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음성에 목마른 아낙네

2003.04.15 07:24

노기제 조회 수:642 추천:97

111902 부드러운 음성에 목마른 아낙네

노 기제
두 주 동안의 한국 나들이에서 돌아와 보니 앞마당 잔디가 낙엽으로 덮여있다. 깜짝 놀랬다. 한국 곳곳에 예쁘게 물들었던 단풍들을 보면서 내 생전에 이렇게 고운 단풍은 처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내 집 앞 나무들도 아주 예쁜 색으로 물들어 있다. 게다가 고운 색의 낙엽들이 방금 보고 온 고국의 그 정취를 내게 흠뻑 안겨 준다.
마음이 성장하지 않는 불치병에 걸린 어떤 아낙네들은 가을이 오고 푸르던 잎들이 화사하게 옷을 갈아입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열 일곱 여고생으로 돌아간다. 보도 위로 떨어져 뒹구는 낙엽에 실려, 있지도 않은 고운 님 글귀 한 절 배달되려나 기대도 해 본다. 이런 철없는 마음이 밖으로 삐죽 내어 보여지고 그런 마음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발견되면 새롭게 싱싱한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나이 값을 하라는 둥, 낙엽이 밥 먹여 주냐는 둥, 욱지르고 거친 음성에 인상까지 험해지는 남편과의 삼 십 년 세월에 바삭 말라버린 가슴이 촉촉한 단비를 만나는 순간이다. 바람에 밀리는 저 낙엽들을 보세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색깔도 곱지 않은 볼품없는 낙엽 얼마를 바람이 비질하고 있다. 별 것 아닌데 나와 함께 한 이 순간에 의미를 주고 있음이 느껴진다. 여행객 무리 중에 한 사람인 나와 여행 안내를 하는 입장의 한 사람인 그만이 갖는 비밀스런 감정의 교류이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외투 깃을 세우게 하는 찬바람도 따스하기만 하다.
함께 한 이 십 여명 모두가 눈치 챌 만큼 그 교류는 뜨거워졌다. 우린 사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소년의 말이다. 꿈에도 그리던 서울 배꽃 여고 학생과 지방 고 남학생과의 사십 년 늦은 만남이란 주제가 설정된 것이다. 맑은 시냇물을 보는 듯 나를 본다. 천진한 아가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길을 내게 준다. 감히 손대지 못할 여린 풀꽃 다르듯 조심스럽다.
나는 경험하지 못했던 만남이다. 같은 또래의 남학생들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눈에 차는 남학생이 있지도 않았고 또한 기회도 만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아무런 거부감도 생기지 않고 오히려 푸근하게 포용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럼없이 고교 시절의 감정을 되살려 남의 관계가 아닌 님의 형태가 되고자 한다. 대답을 할 필요


2
는 없다. 그냥 잔잔히 웃어줄 따름이다. 왠지 내 가슴이 뻐근해 짐을 느낀다. 짜릿짜릿 터질 듯한 가슴은 내 생전에 처음 있는 상태라고 얼굴까지 붉히며 내 자신에게 소곤댄다.
무슨 말을 하던 내가 하는 말은 순수하고 맑은 마음이 들어 난다는 찬사. 귀엽고 천진한 몸짓은 영락없이 열 일곱 여고생이란 표현을 아끼지 않는 남자.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듯 눈길조차 조심스럽게 아끼는 남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으니 여기 좀 앉았다 가자 면서 길가 벤치를 가리키는 남자. 다른 사람들과 산책길에 나서려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하냐고 투정을 부리는 남자. 필경 사십 년 전으로 완전하게 돌아간 남학생의 모습이리라.
일박 이일 여정이 끝나면서 군중 속의 헤어짐이 연출된다. 악수하며 잡힌 오른손을 영원히 그의 두 손안에 남기고 올 수밖에 없다.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음에 아랑곳 않고 내 손등에 살짝 댄 입술을 거두지 않는다. 두 눈은 감은 채, 허리는 반쯤 굽혀 인사를 하며, 떨군 고개는 들 줄을 모른다. 그 모습 그대로 내 가슴에 오래 서 있을 것이다.
헤어짐의 현실이 안타깝기보다는 잠깐 꿈을 꿀 수 있었음이 더 좋다. 꿈이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긴 시간을 허락 받고 싶지도 않은 건 그 이상은 내가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건 그 다음은 더 가깝게 느끼고 싶어질 터이고 그 다음은.......또 그 다음은........바로 그런걸 난 감당 못한다. 곱게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마울 뿐이다.
아주 작은 바램을 안고 사는 아낙네들의 퉁명스런 남편들을 어찌 가르칠거나. 내 집 앞 단풍이 내게 고국이 준 아름다운 정서를 줄 수 있듯이 내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도 역시 내가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한 마음으로 아직도 높은 채인 푸른 가을 하늘을 우러러본다.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3
어제:
3
전체:
96,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