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의 일기

2004.11.07 19:23

꽃미 조회 수:210 추천:26

지은씨.

참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내 집 사랑방은 잠궈두고 전혀 남의 집 방문도 안했는데
이 가을날 보내온 지은씨의 메일이 날 움직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여긴 서울입니다.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서울여행입니다.
그것이 다 좋은 일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슬픔도 때론 부끄러운 일이란 것이 새삼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지난 6월 큰오빠가 떠나셨을 즈음,
병원을 들락거리던 둘째오빠의 건강에 대해
석연치 않은 마음을 품고 미국으로 갔는데
가을이 시작되던 때 연락이 왔더군요.
살아 계실 때 와서 뵈라구요.

어찌하나 어찌하나 혼자 서성이며 울다 기도하다 성령기도회에도 가고
혼자 마음을 추스리던 즈음 아마도 제 목로주점을 닫았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말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 힘들었거든요.

그리고 정말 위태롭다는 소식이 다시 날아왔을 때
열 일 제쳐두고 서울로 왔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동안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오빠와 대화도 하고 병수발도 들어주고
고속도로변의 들판에 가을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단풍이 절정이던 지난 10월 29일 아침,
오빠는 운명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임종도 못지킨 내가 무슨 인연인지 오빠의 임종을 보았습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집 그곳에서 말입니다.
오빠의 육신이 평화로워지셨다는 것에 눈물도 마르고
정성스런 장례절차를 거쳐 부모님 산소 아랫단에 오빠를 묻었습니다.
오빠를 묻고 돌아오며 나는 한 마디 했죠

오빠야! 좋으냐?
형제간 중 혼자 고향집 부모님 곁에 제일 오래 살더니
엄마 아빠 곁에 묻히니 좋으냐?

슬픈 투정을 부리고 서울로 돌아온 것도 벌써 몇 날이네요.
콜로라도로 가고 싶다던 가을을 한국으로 와 흠뻑 맛보고 있습니다.
슬퍼도 가을은 아름답고
13년만에 고국의 가을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근 4년 동안 혈육 네 사람을 보내며 조금은 얼이 빠진 나의 생,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지요.
무남독녀인 그대는 나 같은 슬픔은 절대 겪지 않을 겁니다.
자랄 때는 형제가 많아 북적거림이 좋더니
세월이 가니 슬픈 일이 많습니다.
여섯에서 절반이 뚝 잘라 떠나고 이제 셋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떠난 분들이 남겨둔 조카들로 아직 집안은 북적거립니다.

산다는 것, 이런 것인가 봅니다.
태어나고 죽고...
아마도 산자의 의무는 죽은 자를 정성스레 잘 보내는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또 나의 죽음을 지켜주겠지요.

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사연을 일기처럼 여기 쓰고 갑니다.
위령성월에 떠나간 영혼을 기리며... 꽃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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