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 속에 숨겨진 축복

2004.05.02 07:41

노기제 조회 수:471 추천:104

112400                        글마루 수학 여행

        정말 시시한 일도 다 있어요. 여행이라 이름 부치기엔 얼굴이 간지럽군요. 까짓 두 시간만 운전하면 도착하는 곳인데 거창하게 '글마루 가족여행' 이란 제목도 장난 같기만 하구요. 이런 계획을 위해서 시간은 또 얼마나 버렸게요. 제출된 작품이 수북한데 계속 여행 안건으로 의견을 모으느라 작품 평도 뒤로 밀렸거든요. 이러다간 자정이나 되야 집에 갈 수 있겠다 싶어 은근히 걱정들 했답니다.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답니다. 간단하게 "일이 있어서 참석 못하겠습니다"라고 손들어 버리면 만사 오케이.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을 것은 뻔한 이치인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지요. 왜냐하면 이 계획에 상당한 비중을 두시는 교수님의 마음이 와 닿던걸요. 별것도 아닌 것을 아주 굉장한 일처럼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뭔가 배울 것이 있음을 감지했던 거 에요. 삶을 향한 진지한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요?
        그 다음 이유는 교수님의 주문에 부응하는 총무님 열성에 감동을 받았답니다. 곁에서 듣고만 있어도 답답한 마음이 들 정도로 결론을 얻을 수가 없는 안건이었죠. 단체 여행이라면 우선 몇 명이 갈 것인지 확실하게 숫자가 나와야 하고, 또 어디를 갈 것인가 대강은 장소가 통일돼야 하는데 중구난방으로 끝이 안 보였답니다.
        총무님의 재량에 맡기기로 하고 겨우 종지부를 찍나 했더니 내게는 진짜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요. 누군가 음식전반을 맡아줘야 한다는 말씀이었죠. 연령으로 보나 시간의 여유로 보나 내가 피할 수 없는 적임자임은 확실했어요. 이크, 내 이럴 줄 알았지. 차라리 안가고 말지. 이게 무슨 피박이람. 심하게 표현해서 자살하고 싶다면 다들 믿어 주실까요. 난 정말 싫은데. 그 싫은 정도를 이해해줄 사람이 불행하게도 글마루엔 없습니다. 아직 나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구요. 우리 교회에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몸만 오면 된다고, 와 주기만 해도 고맙다고, 다들 그럴텐데.
        불똥은 떨어졌고 시간은 이틀 남았습니다. 남편 눈치 살펴가며 혼자 집 비워야 할 준비를  하면서 생각했어요. 어차피 하나님께서 하라신다면 기꺼이 하자고.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했고 내가 즐기는 일이 아니니까 피해왔던 일을 새삼스레 하라고 하실 때는 무슨 이유가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도 우선은 기쁜 마음으로 일을 착수하자고 다짐했지요.
        그렇게도 귀찮아하던 장보기를 진지한 마음으로 가격 비교해가며 여기저기 네 곳이나 다녔어요. 행여 한가지라도 빠뜨릴새라 꼬깃꼬깃해진 메모지를 보고 또 보며 품목을 점검 했구요. 그러는 중에 내가 느낀 것은 몸도 마음도 가쁜한 게 살맛이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시간 죽여가며 추욱 쳐져있던 내가 어느새 바람을 일으키며 시간을 아끼느라 종종걸음으로 다니고 있지 뭐에요. 아하,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신 축복이었구나. 바로 나를 위해서 내게 이런 소중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늘이 도우시면 무슨 일인들 못할까 싶어 자신 있게 음식 준비를 했습니다.
        흔히들 여자의 일, 또는 부엌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 일로 나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을 거에요. 그러나 나는 정말 달라요. 얼마나 중증인지 옛날 이야기를 할께요.
        평소에 혈압이 낮은 엄마가 혈액주사 부작용으로 심하게 아플 때 내게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었어요. 시장 가서 순대 좀 사오라고. 시장이래야 바로 골목만 나서면 금방이고 그때 집에는 엄마하고 나 둘 뿐이었거든요. 중학생 때였으니 아무 무리가 없는 상황인데도 나는 아픈 엄마에게 냅다 신경질을 부리며 "왜 그런걸 날 시켜?"하고 소리를 질렀지요.
        또 한번은 작은오빠 친구가 집에 놀러 왔을 때 내게 물 한 그릇을 청한 일이에요. 작은오빠 친구라면 나보다 여섯 살이나 위거든요. 그 오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리를 질렀답니다. "야 이 자식아 그런걸 왜 나를 시켜?" 라고요. 내가 지른 소리에 어이없어하던 그 오빠. 그 오빤 지금도 우리 집에 오면 "야, 기제야, 나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까 이리와 앉아. 물도 안 마실 꺼니까" 라며 의아해하는 내 남편에게 설명을 한답니다.
        가정교육 운운하며 두 오빠한테 엄마가 많이 불평을 들었지만 결론은 이랬어요. "엄마, 할 수 없우. 저런 애는 부자집에 시집가서 식모 부리며 살래나 보우. 지 팔자대로 살테니 걱정하지 맙시다." 그 후로 오빠들도 아빠도 엄마도 또다시 내게 부엌일을 시키진 않았어요.
        이번 글마루 여행에 쏟은 내 애정이 어느 정도인가 알아줬음 좋겠어요. 그 반면, 내게 돌아온 것도 많았습니다. 작은 일에 진지하게 열심을 내시는 귀한 삶의 자세를 배웠고, 내가 싫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주 잘 할 수 있다는 것도 체험 했구요. 또한 이왕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게 받아 하자는 이론도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시시하게 생각되었고 슬그머니 빠지고만 싶었던 여행이 내게 안겨준 수확을 이 여행에 동참하지 못한 문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겉옷 벗어 던지고 함께 땀흘리던 온천욕. 그리고 푸르름 다 빼앗기고 앙상하니 마른풀로 변해버린 들판을 걷던 날의 풍성했던 우리들 마음을. 강의실에서만 만나던 문우들과는 나눌 수 없는 교감을 여행에 함께 한 문우들과 가슴 뜨겁게 나누면서 이런 기회를 내가 소유했던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두 시간만 운전하면 갈 수 있는 곳. 팜 스프링스, 사막가운데 있는 온천이었지만 아주 값나가는 여행으로 포장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마음 빈약해지면 다시 풀러보며 시심을 찾겠습니다. 욕심 껏 숨겨놓은 장면장면들이 깜짝 놀랄 글이 되어 포장을 헤치고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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