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쥔장은 여행 중이군요

2003.01.14 23:36

전구 조회 수:103 추천:10

그러나 빈집 같이 보이지 않게 전등 켭니다.
백열전구의 은은한 빛처럼 미소가 더오르는 글 하나 드리고 갑니다.

아름다운 뒷모습

비가 세차게 내리던 금요일 오후,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버스에 올랐다. 종점까지 가야했던 난 제일 뒷자리에 앉았는데, 바로 내 앞 좌석에 앉은 두 소년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잠시 뒤 한 친구가 내리고 내 바로 앞 소년만이 남게 되자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몇 정거장 지나 할머니 한분이 힘겹게 차에 올랐다. 뒤따라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에 오르는 동안 할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며 앞쪽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 앞에 있던 소년이 일어섰다. '아까 친구와 하는 얘기로는 내리려면 멀었는데 벌써 내리나' 싶어 괜한 궁금함에 소년을 지켜봤다.

소년은 앞으로가 할머니를 모셔오더니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드렸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 주었다.
"딸이 사 줬는데, 별로 맛이 없어. 어때? 맛있지? 역시 딸이 최고라니깐."
할머닌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하면서도 무척 기뻐하셨고, 손주 같은 소년을 옆에 세워두고 이런저런 얘길 하셔따. 그러는 사이 소년은 내릴 곳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소년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잠시 멈칫하는 듯했지만 차마 할머니의 말을 끊을 수 없었던지 그대로 할머니와 함께 종점까지 갔다. 소년은 할머니를 부축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리던 나는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학생은 어디까지 가? 이 정신없는 노인네는 내릴 때를 지나쳤구먼."
그러자 소년도
"저도 몇 정거장 더 왔어요" 하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마주 보고 웃다가 돌아 나가는 버스에 또다시 나란히 올랐다. 그들이 또 반대편 종점까지 가지 않길 바라며 난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최주영 / 경북 포항시 용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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