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시무식

2004.01.05 08:18

노기제 조회 수:484 추천:84

010504 나 홀로 시무식
노 기제
갑신년 일월 오일, 새해 첫 월요일이다. 각처에서 2004년의 시무식이 있는 날 이기도 하다. 내가 통관회사에 발을 딛고 첫 출근하던 날이 바로 1976년 일월 오일, 월요일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새삼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낀다.
그 땐 주고객이 다 외국인이었다. 한국인 고객이 없었으니 일하는 동안 줄곧 영어나 일본어를 했다. 언어가 딸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루 일과를 보냈지만, 날마다 무언가를 얻고 발전하는 기쁨이 있었다. 어깨너머로 들리는 동료들의 전화 통화내용을 한글로 받아쓰면서 어떤 경우에 어떤 말을 하는가를 외워두곤 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고 항상 즐거울 수 있었던 건 진실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진실하게 거래하고, 거짓없이 살았던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 자격증을 획득하고 내 이름의 회사를 차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고객들이 모두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거짓이 판을 치고, 서류가 가짜로 꾸며지고, 다른 물건이 실려 온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미리 알려주면 바로 그 알려 준 내용을 이용해서 서류를 다르게 작성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모르게 잘 지나가곤 했던 모양이다.
다 통관되어 이미 끝난 일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따져 묻는다. 왜 우리에겐 그런 물건 안 된다고 하구선 그 사람은 통관을 시켜줬느냐고. 그럴 리가 없다. 지난 서류를 꺼내 봐도 결코 그런 물건은 서류에 없다. 그런데 분명 나를 통해 통관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담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운 좋게 통관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속이기 사업이 계속되며 나도 점점 진짜와 가짜를 느낌으로 알게 되었다. 편안치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모르면 몰라도 알고서는 안 된다. 손님을 추려 나갔다. 마지막까지 우린 절대 거짓말 안 합니다. 우리 것만은 해주세요.
그러나 한 사람도 절대 거짓말 안 하겠다는 것에 해당하는 손님은 없었다. 끝내는 거짓말의 대가로 들여온 전 물량을 압수 당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들을 내 힘으로 고칠 수는 없다. 결국 내가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함께 거짓서류를 꾸미고, 거짓말을 하고, 발각되면 전혀 몰랐었다고 발뺌을 하고, 그냥 저냥 적당히 살아선 안 된다고 배워왔다. 그러다 보니 일손 놓고 마음 편하게 지낸지도 삼 년이 다가온다. 느닷없이 정부에서 날라 온 벌금징수 편지에 옛 고객과 옥신각신 언성이 높아진다.
진실하지 못한 고객을 가졌던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다. 그냥 입다물고 조용히 잊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신 때문이었으니 내게 나온 벌금은 당신이 물어줘야겠다.
갑신년 첫 출근하는 월요일, 난 이렇게 전화통을 움켜쥐고 진실 하라고, 제발 진실하게 살라고, 언성을 높이며 나 홀로 시무식을 치렀다. 입다물고 있던 때 보다는 답답하던 마음이 훨씬 시원해진 기분이다. 앞으론 입다물고 그냥 돌아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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