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운후 찾아오는것

2003.05.09 02:57

노기제 조회 수:446 추천:91

032403 마음을 비운 후 찾아오는 것
노 기제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하면 각 테이블마다 예쁘게 장식된 꽃이 보인다. 대부분이 가느다란 병에 몇 송이 꽃이 방긋 웃곤 했다. 잘룩한 허리부분엔 리본이 매어져 있었고. 그런데 이번 피로연 테이블엔 우람할 정도의 커다란 꽃꽂이가 시선을 끈다. 가운데 아주 굵은 초가 몸을 사르며 유리기둥에 감싸져 있다. 주위에 장식된 장미가 내 주먹보다 크게 보인다. 여러 가지 색깔의 열 두 송이다. 물망초 무리와 넓은 푸른 잎의 조화가 탐스럽다. 가슴에 하나 가득 안기 울 만한 크기다. 첫 눈에 욕심이 났다. 언제나 테이블의 꽃은 하객이 갖고 가게 되어 있다.
테이블에 앉은 하객들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남자가 둘에 모두 여자다. 그리고 낯이 설다. 아무도 우리 교회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곁에는 남편이 앉았으니 얼굴에 철판 깔고 얌체처럼 행동하기란 무리다. 보통은 용기 있는 사람이 내가 가져가야지 한마디로 맡아 놓는다. 이번 꽃은 들고 가기도 불편할 정도로 크다. 그래. 포기하자. 정말 아깝지만 눈길을 거두자.
세상에 내가 원하는 일이 다 내 뜻대로 될 수는 없다. 일단 내 뜻대로 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누구에게든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도록 양보하는 마음을 앞세운다. 그러면 아주 즐겁게 포기할 수가 있다. 미련을 버리니 음식 맛이 더 좋다.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맛을 음미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소유한다.
하객이 천명이나 되는 대형 결혼식에 걸맞게 피로연 후 여흥 순서에는 유명 방송인이 사회를 본다. 마치 일년에 한 번 참석할까 말까한 크리스마스 파티인양 착각할 정도다. 각 테이블에서 꼭 한 사람만 일불 짜리를 꺼내 들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란다.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각 테이블의 꽃을 차지할 수 있다나. 순간 정신이 버쩍 들면서 재빨리 지갑으로 손이 간다. 그러나 난 생각한다. 아니지. 이번엔 분명 양보하기로 결정했으니 잠잠 하자. 태연하게 후식으로 나온 케익을 먹고 있지만 속은 약간 쓰렸다. 아직도 저 여자는 핸드빽을 뒤적이며 늦장인데 내가 맘만 먹었다면 확실하게 내 차지가 되겠구나.
거의 당황한 모습으로 일불 짜리를 찾고 있는 앞의 여자는 급한 표정이 역력하다. 난 속으로 말해줬다. 안심하쇼. 내가 기권했으니 서둘 것 없어요. 이어서 사회자의 황급한 음성이 들린다. 자 얼른 꺼내세요. 일불 짜리가 없으면 십 불 짜리도 괜찮아요. 얼른요. 빨리 일어나세요. 돈 번쩍 들어 보이며 먼저 일어나는 분이 차지하는 겁니다.
드디어 일불 짜리를 찾아낸 앞의 여자는 손을 높이 들며 급히 일어났다.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이건 뭐야. 엉뚱한 사회자의 주문이다. 그 돈을 오른쪽으로 돌리세요. 내가 스톱 할 때까지 계속 돌리세요. 황당해진 그 여자 내키진 않지만 천천히 옆으로 밀어 논다. 그러자 옆의 분이 잽싸게 다시 옆으로...드디어 스톱. 바로 내 옆의 분이 돈을 쥐고 있다. 파안대소와 함께 이게 웬 떡이냐 싶은 표정.
이건 연습이었다는 사회자의 능청에 어이없어하는 옆의 분. 다시 돌아가는 돈. 이번엔 왼쪽으로 한참 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생각 없이 따라했다. 그러자 다시 스톱. 이번엔 돈을 꺼냈던 분 바로 옆의 연세 좀 드신 분이 얼굴이 환해진다. 그런데 뭐라고? 사회자의 맘에 안 드는 한 사람이 저 쪽 테이블에서 차지한 것 같으니 다시 하겠단다. 저런 순 엉터리가 어디 있담. 난 거의 귀찮아하는 상태에서 돈을 넘기곤 했다.
그러자 다시 스톱소리가 들리는 듯 하는데 돈은 내 손에 넘겨와 있다. 대수롭지 않게 이번엔 또 무슨 핑계를 대려나 기다렸다. 자아, 바로 지금 이 분들이 테이블의 꽃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돈도 그냥 가져가세요.
남편을 쳐다보았다. 마음을 비웠더니 이런 일이 생기네. 설마 이렇게 차지 하게 됐는데도 가져가지 말라고 욱지르진 않겠지. 이건 내 복이니 가져가겠다는 굳은 의사표시의 바라봄이다. 그냥 웃어준다. 됐다. 진짜 내 꺼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의 뜻이 새삼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앞으로는 어떤 경우에라도 제일 먼저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욕심을 버리고 있으면 그 후에 생기는 것은 모두가 다 공짜인양 감사한 마음이 된다. 이왕 포기 한 거면 끝까지 포기하고 양보했으면 더 좋았을걸. 돈을 찾던 그 여자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다음 다른 결혼식 피로연에선 꼭 끝까지 마음을 비우겠다고 다짐, 또 다짐 해본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120 지금 이 눈물의 의미 노기제 2007.03.24 495
119 맞춤형 내 남자 file 노기제 2014.02.13 491
118 스물 일곱 노기제 2007.02.05 490
117 내게 찾아오는 고난 노기제 2004.01.05 484
116 나 홀로 시무식 노기제 2004.01.05 484
115 기다릴텐데 노기제 2007.03.19 478
114 신선한 인간미를 기대하며 노기제 2004.04.20 474
113 산불 노기제 2007.05.18 472
112 심부름 속에 숨겨진 축복 노기제 2004.05.02 471
111 새해 새 결심 노기제 2004.05.02 470
110 눈밭에서의 봄꿈 노기제 2007.03.31 469
109 예쁜마음 가꾸기 노기제 2003.02.16 463
108 기억 속 배정웅 시인과 최면 [1] 노 기제 2016.12.26 462
107 요즘 살 맛 난다 file 노기제 2014.04.14 459
» 마음을 비운후 찾아오는것 노기제 2003.05.09 446
105 성난 비바람 노기제 2007.03.28 445
104 마지막 마무리 노기제 2004.02.03 445
103 흔적 노기제 2007.05.18 443
102 영수에게서 온 편지 노기제 2013.07.10 404
101 조용한 이별 file 노기제 2014.09.12 403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96,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