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예 퇴직

2004.05.02 07:00

노기제 조회 수:626 추천:95

불명예 퇴직
노 기제
오 사장님이 내 사무실에 처음 찾아 왔을 때는 계획 된 여름휴가를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미리 오겠다는 전화도 없었고 안면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휴가 좀 가려면 유난히 일이 몰려듭니다. 평상시대로 오시던 손님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내가 없어도 일에는 지장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런 시점에 새로운 손님을 받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아무리 설명을 하고 거절을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성함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고 일을 깔끔히 잘해주신다고 다른 수입업자들이 말해줬습니다. 벌써부터 찾아뵌다는 것이 서류가 이제야 도착해서.....수입을 시작하는 첫 번 서류니까 꼭 좀 해주셔야 합니다. 휴가에서 돌아오신 후 해주셔도 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오 사장님, 사실 휴가가 아니라도 제가 새 손님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젠 일이 힘 들어서요 은퇴 할 준비중이라 고정 손님들까지 딴 통관사로 옮기도록 하고 있거든요. 배가 언제 도착인지 모르지만 두 주일씩이나 미룰 수는 더욱 없으니까요. 다른 통관사에게 가세요. 통관사는 다 거기서 거기 똑 같거든요. 저는 좀 비싸구요. 까다로운 편이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주문도 많고 귀찮게 해 드리거든요. 저 지금 정말 바빠서...죄송합니다."
"아뇨. 기다리겠습니다. 연체료 물게 되더라도 노 선생님 휴가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딴 데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서류 놓고 가겠습니다. 오신 후에 연락 주십쇼."
이렇게 답답할 때가 또 있을까 싶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계속 내치는 것도 사람의 도리는 아니라는 생각에 내가 한 발 물러서기로 했지요. 그 대신 조건을 달았습니다. 서류작성 하기 전에 반드시 내게 물어보고 절대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속여 들여 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라는 대로만 하겠다고 분명하게 약속까지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관계가 이루어 질 때 믿음이 중개 역할을 하면 바쁘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핑계는 극복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날 늦도록 일을 해서 연체료도 발생하기 전에 물건을 찾게 끔 조처를 해 놓고 이튿날 휴가를 떠났습니다.
내가 은퇴를 생각한 이유도, 일이 힘들다고 느낀 이유도, 믿음이란 중개역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때문입니다. 한 번 약속했으면 죽을 때까지 효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 뿐이었습니다. 매번 새 손님을 만날 때마다 분명히 말했습니다. 서류에 표시된 모든 정보는 실제 물건과 항상 일치해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약속입니다.
외국인 회사에서 면허증 없이 일할 땐 전혀 발생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12년 동안 남의 밑에서 일하다가 면허증 따고 내 이름으로 회사를 차리고 13년이란 세월을 13일 인양 기쁘게 일해왔는데 언제인가부터 정직하지 않은 손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입 금지 품목이던지 또는 특별한 조처가 필요한 쿼타 품목이던지 분명히 서류엔 없었는데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노기제 통관사가 통관 시켜 줬다면서 팔고 있다고 합니다.
세관에서 번번이 컨테이너를 열고 물건을 조사하고 통관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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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서류만으로 통관이 되는 것이고 가끔 한번씩 무작위로 조사를 하기 때문에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숨겨 들여오는 수입업자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한국에서 물건을 싣는 사람이 잘못 알고 실수를 했다거나 다른 회사 주문과 바뀌었다거나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처음엔 저도 그런 변명을 믿고 그대로 세관에 전한답니다. 아주 떳떳한 마음으로요.
26년째 똑 같은 일을 해 오면서 느낀 점은 내가 면허증을 갖고 일하는 이곳 미국 로스앤젤레스라는 곳은 여러 나라 출신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적어도 내 일과 관련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정말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세관원들도 식품의약국 사람들도 또 농무국 사람들도 한결 같이 우리의 진실하지 못한 변명을 잘도 믿어 줍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거짓말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가을이면 우리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밤을 들여오기 시작합니다. 밤은 컨테이너채 약품처리를 해야합니다. 냉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다시 실내온도로 올려서 여섯 시간정도 약품처리를 한 후 곧장 수입상으로 배달시키면 다시 냉장고에 보관해야만 빠른 부패를 방지하고 상품으로의 가치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항상 긴장하게 되고 시간을 다투는 품목이라 통관사로선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물건이죠. 그렇게 애를 쓰고 배달을 끝내고 나면 정말 진땀이 날 정도거든요. 그런데 세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손님 컨테이너에서 밤 외에도 고구마, 포도, 사과 등이 나왔다나요. 그럴 리가 없다고 냅다 소리를 질렀답니다. 분명히 너희들 실수한 거라고. 우리 손님은 착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그런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라고.
