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데는 큰 이유가 있었다. 성민은 6.25동란중에 공산군에 의해 총살을 당한 부모님을 늘 그리워하였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생각보다 깊었기에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하였다는 것이었다. 복수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 항상 같이 붙어 다니던 삼총사들은 마침내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올라 같지만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서울로 유학가는 석호는 공주같은 순해와 종일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석호는 순해를 만나기 위해 돌계단으로 갔다. 혹시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려고 하였는데 석호의 눈에 뵌 것은 뜻밖에도 종일과 나란히 돌계단에 앉아 있는 순해의 뒷 모습이었다. "역시, 그랬구나. 나보다, 종일을 더 좋아하는 구나. 나보다 종일을..." 그러나 그에게는 아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래도,,,종일이가 더 적격이겠지...돈도 많고, 나보다 먼저 알던 사이이니까.." 그는 순해를 먼 발치에서 바라다만 보다가 인사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며칠후 서울로 올라왔다. 비록 종일의 아버지와 한 신부가 학비를 도와 준다고는 하나 그는 생활비와 하숙비를 벌기 위해 고달픈 가정교사의 일을 하여야 했다. * 뜻밖에도 석호의 하숙집으로 날라 온 소포가 한 통 있었다. 청주 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순해로부터였다. -"석호 오빠! 순해요. 왜 말도 없이 그냥 서울로 올라갔어? 종일 오빠는 나를 만나고 갔는데...가정교사를 한다고 하던데...고생이 많겠네. 여기 보내는 것을 두고 먹으며 순해를 생각해 줘요. 동생 순해 드림."- "어! 순해가 나에게 소포를 보내다니? 소포를...왜 안 만나고 갔는냐고? 안 만난게 아니고 못 만난거지." 강석호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도, 순해가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를.." 비록 성공회당 수위의 아들이기는 하나 성당 주임 신부의 손녀가 분명히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생기고 있었다. "그래! 나도 이젠 의과대학생이다. 의대생. 그러기에 누구에게 굽신거릴 필요도 없으며 비굴할 이유도 없다. 졸업하면 나도 의사가 되는거다." 강석호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것만이 가난에서 벗어나며 하질 것 없는 수위의 아들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아니, 그 길만이 혹시라도 순해를 아내로 맞을 수도 있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 죽마고우 한성민은 그래도 여유가 있었으며 낭만적이었다. 비록 육사 훈련이 고되다고는 하나 그에게는 경제적인 부담도 없었기에 주말이면 멋있는 육사 교복을 입고 시내에 나와 청주에서부터 알고있던 한 여대생과 연애를 하였다. 민현숙이라고 하였으며 서양미술(미대 서양화과)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특별한 것은 시 쓰기를 더불어 좋아하였다. '시 쓰기란 상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예술이기에 시인의 마음은 깨끗하며 가난하다'라고 하였듯이 그녀는 마음이 여린 처녀였다. 그러고 보니 성민, 종일, 석호 그리고 현숙등은 모두 하숙을 하며 사는 청주에서 온 무리들이었으며 두고 온 고향과 부모들이 그리운 사람들이었다. 일학년, 이학년 그리고 삼학년...마침내 사학년이 되었다. 청주에서 여고를 졸업한 순해 마저도 서울로 올라와 여대에 입학을 하고 보니 돌계단에서 같이 놀았던 소년 소녀들은 모두 청년과 처녀가 되어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청주 한씨(韓) 답게 순해는 동양화를 전공하는 미술 학도가 되었으며 자연스레 오빠의 연인이며 서양화를 전공하는 민현숙과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청주에 살던 별 삼형제는 순해와 현숙이 사는 하숙집으로 자주 찾아갔으며 보금자리가 되었다. 의과대학생, 육사생 그리고 미술 학도들은 어울려 맥주도 마셨으며 방학중에는 같이 청주로 내려가기도 하였다. 이따금 잔잔한 이들의 세계를 흔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마크 맥.나이트라는 미국 사람이었다. 뉴욕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들어 온 그는 성공회당의 귀공자였다. 아니 미국에서 온 미국 신부님의 아들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와! 마크와 순해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한 쌍이로구먼...순해가 졸업하면 당연히 마크하고 결혼을 하여야 겠네 그려." 그러나 이런 말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강석호 뿐만 아니라 김종일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순해는 이미 나의 며느리로 점 찍어 놓았는데..." 김종일의 아버지도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그래! 순해야, 나, 종일 오빠는 너, 순해를 사랑한단 말야! 알았어!" 김종일도 덩달아 말하였다. 그러나, 강석호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우물 우물 '나도 너를 사랑하는데...