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개진 추억

2003.07.17 12:29

노기제 조회 수:497 추천:81

041703 포개진 추억

노 기제
남대문 시장이다. 필요한 건 딱 하나. 남편의 주문에 작은 배낭을 사야한다. 등산용품 파는 곳이 어디 있는지 또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 조카를 대동한다. 한국을 방문 할 때마다 조카의 안내가 큰 도움이 된다. 남편의 주문이 까다로운지 제조사와 크기, 그리고 색깔이 다 들어맞는 물건이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서너 집을 들러본 후 그만 포기하려니 끈질기게 다음 집으로 이동한다. 그래도 고모부가 원하는 것을 꼭 찾아야 한다는 조카의 일념이다.
거의 마지막이다 싶었는데 다행히 남편의 주문에 맞는 배낭을 찾았다. 남대문 시장 안에 그렇게 많은 등산장비점이 있을 줄이야. 나오다 눈에 띈 간판은 스쿠버 다이빙 장비점이다. 바로 등산장비점 이층이다. 구경이나 하자. 이미 한 달에 한 번 나가는 정규 다이빙을 중단한지 몇 해가 지났다. 일년에 한 번씩 따뜻한 바다 찾아 외국에서 하는 다이빙이 고작이라 따로 장비가 필요하진 않지만 그래도 둘러보고 싶다.
주인과 얘기 끝에 바로 내 드라이 수트를 맞춘 곳임을 알았다. 물론 미국에서 맞췄지만 아폴로 회사 제품은 일본에 뵨사가 있고 한국에 있는 지사를 통해 미국으로 공급되었던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내가 직접 맞춘 다면 가격이 반값이 된다. 어차피 먼저 맞춘 것들은 못 입는다. 작아진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작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어쩔까? 어차피 이 돈은 한국에서 다 쓰고 간다. 재외 동포 문학상에 응모한 수필이 우수상에 올라 받은 상금이 2백 만원이다. 세금 떼고 여행경비하고 남으면 조카에게 주고 갈 돈이다. 다 쓰고 없애느니 뭐 한 가지 사 둔다면 상금을 받은 추억을 배로 늘릴 수 있겠다.
드라이 수트는 바다에 들어가도 물이 수트 안으로 안 들어와서 훨씬 추위를 모른다. 그러나 목이 너무 조여서 물 밖에선 무척 답답하다. 웻수트는 몸 전체가 조여서 더 불편하다. 그런데 바로 아폴로 회사 제품 웻수트는 아주 편하다는 걸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맞출까? 이미 다이빙을 그만 둔 상태인데? 이제 맞춘다면 언제 찾아? 시간도 없는데.
"고모, 맞추세요. 내가 찾아서 비행장으로 갖고 갈께요. 아직 젊은데 다시 하시면 되잖아요."
그럴까? 공연한 짓 해서 썩히는 거나 아닐까. 그렇다고 상금을 고이 간직할 수도 없고. 어차피 써버리면 다 잊혀지고 사라질텐데.

살다보니 지나간 일은 빨리도 잊혀진다. 기억해둘 장소가 용량이 작아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간직하고픈 기억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상금 탔던 일 조차 까마득하다. 이제 겨우 다섯 달. 겨울을 지났을 뿐이다.
새로 맞춰온 수트는 입어 보지도 못 했다.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른다. 봄이 익어 가는 4월이 오니 다이빙 트립이 시작이다. 갈까? 새벽에 일어날 일이 끔찍하다. 다행이 가까운 카타리나 섬이다. 승선시간 3시간. 멀미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야광의 눈부신 빨강이 깜장과 조화를 이룬 화려한 수트다. 5년만에 나타난 내 모습에 모두들 멀미 걱정부터 해준다. 정작 나 자신은 걱정 없는 표정이다. 기분도 아주 좋다. 수트에 숨겨진 화려한 시상식 장면. 상패와 상금. 배에 탄 다이버들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인지. 뭔 상을 탔는지. 그저 다이빙 때마다 멀미 때문에 초죽음이 되던 약한 나를 알뿐이다.
어느새 듬직한 조카 손에 이끌려 남대문 시장을 누비던 그 장면까지 떠올라 나를 기쁨으로 안내한다. 3시간 정도의 배 멀미 쯤 단번에 날릴 수 있는 환상이다. 다이빙을 갈 때마다 난 이런 일들을 추억하며 행복해서 멀미를 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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