결과는 나의 케이오 패였습니다. 판정패도 아닌 케이오. 손님을 믿었던 만큼 세관과 실랑이는 길었습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우기기를 사흘이나 걸렸지요. 수입상에 물어보니 얼른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얼버무리기에 더욱 강력하게 세관원을 비난하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시 확인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랬는데도 그 사람들 화 한번 안 내고 차근차근 나를 설득했답니다. 착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도 수입상은 자신은 몰랐던 일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추석선물로 말없이 보낸 것으로 했습니다. 물건을 버리는 것으로 마무리졌습니다. 벌금도 안나오고 거짓으로 말한 이유를 그대로 믿어 준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내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도 싫어졌습니다. 그 손님과는 헤어졌습니다. 손님들과 말하기도 싫어졌습니다. 서류를 받는 것도 겁이 났습니다. 이번 서류는 과연 정직한 서류일까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믿음을 상실하고 관계를 유지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요즘은 구제역이나 광우병 때문에 미국 세관의 신경이 많이 예민해졌습니다. 그 전부터도 고기종류가 내용물에 있으면 수입이 안됐습니다. 세관이 아니고 농무국 담당입니다. 그 고기의 조리과정을 상세하게 요구합니다. 한 번도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으로 서류작성을 해오게 됩니다. 쉽게 내용물 표기란에 고기는 안 쓰면 되는 거죠. 참 많이도 속여먹었습니다. 순진한 사람들 바보처럼 그냥 믿어 주더라구요.
그러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짓거리가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내용물 속여먹기, 제목 바꾸기, 물건 값 올리고 내리기, 손님에게 귀뜸까지 해주며 공모자가 되고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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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런 손님과 결별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다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켓에 가보면 금지품목이라는 물건들이 다 있습니다. 정정당당하게 통관이 되었다고 선전도 합니다. 그게 아니죠. 거짓서류 집어넣고 통관시킨걸 아는 사람은 아는 일입니다. 물건의 구색을 갖추어야만 하고, 몇 십 전을 다투는 경쟁사회에서 나만 고집 세우고 대쪽처럼 살겠다고 손님들 경제사정 모른 척 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원래 식품을 분류할 때 제목 부치기에 따라 관세가 높아질 수도 낮아 질 수도 있는 품목이 있습니다. 또한 식품의약국의 눈을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알게된 사실들을 정직하지 못하게 이용을 하게 됩니다. 한국 식품을 영어로 표기하는 작업에서부터 걸림돌이 되는 사항들을 피해가기 위해서 오랜 경험을 악용합니다.
물건을 수입하려고 수입상들이 품목을 결정할 때 통관사와 의논하고 결정합니까? 아니죠. 가끔 새 상품을 물어올 때도 있습니다. 그 물건은 이런 절차가 필요해서 곤란하고 이런 물건은 절대 금지 품목이고 알려주면 그 사실을 역이용합니다. 그러니까 서류엔 쓰지 않고 숨겨 들여오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미 일은 저질러 놓고 서류를 가져오면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 몰라라고 내치면 간단한데 그렇게 못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방법을 총 동원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통관이 되도록 고쳐나갑니다. 물론 내가 직접 손을 대지는 않죠. 수입상을 교육 시켜가며 한국에서 서류작성을 다시 하도록 피해갈 길을 알려줍니다. 그리곤 엄포를 놓습니다. 이번만 이렇게 하고 다음부터는 이 물건 들여오지 말라고요. 그 다음은 똑 같은 교육을 다시 안 시켜도 알아서 해오지만 통관사인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 됩니다. 운 좋게 잘도 피해 갑니다.
