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물어볼걸

2004.04.20 02:58

노기제 조회 수:621 추천:101

020304 내가 먼저 물어볼걸
노 기제
따스한 햇볕이다. 눈이 부시다. 그래서 하늘에 뿌려지는 은가루가 곱다. 바람이 흩뿌리는 눈가루는 물기를 뺀 마른가루다. 내게 다가와 살짝 앉아도 옷이 젖지 않는 눈. 정말 오랫만에 맘에 드는 눈밭에서 스키를 탄다. 눈이 알맞게 쌓여서 넘어져도 그리 아플것 같지 않은 슬로프가 만만해 보인다.
스키를 타러 다니며 생긴 버릇이 있다. 남편은 내 스키 실력에 무슨 도움을 남에게 줄 수 있겠느냐고 그냥 조심해서 타기나 하라지만, 그게 아니다. 스키를 잘 타는 사람들도 쌩쌩 지나치기가 태반이다. 스키를 타는 도중 누군가 넘어져 있을 땐 반드시 곁으로 다가가서 묻는다. 아유 오케이?(Are you okay?) 때론 스키가 벗겨져 여기 한 짝, 저기 한 짝 나동그라져 있고 폴은 아예 자취를 감춰 안 보이기도 한다.
내가 넘어져 봐서 안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흩어진 스키며 폴을 찾아 다시 올라갈 수가 없다. 물론 정신 차려 재정비 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 누군가가 뒤따라 오다가 먼저 놓친 폴을 집어다 주고 벗겨진 스키도 가져다 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대부분 내 실력에 뭐얼. 나나 사고 없이 타면 되지. 라고 생각한다. 넘어진 후 눈속에 박혀서 기다려보면 역시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난 언제나 누군가 넘어져 있으면 가까이 간다. 우선 괜찮으냐고 묻고 흩어진 장비가 있으면 주워다 준다. 내가 그것을 원했으니까.
이번엔 맞바람이 몹시 불어 리프트에서 내리기가 쉽지 않아 얼굴을 한껏 숙이는데 뭔가 휘익 날아 얼굴을 치고간다. 누군가의 리프트 티켓이 떨어져 나온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내린 아이들이 스노우보드 신느라 정신들이 없다. 바람을 이기려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자기 리프트 티켓 있는가 확인해봐. 한 장이 저기로 날아 갔다. 세 아이가 서둘러 자기 것을 확인하더니 한 녀석의 표정이 바뀐다. 아 내 티켓 없다.
심한 바람과 추위 때문에 마스크로 가린 입 헤치고 누군가를 향해서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귀찮고, 번거롭고, 뭐 그런 이유인지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남편의 명령을 무시하고 큰소리를 낸 것이다. 얼마나 따뜻한 일인가. 누구랑 부딪힐가 조심해서 타면서 뒤를 돌아보니 세 녀석이 합심해서 날아간 티켓을 잡은 모양이다. 다들 열살 안팎으로 보이는 아이들. 안심하고 신나게 하루를 즐기도록 빌어준다.
긴 슬로프를 한 번에 내려가지 않고 중간지점에서 잠깐 멈추고 숨을 돌린다. 같은 위치 저 만치에 보드를 타던 아이가 주저 앉아 있다. 얼굴엔 생글생글 귀여운 미소가 흐른다. 중학생 정도? 물론 짙은색 고글이 확실한 나이를 가리지만 공연히 친근감이 가는 아이다. 살짝 웃어주곤 단숨에 내달렸다.
그 다음번에도 똑 같은 장소에서 잠깐 쉬는데 또 그 아이가 있다. 여전히 살짝 웃음을 띠고 나를 본다. 넘어진 모습이 아니니 아유 오케이도 필요 없구 나도 그냥 살짝 웃어주곤 다시 달렸다.
그런데 그 다음번 그 자리에 멈추며 난 깜짝 놀랬다. 아니, 어디 다쳤었니?. 썰매가 있고 구조대원이 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아차. 그냥 쉬느라고 앉았던 게 아니었구나.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까 왼쪽 팔에 붕대가 감겨있다. 아이의 등에 메고 있던 벡팩을 내리는데 구조원이 무지 애를 쓰는 모양이다. 많이 아프구나.
그제서야 난 그 아이의 신비한 미소를 알아차렸다. 말을 부치고 싶었던, 도움을 청하고 싶었던,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애를 쓰던 미소였구나. 내가 먼저 물어볼걸. 아유 오케이를 왜 안 했을까. 두고두고 후회스런 일이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괜찮으냐고 물어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는 일에 무척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다. 남의 필요를 미리 알아서 채워주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먼저 도와주자. 말 못하는 심정은 오죽하랴.
옷에 내려 앉아도 젖지 않는 눈이 오늘따라 더욱 고맙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아 한 참을 눈을 맞으며 앉았던 그 아이가 젖지 않았을터니



021304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180 처음 맛 본 이런 희열 노기제 2009.05.21 627
179 살아만 주렴 노기제 2009.06.24 744
178 폭삭, 황금휴가 노기제 2009.07.02 702
177 암이란 터널을 거의 빠져 나올 때 노기제 2009.07.02 810
176 용기 줄 수 있는 방법 노기제 2009.07.04 737
175 비타민 C 노기제 2009.08.03 747
174 잔소리 그리고 절약 노기제 2009.08.15 652
173 어떤 꼬인날 노기제 2009.09.01 675
172 원샷 하던 그날밤 노기제 2009.09.20 783
171 허공에 쓰는 편지 노기제 2009.10.11 664
170 로맨스? 그건 불륜 노기제 2009.11.15 747
169 현찰 좀 넣고 다니지 노기제 2009.12.07 853
168 선물을 고르며 노기제 2009.12.15 842
167 현창이 영전에 노기제 2009.12.20 1079
166 추억 속으로 걸어 간 친구 노기제 2010.02.06 866
165 고백 노기제 2010.04.05 811
164 무소유의 불편함 노기제 2010.04.13 834
163 사랑 해 줄께 노기제 2010.05.03 871
162 엄마 생각 노기제 2010.05.26 721
161 몸 싸움 노기제 2010.05.26 855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96,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