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마음엔 농담이 안 통해

2004.05.02 09:52

노기제 조회 수:679 추천:114

050903 경건한 마음엔 농담이 안 통해
노 기제
한 달쯤 지났다. 중학교 동창이 경영하는 여행사 웹 싸이트에 들어가 좀 심하게 장난을 했다. 나도 그런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이더니 나이가 들면서 변했다. 이왕이면 잘 생긴 외모 칭찬해주고 어릴 적 잠깐이나마 눈에 띄고 마음에 닿았었던 얘기 그냥 게시판에 올려놨다. 그러면서 난 유유자적 푸근해했다. 그러나 한 번으로 끝났어야 했다.
재빠르게 답글이 왔다. 반갑다는, 그리고 칭찬 받아 쑥스럽지만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고. 허기사 그 정도는 수 십 년 아니 평생에 처음 주고받은 얘기이니 인사로라도 반갑다 고맙다 정도는 상식이었으리라. 남녀공학이었지만 학급이 다르니 3년 동안의 공유했던 세월이 그냥 얼굴만 스쳐 가는 정도였다. 딱히 한 학생을 두고 사모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 드는 여러 명을 떠올리며 그 때 그 심정을 꺼내 놓았을 때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특히 같은 여학생들의 반응은 야 넌 도대체 몇 명이나 찍었던 거야? 선생님 한 분인 줄 알았는데 라며 제법 분노를 곁들인다. 뭘 그 정도에 놀래는지. 대신에 난 연애를 안 했지. 그렇게 여러 사람 괜찮아 하면서 커갔으니까.
이를테면 그 사람의 장점을 말해주지 못한 어릴 적 세월을 이젠 아끼지 말고 표현 해 주자는 것이 나의 본 뜻이다.
베푸는 마음을 잘 적용하며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줄 알았는데.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 계속해서 써 보낸 나의 다분히 장난기 섞인 글귀가 아니다 싶었는가. 한 달이 지나도 답 글이 없다. 여행사 싸이트 게시판이니 온통 여행에 관한 질의 응답 뿐인데 또 주책없이 투정을 부려놨다. 방해 돼도 할 수 없다는 둥, 한 달이 지나는데 메일이 도착 안 했냐는 둥, 내 싸이트에도 들어와 보라는 둥 좀 귀찮은 주문만 잔뜩 올려놓곤 하루를 보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전자 우편시대에 걸맞게 미국시간 아침나절에 써보내곤 하루종일 내 일상을 지낸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우편함을 연다. 그러니 하루가 걸리는 셈이다. 이번엔 게시판으로 직행하지 않고 그 여행사 소개 글을 찾아 읽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여행사입니다 로 시작하는 짧은 소개 글은 합심하여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도록 진심을 다하겠습니다 로 맺었는데 내 뒤통수는 얼얼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어제 올려놓은 내 글이 사라졌다. 아하. 주님 감사합니다. 이쯤해서 곁길로 빠지려는 나쁜 습성들 바로 잡아 주심에 감사한 마음이다. 현기증이 날 듯 푹 주저앉고 싶은 건 부끄러움이다. 주님의 사업도 아니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아닌 것에 시간과 정열을 쓰는 것은 분명 낭비다. 답 글을 기대하고 열어 본 게시판에 답 글은커녕 내 글마저 지워버린 하나님의 경고를 고개 숙여 받고 있다.
다시금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하나님께 눈을 맞추고 경건의 매무새로 고쳐본다. 무엇을 위한 농어린 칭찬이었나. 잘 생겼다. 어릴 때 벌써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다가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에겐 불 경건한 오물 같은 말장난이다. 헛구역질을 하면서까지 듣기 싫어하던 말장난을 이젠 내 스스로가 하고 있다니 흘러간 세월을 핑계해봐도 찡그려진 얼굴을 펼 수가 없다.
여행사 소개 글을 프린트로 빼 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는다. 내가 하는 선교방송에서 청취자들에게 낭독해야겠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는 실족하지 않겠다는 표징으로. 그래도 칭찬하는 일엔 인색하지 않겠다. 단지 진정과 애정을 곁들이는 칭찬이다. 농담으로 지나치는 칭찬이 아닌 한 번으로 족한 무게 있는 칭찬은 주님께서도 권장하실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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