양심이 아우성을 칩니다. 기쁘게 일 년을 하루같이 느끼던 시간들이 이제는 고통스러워 졌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악을 처음 시작 할 때는 손님을 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악에 물들어 가는 나 자신을 더 이상 보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문을 닫기로 남편에게 알렸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올바로 살겠다는 데 남편인들 반대 의사가 있겠습니까. 고맙게도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손님 정리를 끝내고 사무실을 없애고 집으로 들어앉았습니다. 면허증과 컴퓨터와 전화만 있으면 집에서라도 일은 할 수 있습니다. 세관에 등록 취소를 신청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그대로입니다. 손님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임시 휴업처럼 된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도 오 사장님은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절대로 거짓말 안하고 시키시는 대로 할 것이고 물건을 많이 들여올 것도 아니니 우리 것만은 그냥 해주셔야 된다고. 심심풀이로 한 달에 한 건도 두 달에 한 건도 있었습니다. 정말 조용하게 통관이 되곤 했습니다.
초목이 푸르러지는 계절 따라 내 마음도 한껏 푸르러 지는 오월 어느 날 새벽녘에 팩스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한국에서 서류가 들어오는 겁니다. 사무실 치우고 집에서 퍼져 지낸지도 일년이 되는 오월입니다. 제법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남편에게 보입니다. 한 건도 아니고 두 건이네. 얼굴에 환하게 피는 웃음을 보더니 그렇게 좋으냐고 따라 웃어주는 남편이 새삼 고마웠습니다. 씽씽 잘나가던 사업 내 팽개친 아내가 그리 곱지만은 않을텐데 싫은 내색 없이 참아 주는 모습이 따듯이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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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도 새롭게 마음을 쏟아 일을 시작했습니다. 품목 분류하면서 난감해졌습니다.
식품의약국(FDA)에서 정지시킬 품목이 있습니다. 영어 표기가 어설픈 것이 여럿 보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꾸 고쳐나갑니다. 물론 오 사장을 통해 지시하며 한국에서 서류작성을 한 수출업자를 시키는 겁니다. 고치 고 고치 고 또 고쳤습니다. 다행히 식품의약국은 무사히 통과 됐습니다. 한 숨 놓았죠. 농무국(USDA)에서도 별다른 소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관에서 컨테이너를 열어보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문제가 되리라던 식품의약국이 통과되었으니 난 걱정도 안 했습니다. 세관에서 보는 것은 서류와 물건이 일치하는가를 보고 숫자가 맞으면 그만입니다. 아무 걱정도 없이 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내게 온 소식은 두 컨테이너 모두 보류하겠답니다. 이유는 서류와 물건이 맞지 않으니 다시 정정된 서류를 제출하랍니다. 가끔 그런 수도 있습니다. 숫자가 좀 틀린다던가 해도 두 번째 정확한 것을 제출하면 보통은 통관이 끝납니다.
그런데 심상치가 않습니다. 삼계탕이 나왔답니다. 그래? 얼른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수입금지 품목입니다. 서류에는 물론 없죠. 나도 처음 듣는 소립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오 사장에게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라 재빨리 나머지 물건들을 통관시키기 위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리곤 정정된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내가 직접 세관에 나가서 세관원을 만났습니다. 또 틀리답니다. 전혀 맞지 않으니 이번에는 품목 종류대로 박스마다 뜯어서 세밀하게 보겠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자신 있었습니다. 한국말과 영어표기의 차이점 정도이니 내가 직접 가서 설명을 하면 되리라 생각한 거죠.
문제가 되는 땅콩, 굴젓, 수수, 은행, 술 외에도 그냥 서류에 적기만 해도 될 많은 품목들이 두 번째 정정한 서류에도 없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동안도 이렇게 해 왔었는데 무사통과 되다보니 재미가 붙었던가 봅니다.
지금은 두 컨테이너 모두 압류상태입니다. 노기제 통관사는 정직하지 못한 통관사 이름에 줄을 섰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난 꼼짝을 못 하겠습니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용서를 빌고 감량을 신청해야 하는데 오 사장은 소식도 없습니다. 앞으로 다시 일할 용기가 생길지 의문입니다.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오 사장 물건을 위한 일 처리 보단 내가 이 일에 전혀 무관하다는 변명을 하기가 더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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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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