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 아는 일?

2004.05.25 01:36

조회 수:734 추천:129

많은 유학생들이 그랬듯이 나도 조교(teaching assistant)를 하면서 미국에서의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했다. 영어를 많이 쓰지 않는 수학과목이었으니 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교를 한지 일년이 지나니 강좌 하나를 맡아 강의하는 강사역할이 맡겨졌다. 한국 대학에서 강의했던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준비에 시간이 좀 들지만 돈도 더 주고 혼자 다 맡아 가르치게 하는 이 강사생활이 훨씬 편했다. 내 영어발음이야 강의 듣는 사람들의 문제였고...
여름학기 첫 강좌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학생들이 내 한국식 영어발음에 익숙해질 무렵이 되니 학기가 끝났다. 학기말 성적은 평균 60점 이하는 낙제라고 미리 공고했다. 이  클래스에서는 한 15%가량이 낙제점수를 받았다. 대부분 강의에 잘 안 들어오는 학생들이었는데 낙제한 학생들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는 57점을 받은 M 이라는 예쁘고 말이 별로 없던 금발의 여학생이었다. 급제한 최하 성적과 5점 가량의 차이를 보여 낙제를 시켜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3번의 중간고사 시험 점수는 점점 내려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며칠 후 밤 9시가 넘어 어떤 여자가 혼자 사는 내 아파트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M이었다. 낙제한 성적을 보고 과 사무실에서 내 주소를 물어 벌써 몇 번째 찾아왔었다고 하면서 자기 성적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마침 채점한 시험지를 집에 보관하고 있어 그걸 돌려주면서 낙제한 학생들의 성적은 몇 번 다시 확인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어떻게 안되겠냐고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시험을 보라면 보겠고 숙제를 더 준다면 다 하겠는데 낙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낙제를 하면 집에서 학자금이 끊긴다는 말과 함께 자기는 이 과목만 마치면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앞으로 수학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하면서 제발 한번만 봐달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여자의 눈물을 보면 어쩔 줄 몰라 불편해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내가 불안해서 그러는 줄 알고 자기 성적을 고친다고 해서 나의 (강사로서의) 평가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과 사무실에서 확인하고 왔노라고 설득을 시작했다.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제발... 이라고 부탁하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난 한국에서 온지 일년밖에 안된 총각이었고 학생에게 동정심이 엄청 많은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어쩔까 생각하면서 예수님처럼 뭔가 쓰는 척 종이 위에 낙서하는 것을 보고 M이 내 흔들리는 마음을 읽었던 것 같다. 확실하게 승리를 굳히려고 그녀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내가 다 들어줄 수 있어. 무엇이든 말이야. 그리고 이 일은 우리 둘밖에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왜 이 말이 내 자존심을 그렇게 건드렸는지 모른다. 당장 “나로선 어쩔 수 없구나. 한번 새운 원칙을 어길 수 없으니 다음에 이 과목 수강할 땐 열심히 하라고 밖에 할 수 없구나. 한번 학교 당국에 어필을 해보거라. 나의 손에선 벌써 떠난 문제니까.” 라고 말하면서 다른 곳에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가야 한다고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울면서 나간 이 여학생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다. 그리고 캠퍼스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 정말 다급한 사정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학위를 마치고 버지니아의과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을 때 여학생들에게도 남학생에게 대하듯이 야단도 치고 무섭게 대하게 된 먼 원인이 아마 M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무서운 선생이라고 소문나는 것이 찔찔 짜는 모습을 보면서 달래야 하는 일보다 편하니까. 그러고 보니 내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들 거의가 남학생이다. 남녀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여학생의 사정을 잘 모르고 무섭게 몰아 부친다는 소문이 돌아서 여학생들은 아예 내 밑에서 학위를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난 사실 여학생들을 잘 이해 못한 것이 아니라 여자라는 것을 이용하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까 두려워 그랬을 지도 모른다.
학생들에게 동정심이 많아진 요즘 다시 옛날 그 사건이 생각난다. 그 때 M이 하소연한 말대로 3점 차이로 낙제를 해서 다시 과목을 듣는다 해서 더 얻을 것이 무엇이었을까? 수학의 지식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의 자존심은 좀 구겨졌겠지만 그냥 급제를 시켜주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지 않을까? 정말 다급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매정하게 쫓아버린 일이 마음에 걸려 병원에서 간호사를 볼 때마다 이름표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낙제점수를 받은 것이나 날 찾아와 학점을 구걸했던 일 때문에 당시 그녀의 자존심은 많이 상했겠지만 그 뒤로는 다시 여자라는 것을 이용하지 않고 좋은 간호사가 되어 남자와 대등한 입장에 선 사회의 버팀목이 되어 있을 거라고 기대해본다. 이 세상은 남자만으로 버티기엔 너무 힘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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