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찾아오는 고난

2004.01.05 08:20

노기제 조회 수:484 추천:85

010504                        내게 찾아오는 고난
                                                                노 기제
        겨울이다. 하얗게 내린 눈이 보고 싶다. 벼르던 여행을 떠난다. 쉽지 않은 결심을 하고 가족 동반으로 나선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것도 바로 크리스마스, 당일이다. 얼마나 들뜨고 기대에 찬 출발이었나. 첫 휴식이 예정 된 모하비 칼스 주니어에 도착했다. 간단한 간식도 먹으며 급하던 볼일도 보고 다시 차에 오를 때 까진 사십 명 남짓한 우리 일행 모두는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모두 탔나? 누가 빠졌나? 차가 출발을 안하고 있으니 안 탄 사람을 기다리는 줄 알았다. 시동은 걸린 채, 뭔가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조금 기다리셔야 하겠어요. 무슨 게이지 바늘이 어느 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영 안 오른단 설명이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사십 분, 시간은 잘도 간다. 아무도 따져 묻거나 성급하게 결론을 묻는 사람도 없다. 열시 반에 도착해서 열두 시가 가까워오니 아침 안 드신 분들은 아예 점심을 드시죠. 다시 칼스 주니어로 들어간다.
        어느새 미케닉을 불렀나, 운전기사 아닌 다른 사람이 엔진을 점검하나보다. 그제서야 우린 뭔가 일이 벌어졌나 라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웬 겨울비는 그리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지. 실상은 아침부터 줄곧 내렸던 비다. 그래도 충분히 우린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이제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가 밉살스러워진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버스회사에 연락해서 다른 버스를 공수 받는단다.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는 가이드의 알림이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리노까지 가는 일 뿐이니 좀 늦어진들 대순가. 조바심하지 말고 편히 기다리자. 제법 많은 숫자의 꼬마들이 신이 나서 들락날락 비를 맞으며 수선이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어른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자. 언제 버스가 와서 언제 갈 것이냐. 다 거짓말이지. 버스가 오긴 뭘 와. 무슨 일들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막연한 불평들이다. 답답하지만 좀 기다리면 돼요. 얼마나 좋은 곳인데 여기서 돌아갈 생각을 해요. 가면 정말 좋걸랑요. 마침 눈이 많이 와서 아주 근사한 스키여행이 될 터인데 이 정도에서 포기할 순 없죠.
        딱히 누구에게 랄 것도 없이 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계속 얘길 했다. 마침 나와 동행인 친구들도 목소리를 합해서 그럼요. 이것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따듯하게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화장실 갈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하죠. 인적도 없는 산길에서 이런 일 당했다고 생각해봐요. 어유. 끔찍하잖아요. 감사할 따름이죠.
        정말 상황을 잘 판단해보면 사실이다. 그렇다고 누가 확실하게 잘못해서 당하는 일도 아니다. 버스 고장, 아무리 정비를 잘해도 우리 자신의 자동차도 어느 날 갑자기 고장이 나질 않나.
        어떤 고난이 내게 찾아 올 때, 그 고난의 이유를 남에게서 찾으려 하면 그만큼 난 불행해진다. 해답이 없으니까. 다가온 고난을 끌어안아 내 것으로 인정한다. 떠날 때를 잠잠히 기다리다 보면 아무리 큰 고난이라도 스스로 물러가기 마련이다. 반드시 물러간다.
        여섯 시간이란 결코 짧은 기다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아주 성숙한 자세로 그 고난에서 빠져 나왔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은 고난의 연속. 살짝 얼어버린 길 위의 곡예도 경험하며 스무 시간만에 목적지 호텔에 도착했다. 예정시간보다 열 시간이나 늦어진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이다.
        먼저 도착한 대여섯 대의 버스에 탔던 가이드들이 일렬로 서서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돈다.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기다리고들 있었구나. 그래도 우린 차에서 잤는데.
        이게 바로 뜨거운 마음의 나눔인가보다. 하얗게 내려 쌓인 눈처럼 우리들의 맑은 마음이 교감하는 순간이다. 서로 걱정하고, 서로 기다려 주고, 흥분되고 기대했던 여행이 보답 받는 것이다. 밋밋하고 예정대로 도착하는 그런 여행보다는 몇 배나 더 추억거리가 많았던 이번 여행을 고장 버스에 탓던 사람 모두는 오래도록 기억 할 것이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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