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2004.01.08 13:01

전지은 조회 수:844 추천:90

전 지은
갑신년 새해가 밝은 지도 이미 일주일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지난 한해는 말 그대로 숨차게 다사다난했다. 그런 이유를 빌미로 연말엔 성탄카드, 연하장 하나 보내지 못했음은 물론 누구에게도 선물 하나 준비하지 못한 채 각박하고 삭막하게 한해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여러 가지 핑계로 한번 놓쳐버린 삶의 여유는 다시 추스르기에 힘에 겨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맙게도 멀리 떠나온 우리들을 잊지 않고 새집에 어울리는 선물을 보내준 문우도 있었고, 또한 나의 게으름과 핑계를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송구스럽고 감사한 일인데 사이버 공간을 이용해 아름다운 음악과 그림을 전해준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선물.
재작년 연말엔 코스코에서 파는 사춘기 소녀들이나 씀직한 들고 다니는 화장품 세트였다. 각종 색조 화장품들과 알록달록한 매니큐어 등등, 네모난 작은 철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 정성 드려 화장을 하고 가꾸는 일과 전혀 상관이 없는 나의 모습을 탓하는 것 같기도 했고, 이젠 좀 분단장 할 나이가 되었다는 이야기 같기도 해 기분이 묘했다. 이어 이번엔 현금이 들어 있는 작은 봉투, 그 겉봉엔 <꼭 머리 손질을 할 것!>이라고 써 놓았다.
날씨가 차갑고 건조해 머리는 늘 부스스하고 얼굴은 꺼칠한 요즈음의 내 몰골이 얼마나 그의 시선에 걸렸을까. 언제부턴가 물감을 들이지 않으면 이마 양옆으로 소록히 돋아 나는 흰머리가락들을 새치라고 주장하며 감추기에 힘들었다. 크게 소리내어 웃기라도 하면 옆에서 쳐다보며, 좀 우아하게 미소만 짓지 그렇게 크게 웃으니 눈가의 주름이 자글자글 하다며 타박을 받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의 얼굴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고 보면 자연 상태에선 예쁜 것과 전혀 상관이 없게 생긴 '나'야 말로, 지금쯤은 조금씩 감추고 가꾸는 모습을 지니도록 노력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외향보다는 내실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늘 그에게 반박해 왔던 나는 얼마나 내적인 모습에 자신이 있는가.
가슴을 열고 들여다보면 그 안엔 너무나 많은 허영과 오래된 오만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쯤 이것들을 꺼내 버리며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자만이라는 고질병의 치료제는 무엇일까. 그것을 새해의 화두로 둔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에게도 고운 화장을 시키고 악취를 없애 줄 향수를 살짝 살짝 뿌리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고 평화의 옷을 입히고 싶다.
오늘 아침엔 아직 비닐 겉포장이 뜯기지 않은 화장품들의 뚜껑을 연다. 색조 연필을 꺼내 손등에 그어보며 색을 확인하고 비슷한 톤의 립스틱을 찾아 둔다. 내일은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가능한 빠른 시일 네로 약속을 잡아야겠다. 언젠가 아이가 사다준 고운 향의 향수병도 눈에 띠는 곳엔 둔다.
내가 세상에 첫울음을 내었던 병신년, 올핸 간지가 네 번 돌아, 다시 잔나비의 해가 되었다. 나의 해, 나이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얼굴과 동시에 가슴의 안쪽, 속마음도 가꾸어지는 새로운 모습으로 조금씩 새로 나고 싶다. 그의 선물에 감사하며.

(한국일보, 목요칼럼,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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