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2004.03.25 02:49

노기제 조회 수:517 추천:95

080103 한번쯤은
노기제
많은 사람들의 생일을 축하해줬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있어서 마음놓고 생일을 축하해주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남편이 알면....그 쪽 안사람이 안다면....또 하늘은 뭐라 실까. 벼르다 세월만 보내고 올해 또 한 번 아쉬운 마음에 망설였다.
어릴 적부터 내 맘에 드는 남자는 언제나 내가 먼저 다가섰다. 기다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다려봤자 그 쪽에서 다가설 기회란 전무라고 판단이 선 것이다. 얼굴이 바쳐주나, 학벌이 뛰어나나, 집안이 내 세울 만 한가. 그렇지만 난 은은하게 시간이 걸려야 내 진가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니 시작은 내가 해야 한다.
평생 살면서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몇이나 만날까. 맘에 들면 그쪽에 나를 보여야한다. 난 안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나를 가까이 하다보면 누구든지 다 나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좋아하게끔 만들면 그만이니까.
먼발치서 그를 본 순간, 첫눈에 그만 반해버렸다. 다음 단계는 다가가서 나를 보여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함께 했던 친구가 먼저 그를 차지했다. 물론 서로 인사도 나누기 전이니 나는 나대로 작업을 하면 되겠지만, 친구지간에 그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여고 졸업하던 해 봄에 있었던 일이다. 다른 친구들은 갓 시작한 대학생활에 바빴고 진학을 못한 우리 둘만이 나름대로의 소개팅에 갔던 곳이 서울공대 정문 앞이었다. 군대 갔다 복학한 졸업반 학생 둘 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과묵함이 멀리서도 금방 눈에 들어왔었는데, 아마도 내 친구와 나는 취향이 같았던 모양이다.
아차 하는 순간 선수를 앗긴 난 잠잠해야 했다. 곁에서 보기만 해도 정말 맘에 드는 사람이었다. 내 친구도 그에게 정신을 홀랑 빼앗긴 채 자꾸 내게 속삭여댄다. 얘, 나 저 사람 너무 좋아. 자주 만나게 해줘. 너 중간에서 잘 해야 돼.
속은 쓰리지만 그 후 난 친구를 위해 임무를 충실히 행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해주고, 연락해주고, 자리도 비켜주고.......그러나 그는 확실하게 내 친구를 거절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정말 곤란했다. 자연히 친구와 난 만남이 적조 해 졌고 그와의 만남도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자꾸 역반응만 보였다. 그에게 흔하게 하던 말이다. 야, 내가 왜 너 같은 애를 만나니? 미쳤냐? 네 졸업식에 왜 내가 가냐? 다시는 전화하지마.
그를 내친 건 아마도 내 일생에 가장 큰 실수였으리라. 삼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소식 없이 살면서 난 간절히 소망했다. 죽기 전에 꼭 만나서 말해 주리라. 많이 좋아했고 원했지만 표현만은 거칠게 딴 맘을 위장했던 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난 내가 시작해야 편하다. 내가 좋아해야 잘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먼저 다가왔다. 마음을 내게 줬다. 난 받을 준비가 안 됐었다. 난 너무 풍부해서 줄 수는 있는데, 받을 공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빈 공간이 많아서 자그마한 맘 한 조각 주는 사람 있으면 감사하게 받을텐데.
오랜 세월 지난 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여전히 그는 내게 주는 사람이었다. 생각나는 유일한 여자친구였기에 가끔 보고 싶었노라고 아주 편안하고 진솔하게 말한다. 난 그에게 줄 수가 없다. 그가 기회를 안 준다. 그래서 생일을 물었다. 칠월 칠석이란다.
그 이듬해 생일 카드를 골랐다. 그리고 또 여섯 해가 조용히 지났다. 금년엔 이 카드를 보내고 싶다. 평생에 한 번쯤은 축하해주고 싶다. 그래도 될 것 같다. 우체통에 입맞춤을 한다. 카드에 하고 싶던 입맞춤이다. 아마도 그는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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