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마무리

2004.02.03 06:35

노기제 조회 수:445 추천:88

마지막 마무리

노 기제

날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도 퇴근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하던 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 집안 일을 할 때라도 반드시 마무리는 한다. 습관에 의해 일을 하고 자동으로 마무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마지막 하는 마무리가 바로 살아 온 삶을 정리하는 순간이 아닐까.
불행하게도 자신의 마지막 마무리를 자신이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뜻하지 않은 발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면서 치료와 회복에만 집중하다 보면 끝 마무리는 회복 후 퇴원해서 하리라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번번히 기회를 놓치는 사례를 본다.
죽음이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면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곧 완치되어 퇴원 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때문이다. 간호하는 가족들도 서로 눈치만 보면서 환자에게 결코 죽지 않는다는 눈짓을 보낸다. 담당 의사의 심상치 않은 진단은 아예 말 해주려고도 않는다.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정작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 환자에겐 사실을 은폐하기에 이른다.
가까이 내 가족에도 이런 일이 생겼다. 남편의 누나가 병원에 입원할 때만 해도 가족들 모두는 우선 자세히 검사라도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미국 생활 10년 에 가끔 통증을 호소하는 시누님의 고통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진 않았다. 의사를 찾아가고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담낭에 돌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별일 아닐 수도 있고 큰일 일 수도 있다.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한다면 큰일이다. 다행히 수술을 곧바로 받고 돌을 꺼내면 별일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은 굉장한 불안을 호소했었다. 애초부터 큰 병일 것이라고 의사를 찾는 일 조차 거부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이 합심해서 그러자고 하지는 않았다. 요즘 웬만한 병은 발달된 의학에 의해 거뜬히 회복할 수가 있다. 수술해서 돌만 빼내면 통증에서 완전히 해방 될 것을 강조했다. 수술 전날엔 환자 자신이 강력하게 불안감을 표출하자 직계 가족들은 따라서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그렇다고 남편과 나까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합세 할 수는 없었다.
수술을 받는다는 자체가 우리에겐 낯선 일이라 겁은 나지만 지독하게 괴롭히던 통증을 수술로 제거할 수 있으니 기뻐하자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별로 효력은 없었지만 적어도 식구들의 동의는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막상 수술을 받는 날에는 시누님네 식구 모두가 병원에서 노심초사 수술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소식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일터를 지키고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두 세시간이면 끝나려니 기다렸는데 무려 여덟 시간이 지난 후에야 소식이 왔다. 암세포가 너무 퍼져서 담낭은 떼어내고 간에까지 퍼진 암 덩어리들은 대강 제거 했지만 희망은 없는 편이란다. 그래서 환자 자신은 그리도 불안해 했던 것일까.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하나님도 만나지 못한 분인데…우리 교회 목사님께 상황을 알리고 부탁을 드렸다. 환자가 거부해도 무조건 날마다 방문해 주시기를.
그 결과 “내가 회복되어 퇴원하면 동생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겠다”라는 간접 고백을 들을 수가 있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경우다.
병원에서 넉 달 가량 항 암 치료를 받는 동안 환자는 급기야 의사소통이 곤란하게 되었다. 극심한 통증을 제거하느라 점점 강해지는 진통제의 부작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생을 마무리 하는 작업을 환자가 할 수는 없다. 식구들 또한 막연한 회복의 희망만을 고집할 뿐 죽음이란 환자와 전혀 상관 없는 사건 인양 입들을 다문다. 환자에게 병명 자체도 알리지 않는 식구들에게서 무엇을 기대 할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이런 어려운 일은 내가 맡아야 한다고. 나에겐 내가 믿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이다. 식구들이 들으면 섭섭한 말을 해야 한다.
“언니, 걱정이 많으시죠? 시집안간 막내 걱정에 매부 뒷바라지며 마음 편하게 병원에 누워 있지도 못 하시겠죠? 그런데 언니, 그 걱정 보따리 놓아 버리세요. 하나님께서 기꺼이 대신 해 주실 테니까요. 보세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무엇하나 맘대로 할 수 있던가요. 그냥 하늘에다 맡기고 준비하세요. 막내 좋은 사람 만나 시집 보내는 일이며 매부 건강이며 다 알아서 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병원을 나와 집에 돌아오는 시간 내내 기도했다. 내가 믿는 만큼 식구들 모두가 다 함께 믿고 시누님의 가시는 길을 편히 준비할 수 있기를. 집에 들어서자 울리는 전화벨. 막내의 흐느낌이다. 엄마 돌아가셨어요.
아주 평안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잠 드셨단다.
결국 시누님의 마지막 마무리는 내가 대신 해드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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