그래, 너는 김종일의 아내가 되어야 해. 혹시 종일과 결혼을 안 하면, 나하고...'라고 독백이나 하는 신세였다. *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인가?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다고 하는 것이........ 1964년 가을이었다. 한성민은 육군사관학교 4학년 이학기가 되어 해만 넘기면 졸업을 하여 육군 소위가 되며, 석호와 종일은 의과대학 본과 2학년, 한순해는 일학년 이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민현숙도 4학년 2학기가 저물어 가는 가을날, 11월이었다. 뜻밖의 일, 아니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 일어났다. -평소에 우울증의 증세를 보여 오던 성민의 애인, 민현숙의 끔찍한 죽음이었다. 서양화가가 되고 싶었던 미술 학도인 민현숙은 우이동 골짜기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후 낙옆을 모아 온몸을 덮은채 죽어 싸늘한 시체로 사흘만에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성민씨! 사람이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성민 씨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마치 이차방정식의 포물선의 정점에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올라가고 싶어 더 올라 갈 수가 없군요. 나는 행복합니다. 이 행복함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군요. 그리고 사랑하는 순해! 올캐와 시누라고 부르지를 못하고 그냥 가는 것이 안타깝군요. 6.25때 먼저 돌아가신 순해의 부모님들을 저 세상에서 먼저 가서 뵙겠습니다. 먼 후일 다시 만나요. 바보같은 민현숙 씀. " "아니? 현숙씨가 죽다니? 왜? 왜?" 당사자인 한성민은 물론 그의 친구들인 종일과 강석호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민현숙을 땅에 묻으면서 울고 또 울었다. 민현숙의 시신은 육군 사관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태릉 뒷산에 초라하게 묻혔다. 당사자인 한성민보다 그의 여동생인 한 순해의 슬픔은 누구보다도 더 처절하였다. 서양화와 동양화를 전공하는 같은 여성이며, 한 하숙집에서 한 솟 밥을 먹으며 살아온 끈끈한 사이였기에 순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민현숙의 가족들만이 남아 뒷 처리를 하기로 하여 순해는 하숙집으로 홀로 돌아 가야 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순해가 울면서 강석호에게 부탁을 하였다. "석호 오빠? 집에까지 데려다 주세요." "엉, 나보고? 아- 저기 종일이 오는데... 종일에게 부탁을 하마. 그가 타고 온 집차를 좀 이용하려무나." 석호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냐! 석호 오빠가 날 좀 도와주세요. 나를..." "나더러?" 강석호는 뜻밖의 부탁에 거듭 놀랐다. 종일은 기분이 나쁜지 짚차를 몰고 그냥 가버리고 말았다. 석호는 비틀거리는 순해를 부축하여 산을 내려와 태릉에서 중랑교까지 걸어 왔다. 마침 낙옆이 떨어지고 있었으며 종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보아 저녁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석호 오빠? 언니는 왜 죽어야 했지? 왜?" "..................." 석호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석호 오빠? 나도 죽으면 저렇게 땅에 묻히는 거야. 언니처럼?" "아니? 무슨 소리를 하려는거야? 순해?" "석호 오빠? 나, 오빠를 사랑하면안되나?" "엉?" 석호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그리고 마음의 한구석에 기쁨이 찾아오고 있었다. "석호 오빠? 오빠도 나를 좋아해?" "좋아하느냐고? 응, 물론이지...." "그래, 나도." 석호는 감격하여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공주같은 순해가 거지같았던 석호를 좋아 한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당연히 그는 울고 말았다. 더구나 강적인 종일을 물리치고.. 올케가 되었어야 했던 민현숙을 태릉 뒷산에 묻던 그날 강석호는 순해가 그에게 고백한 사랑의 약속을 몸 전체로 느끼며 평생 간직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래! 순해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너를...내 평생을...] 강석호는 중랑천을 바라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었다. [그래! 순해야. 나는 너를 사랑 해. 너를!] 7장. 30년 만에 만나고 보니.... 다음날 아침. 닥터.강은 마크 맥,나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정신병원에서 만난 후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분명 마크는 분명, 청주 성공회당에서 거지같았던 소년 강석호에게 강한 펀치를 날렸던 그 소년이었다고 확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죠? 마크? 당신이 바로 그 맥.나이트였죠?" "그렇습니다. 제가 마크였지요. 그럼? 당신은 그...강석호씨?" "그렇습니다. 아-이게 얼마만입니까? 45년전이군요..." "와- 그렇군요. 닥터.강!" "그렇다면, 당신을 따라 미국으로 간 한순해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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