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첫사랑

2005.01.26 09:14

노기제 조회 수:734 추천:107

041704                        괜찮은 첫 사랑


                갑작스레 위암이라니. 무슨 특별한 증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유난히 피곤해 하기에 검사를 했더니 위암 3기 였단다. 칼대고 열어보니 위장 안팎으로 크고 작은 암덩어리들이 빽빽히 둘러 쌓였다. 위장을 전부 잘라낸 후, 소장과 연결을 시켜 놓고 항암 치료를 기다린단다
친구 성희가 들려준  남편의 건강상태이다. 깜짝 놀라 위로의 말도 잊고 입만 벌리고 있는데 이어지는 얘기는 날 또 놀라게 한다. 요즘은 새로 언니가 하나 생겨서 신이 난단다. 근사한  선물도 받고 게다가 형부까지 합세해서 이쁜 처제라며 챙겨주니 늙으막에 웬 횡재냐며 너스레를 떤다.
        중학교 동창인 성희를 만난건 중학교를 졸업한지 40년이 되던해다. 짐차에다 과일과 야채, 반찬들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성희를 명희가 알아보고 연락을 해서 만났다. 단발머리 소녀들이 40년 세월을  싹뚝 잘라버리고 그 시절로 완전히 돌아가 계집애들이 되었다. 어머 기집애. 너 나 안 보고 싶었니? 난 너보고 싶다고 하두 타령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너 아직도 못 만났느냐고 묻곤 하는데.
        그리운 마음이야 다 같을 순 없겠지만, 무척 반가운 친구임엔 틀림없다. 내게 중학교 동창이라면 모두 나보단 어린애들이라고 한껏 앞서 성숙한,  건방졌던 시절의 친구들이다. 그런 친구들이 나이들어 만나면 하는 말이 있다. 넌 동창이라기 보다는 언니 같은 그런 친구야. 어린나이에 자기들 같이 남학생에 관심 두기 보다는 선생님을 좋아하구, 무슨 일에든 어른스럽게 말해주고, 챙겨주던 기억들을 얘기 한다.  십대일 때 그렇게 어른스러웠다면 내 사춘기는 뭔가 잘못 되었던 건 아닐까.
        그런 성희를 다시 만나 깔깔대며 옛얘기 나누는 진짜 소중한 시간을 이제 막 시작했는데, 어두운 소식이 들린거다. 그러나 결코 어둡지 않은 소식이 되었다. 수술후 환자의 믿음과 의지로 병세는 빠르게 회복이 되고 있다. 게다가 때를 맞춰 성희 남편에게 첫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투병하는 남편을 병원에 두고, 사위와 함께 장사를 계속하는 성희의 일상이  조금은 지치고 힘들어진 어느날, 걸려온 전화는 아주 젊은 남자가 성희의 남편을 찾으며, 고등학교 후배라 했단다. 내가 누구냐, 눈치가 몇단인데, 딱 감이 오드라. 아하 이건 어떤 여자가 시켜서 우리 남편을 찾는 전화구나 하고 남편의 셀폰 번호를 주었다나. 직접 통화하라고.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장사 마치고 병원으로 가니, 남편의 얼굴이 봄날 진달래 꽃모양 상기되어 함박 웃음이 피어 있더란다. 누가 그 얼굴을 죽을병에 걸려 수술받은 환자의 얼굴이라고 짐작인들 하겠니. 이러저러하구 저러이러하구 오래 전에 한국에서 몇 번 만나 서로를 위로하며 재 상봉 했던 고교시절 첫 사랑 여인이란다. 한 참 소식이 끊겼었는데 성희 남편의 고등학교 졸업생 주소록을 보고 남자를 시켜서 전화를 한 것이다.
        그 정도라면 그럭저럭 나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  첫사랑 여인이 우리와 같은 학년인데 나이가 성희보다 한 살 위라서 졸지에 언니가 되고 또 그 여인의 남편은 성희의 형부가  됐단다. 별 희한한 촌수도 다 보겠다. 서로가  첫 결혼에 실패를 했고, 철 들어 만난 지금의 배우자들이 한껏 넓은 아량으로 새로운 촌수를 만들어 낸 모양이다.
        우리가 사는 엘에이와 그 들이 사는 뉴욕의 거리는 단숨에 이웃동네로 변했다.성희 남편을 만나러 날아 온 그 첫사랑 여인과  집에서 전화로 성희를 후원하는 그 여인의 남편이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가까운 동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건강을 회복하는데 좋다는 이것저것을 아름아름 구해서 들고 왔고, 성희를 데리고 나가 비싼 물건들을 사 안겨 준단다.
        내가 성희의 입장이 되었다면 난 어땠을까? 뭐 그렇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만 포용할 수는 있겠다. 허지만, 언니이네, 형부네. 선물이네 따위는 영 아닐 것  같다. 성희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너 정말 괜찮아?
        그럼 괜찮지 뭐 어떠냐? 넌 굴곡 없이 곱게만 살아서 이런게 문제 될지 모르지만 나나 애들 아빤 좀 다르지. 이런 인연도 아주 소중하고 감사한거야. 난 정말 신나드라. 선물도 생기고, 형부가 이뻐해 주고, 언니도 생겼으니 얼마나 좋냐? 게다가 애들 아빠 회복이 빨라지니 이 정도라면 괜찮은 첫사랑 아니냐?
        같은 또래 아이들 보다 먼저 성숙하더니 일찌감치 퇴행을 시작했나. 난 도무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아예 내 남편은 첫사랑 같은거 없었으면 좋겠다. 있다 해도 조용히 그냥 지나치길 바란다. 내겐 알리지도 말아 준다면 그냥 편할 것 같다. 어른스럽지 않은 생각이란 건 나도 알겠는데…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다시 만나고 싶은 첫사랑이  없는자의 질투쯤으로 치부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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